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길 이야기

제주 오라동 4․3길 '해산이동네 가는 길'

김창집 2023. 3. 5. 07:40

*오라 4.3성 일부

 

오라 43성을 지나며

 

 

  43길 센터 옆 연미마을회관 앞에서 해산이동네 가는 길은 시작된다. 거기서 조금 동쪽으로 걷다 오른쪽 연사7길로 들어가는 43길 입구엔 조설대 300m’ 표지판이 크게 세워져 있고, 그 뒤에 짧게 복원한 연미마을 43과 해설 안내판이 보인다.

 

 ‘이곳은 1949년 봄 토벌대의 진압 과정에서 폐허가 된 오라리를 재건할 당시 주민들과 무장대 간의 연계를 차단하고, 주민들을 효율적으로 감시 통제하기 위한 전략촌을 조성하여 쌓은 43성이다. 축성작업은 연미마을 주민들을 동원하여 1개월에 걸쳐 이루어졌다. 이미 많은 젊은이들이 희생되었기 때문에 밤낮없이 보초를 서는데 16세 이상의 여성과 노약자도 동원되었다.’ 하긴 당시 어느 마을이던 비슷한 상황이 펼쳐졌었다.

 

 

*불탄 옛집 터에 세운 안내판

 

오라리 방화사건과 불탄 옛집들

 

 

   그 길로 접어들어 얼마 안 가 불탄 옛집터가 나타난다. 물론 연미마을회관 뒤쪽에도 불탄 옛집터들이 더러 있지만, 이곳에는 불타 사라진 여섯 집의 사진을 당시 오라리 방화사건의 개요를 덧붙여 전시했다. 첫집 고석준 댁부터 허두경, 강병일, 박전형, 강윤희, 박태형 댁 등 여섯 집의 사진이 선명하다.

 

  그 아래에 적힌 사건의 개요를 정리해본다. 429. 오라리마을 대동청년단 부단장과 단원들이 납치된 후 행방불명이 된다. 430일엔 동서간인 대청단원의 부인 2명이 납치되어 두 여인 중 한 명은 맞아죽고 한 명은 가까스로 탈출해 이 사실을 경찰에 알린다. 51일엔 방화사건이 있었다.

 

  방화사건은 오전 9시경 무장대에게 살해된 여인의 장례식에 34명의 경찰과 서청단원, 대청단원 30명이 참석했다. 매장이 끝나자 트럭은 경찰관을 태워 떠났고, 청년단원들은 의심이 가는 집들을 찾아다니며 12채의 민가에 불을 지른다. 오후 1시경엔 무장대 20명가량이 총과 죽창을 들고 청년들을 추격했는데, 큰 충돌은 없었지만 마을 어귀에서 이 마을 출신 경찰관의 어머니가 피살된다.

 

  그 결과 진행 중이던 평화협상은 결렬되었고, 이 사건을 계기로 미군정의 강경진압작전에 큰 영향을 끼쳤다. 만약에 오라동 방화사건이 없이 평화협상이 진행되었다면 77개월의 고통의 세월은 없지 않았을까 하는 가정도 덧붙였다.

 

 

*남쪽에서 본 민오름

 

면암길과 일부 겹쳐

 

 

  이곳에서부터 정실마을에 이르기까지는 면암길은 대부분 겹쳐 국가지정 현충시설인 조설대와 잃어버린 마을 어우늘에 대한 기사는 이미 나갔기에 여기서는 생략하기로 한다. 다만 면암길과 다른 민오름의 산책길을 따라 걸으며 나무 사이로 언뜻언뜻 비치는 오라동 연미마을을 바라보면 격세지감을 느낀다.

 

  민오름은 연미마을과 정실마을 사이에 위치한 표고 251m의 오름인데, 지금은 숲이 울창하지만 43 당시에는 이름처럼 민둥산이었다. 앞서 말한 제주도 메이데이에도 선명하게 나오는데, 오라리 방화사건 전날 대청단원 부인 2명이 납치되어 끌려왔던 곳이다. 오름 중턱에는 43 당시 마을 주민들이 피신했다가 희생당한 동굴들이 있다.

 

*옥련천과 본향당 입구

 

옥련천과 정실 본향당을 지나

 

 

  43유족청년회에서 깃발처럼 세워놓은 제주43유적지안내 표지를 따라 오름에서 내려와 둘레길로 정실을 향해 길을 걷는다. 봄 메밀은 벌써 결실을 맺었고, 호박꽃도 피어 작은 열매를 매달았다. 갑자기 환한 꽃들은 요즘 들여다 퍼지기 시작한 유색 백합들이다. 노란색에 약간 주홍빛이 감도는 꽃들로 주변이 환하다.

 

  아연로를 지난 토천을 따라 난 길로 옥련천과 정실 본향당을 돌아본다. 궷속에 아담하게 자리한 본향당은 아직도 단골들이 자주 드나드는지 깨끗하게 정돈되었다. 이곳도 면암길 편에서 취재해 소개했기 때문에 생략하기로 한다. 월정사로 향하는 길목에서 이번에는 분홍빛을 짙게 띤 메밀을 만난다. 이효석의 대표작 메밀꽃 필 무렵소금을 뿌린 듯 달빛에 하얗게 빛나는 메밀꽃을 생각하면 격세지감을 느낀다.

 

*월정사 일주문

 

비운의 월정사(月井寺)

 

 

  지금은 번듯한 일주문에 울창한 경내를 자랑하고 있지만 알고 보면 폐사가 되었던 절이다. 제주 최초의 선원(禪院)으로 알려진 월정사는 194812월 토벌대에 의해 건물 5동이 불태워졌고, 김석윤 스님의 아들인 김덕수 스님은 토벌대에 끌려가 박성내에서 집단학살을 당한다. 이듬해인 19492월에는 관음사에 방화하고 내려오던 토벌대에 의해 법당마저 불태워져 완전히 폐허가 되었다.

 

  43 이후 몇몇 스님이 그 터에 건물을 짓고 차차 오늘의 모습을 갖추었지만 그 사연은 눈물겹다. 일주문을 지나면 우뚝 선 약사여래불이 맞아주는 경내엔 대웅전, 극락보전, 7층 석탑, 요사채, 범종루 등이 보이고, 소조여래좌상과 목조보살입상이 보존되어 있다.

 

 

*해산이 동네와 몰방에 터

 

해산이동네와 몰방에 터

 

  절에서 나와 아연로를 따라 걷다가 다시 민오름길로 되돌아온다. 갈 때와 올 때 분위기가 다르다. 하긴 43 당시와 지금의 현실을 생각하면 오름 모습처럼 상전벽해라고나 할까. 우리나라도 민주화가 재 궤도에 오르고 43도 해결을 향해 치닫는 형국이다. 연북로를 지나 조금 내려온 곳 길 구석에 해산이 옛 마을 터표지석이 서있다. 사방을 돌아보면 여기저기 대나무 숲이 남아 있고 나머지는 거의 과수원으로 가꿨다.

 

  더 내려오면 더러 새로운 전원주택이 들어서 마당을 잘 가꾸어 문을 활짝 열어놓은 곳도 있다. 연사길에 면한 ᄆᆞᆯ방애 터는 좁은 공간이라 팽나무 한 그루와 간판들이 엉켜 있다. ᄆᆞᆯ방애는 여느 마을이나 마찬가지로 조나 보리를 빻는 공간이었지만 천정엔 상여도구를 보관했고, 비 올 때는 어린이들의 놀이터였었다. <>

 
                         * 이 글은 작년 5월 뉴제주일보에 게재했던 필자의 글입니다.
 

*잃어버린 마을 '어우늘' 표지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