□ 면암유배길 유감
지금까지는 4․3길 표지를 보며 그럭저럭 찾아왔지만 본향당을 지나고 나서는 표지가 안 보인다. 4․3길 표지만 월정사에서 이쪽으로 이어진다. 월정사는 4․3때 소실되었다가 복원했지만, 면암이 제주에 왔을 때는 아직 없던 절이다. 난감하다.
‘눈 덮인 광야를 걸어갈 때(踏雪野中去)/ 이리저리 함부로 걷지 말라(不須胡亂行)/ 오늘 내가 걸어간 발자국은(今日我行跡)/ 뒷사람에게 이정표가 되리니(遂作後人程)’
우리가 잘 아는 서산대사의 오언절구다. 갈림길에는 반드시 표시가 있어야 뒤에 길을 찾는 사람들이 헤매지 않을 것이다. 속는 셈치고 월정사까지 가봤으나 허사였다. 다시 돌아와 또 다른 길을 걷으며 한라산을 보니 정상에 구름 한 점이 피어오른다. 계속 냇가를 따라 걸었다.
물론 처음 길을 만들 때는 이정표를 세우고 리본으로 표시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까지 걸어오면서 본 리본은 다섯 손가락으로 셀 정도였다. 길을 여는 행사 때는 주최니 주관이니 후원이니 하며 대표들이 나서서 거창했다. ‘용두사미’라고 그렇게 길을 내놓고 돌보지 않은 것은 큰 잘못이다. 면암 선생이 어떤 분이신가? 옳고 그른 것이 분명한 어른이다. 선생이 지금 와서 보았다면 분명 ‘당장 거두라’고 일갈했을 터.
□ 면암의 유한라산기
한참 걸다보니, 조금 여유 있는 공터 시멘트 담벼락에 ‘구름속의 신선을 찾아 한라산 유람기’라 하여 전문(全文)을 가로쓰기 12단으로 새겼다. 원래 ‘유한라산기(遊漢拏山記)’라는 한문문장인데, 민태식(閔泰植) 선생이 우리말로 옮긴 내용이다.
앞부분은 과감히 생략했는데, 남문을 출발해 10리를 걸어 방선문에 쉬면서 주위를 살폈다는 내용과 다시 10리를 걸어 죽성에서 하룻밤을 뜬눈으로 지새운 다음, 날씨가 험해 만류하는데도 강행했단 내용이 나온다.
지금의 관음사 코스로 탐라계곡과 왕관능을 거쳐 백록담에서 쉬고 동쪽으로 올라 남벽에서 서쪽으로 돌아가다 바위를 의지해 노숙하고 영실로 내리는 과정을 썼다. 과감히 밀고 나가는 필자의 성품이 잘 드러났고, ‘백록담(白鹿潭) 주위가 1리를 넘고 수면이 담담한데 반은 물이고 반은 얼음이었다. 그리고 홍수나 가뭄에도 물이 줄거나 불지 않는데, 얕은 곳은 무릎이, 깊은 곳은 허리에 찼으며 맑고 깨끗하여 조금의 먼지 기운도 없으니 은연히 신선이 사는 듯하였다.’고 묘사했다.
□ 굴다리 아래를 지나 방선문까지
전문을 다시 읽고 걷는데, 갈림길이 다시 나타난다. 오른쪽은 정실남4길이고, 왼쪽은 오라교차로 방향 정실남3길이다. 그러나 아무리 살펴도 표지 같은 것은 안 보여 방선문으로 가는 오라남로 쪽으로 걸어가 애조로 굴다리 밑을 지났다. 그곳 오라 가압장 옆으로 나가니 오라남로가 나타나고 음식점과 석공예장이 눈에 띈다.
얼마 없어 동쪽으로 시멘트 포장길이 나타나는데, ‘방선문’ 표지와 1km 남았다는 면암유배길 표지가 보인다. 녹나무를 가로수로 드문드문 심었고, 황근도 많다. 300m쯤 걸었을까 한천이 나타나고 내 옆으로 오라동길이 나 있다. 방선문이 속한 하천은 제주시내를 관통하는 3개의 하천인 병문천, 산지천, 한천 중 제일 길다. 그리고 한천 상류에 자리한 방선문(訪仙門)은 예부터 경관이 수려해 영주10경 중 ‘영구춘화(瀛丘春花)’로 잘 알려져 있거니와 2014년에는 명승 제92호로 지정되었다.
□ 지금 볼 수 없는 방선문
‘신선이 머무는 방선문 계곡’, ‘오라 올레’, ‘연암유배길’, ‘영구춘화’, ‘방선문이 속한 하천’ 등, 온갖 표지판들이 난무하는 가운데 방선문으로 통하는 진입로는 비닐 테이프로 무장한 채 ‘출입통제’ 안내판으로 길을 막는다. ‘방선문 내 암반 균열 발생으로 낙석 우려가 있어 안전조치가 완료될 때까지 출입을 통제한다’는 것이다.
방선문의 지질 형태는 점성이 높은 현무암질 용암이 흐르면서 만들어진 두꺼운 용암지대에 하천이 침식해 형성된 지형으로 단면은 수직의 주상절리와 수평의 판상절리가 잘 발달했다. 따라서 흐르는 물에 침식된 바위 단면에 많은 마애명을 새겨놓아 그 수가 무려 230여 점에 이른다고 한다.
봄에는 아름다운 꽃이 피어나고 여름에는 시원한 계곡이 좋아 예로부터 목사 일행이나 시인묵객들이 찾아 신선놀음을 해왔는데, 고대소설 배비장전의 배경이 되기도 했다. 지금은 흩어져 있는 주요 마애명을 찾아 일일이 다시 새겨 모아 그 뜻을 풀었고, 꽃동산을 만들어 참꽃나무, 산철쭉 같은 것을 심고는 일대에서 방선문 축제를 치른다.
□ 면암선생과 방선문
유한라산기에는 처음 대하는 방선문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양쪽 가에 푸른 암벽이 깎아지른 듯이 서 있고, 문의 안팎과 위아래에는 맑은 모래와 흰 돌들이 잘 연마되어 그 윤기가 사람의 눈을 부시게 한다. 수단화(水團花)ㆍ철쭉꽃이 열을 지어 좌우로 심어져 있는데, 바야흐로 꽃봉오리가 탐스럽게 피어나고 있으니, 역시 비할 데 없는 기이한 풍경이었다. 한참 동안 풍경에 취해 두리번거리며 조금도 돌아갈 뜻이 없었다.’
이곳에 새긴 면암에 대한 글은 ‘參判 崔益鉉/ 李基瑥 來/ 乙亥’라는 11글자다. 오른쪽에 최익현, 왼쪽에 이기온이라고 나란히 새기고, 멋쩍었는지 최익현 위에 작은 글씨로 참판이라 덧붙였고, 자신의 이름 아래는 직접 ‘왔다’는 표시인지 ‘래’를 새긴 것이다. 을해년은 면암이 유배에서 풀려 한라산에 다녀온 해(1875)다.
아무래도 현장을 확인 못한 아쉬움에 허전한 마음을 접고 돌아섰다. 그래서 방선문 사진은 전에 찍어둔 것으로 대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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