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탐문회 문화 유적 답사기(2005. 4. 17.)
* 전날 예비답사 때 하귀 관전동에서 만난 일몰
▲ 북촌리 선사주거지 유적(제주도기념물 제42호)
주말마다 날씨가 흐리더니, 오늘은 유난히 좋은 날씨다. 길 양쪽에는 활짝 핀
유채꽃이 도열하여 우리를 맞는다. 이번 주에 유채꽃 큰잔치를 벌일 걸 지난 주 아직 꽃도 덜 피고 안개 가득한 가운데 비까지 내려 많은 사람들이
불편한 행사를 치렀다. 기분 좋게 동쪽 북촌리로 간다. 작년까지 몇 해 동안은 읍면 단위로 유적을 찾아다녀서 가끔 중복되는 감이 있었다. 그래서
금년은 주제별로 좀 깊이 다뤄야 하겠다고 생각하여 먼저 선사유적을 돌아보는 것이다.
북촌리 선사주거지는 제주도 화산 활동으로 형성된 동굴을 그대로 이용하여 떠돌아다니던 사람들이 임시로 묵었던 선사시대(先史時代) 집자리 유적이다. 이곳 지명으로는 속칭 '고두기엉덕'이라 부르는데, '엉덕'은 바위 밑 그늘을 말하며, 그늘 부분이 곧 생활공간이 되는 셈이다. 바위 밑 그늘은 정면의 폭 11m, 높이 2.5m 입구에서 안쪽까지 길이 3m이며, 출입구는 햇빛이 잘 들어오는 정남향으로 트여 있다.
동굴 내부는 커다란 암반으로 이루어진 부분과 인위적으로 잡석을 깔아 고르게 만든 부분으로 되어 있다. 잡석을 깔아 놓은 부분에서 1986년 6월에서 2개월간 발굴 조사한 바에 따르면 토기, 나무열매, 조개껍질, 제분용 석기 등이 출토되었다. 이 집자리에서는 여러 시기의 문화층이 확인되었다. 가장 밑바닥 층에서는 한반도의 빗살무늬토기와 다른 신석기시대 말기의 변형빗살무늬 토기가 나왔는데, 탄소 측정 결과 기원전 1,000년쯤 것으로 확인되었다.
* 북촌리 속칭 고두기 엉덕에 있는 집자리 유적
이 문화층의 탄소측정연대는 2950±25년이다. 이 시기에는 장기 거주 흔적이 보이며, 이후 청동기시대, 탐라시대로 이어지면서 일시적인 집자리로 계속해서 이용되어졌음이 조사되었다. 바닥면 서쪽은 천장에서 무너져 내린 큰 암반으로 평탄면을 이룬 반면, 동쪽에서는 원래 무질서하게 천장에서 떨어져 내린 잔돌에 인위적으로 잡석을 깔아 면을 평탄하게 다듬었다. 여기에서 도구와 탄화된 초피 열매가 발견되어 이 구역에서 부엌일이 이루어졌던 것으로 추정된다.
제2층은 갈색 사질토층(砂質土層)으로 표토 아래 30∼45㎝까지로 두께는
15∼35㎝이다. 조개 및 동물뼈 조각이 많이 섞여 있는 층위이다. 곽지패총 4지구 출토 적갈색 경질(硬質)의 심발형(深鉢形)토기와 같은 형식의
토기편이 다량 출토되었다. 층위 바로 밑과 제3층 사이에, 회갈색의 곱고 푸석푸석한 재층과 시꺼먼 목탄층이 3∼6㎝ 두께로 일부 간층(間層)을
이루고 있다.
제3층은 표토 아래 35∼55㎝로서 두께는 15∼25㎝ 정도인 다소 밝은 흑갈색
점토층이다. 조개 및 동물뼈는 소량 혼입되어 있으며, 주로 곽지패총 5지구 출토 적갈색 항아리형 토기(곽지1식토기)가 출토되었다. 타지방의
유물로는 삼국시대전기(A.D 0∼3000. 탐라전기)에 속하는 것으로, 김해식(金海式) 토기의 손잡이 및 파편이다. 적갈색 연질(軟質), 회색
와질(瓦質) 및 회청색 경질(硬質) 등 태토의 색깔과 경도(硬度)가 여러 가지이며, 손잡이편은 소뿔 모양을 납작하게 하고 가운데 길쭉한 홈을
파낸 것으로 이 시대 남한 각지에서 보는 전형적인 김해식 토기 손잡이이다.
* 국립제주박물관에 전시중인 토기
제4층은 표토 아래 52∼72㎝이고, 두께는 12∼27㎝로 밝은 갈색
점토층으로서 조개편이 제3층보다 다소 많아진다. 이 층에는 유물이 거의 없으나, 수점의 공렬토기편과 입술면에 톱날장식이 있는 골아가리 토기편이
이 층위에서 출토되었다. 제5층은 맨 아래층으로 밝은 갈색의 사질토층이며, 조개편은 서로 엉켜 붙어 화석화 과정에 있는 고형질(固形質)로 되어
있는 층위이다. 표토 아래 67∼83㎝까지이며, 그 두께는 25∼37㎝이다. 신석기 시대 토기편이 원상으로 출토되는 층위로, 바로 밑바닥은
신석기시대 당시의 주거바닥으로 이어진다.
유물은 모두 신석기시대 토기로 구연부(口緣部) 아래에 3열 혹은 4열의 원형·삼각점렬무늬토기, 구연이 이중으로 된 겹아가리토기, 조갯날 같은 돌자귀를 연속적으로 비스듬히 눌러 만든 무늬가 장식된 어골(魚骨)무늬 토기 등과 함께 긴 관상(管狀)의 동물뼈를 세로로 쪼개고 갈아서 만든 긴 주걱 모양의 도구가 출토되었다. 이러한 신석기 시대 후기(B.C. 2000∼1000)의 이중구연(二重口緣)의 토기는 전남 흑산도패총, 경남 김해 수가리패총, 부산 금곡동유적 등지에서 출토되는 것과 같다.
지난 4월 3일 왔을 때는 주변에 달래가 많더니 누가 캐어갔는지 하나도 없다.
주변에는 자주괴불주머니를 비롯한 여러 가지 들꽃이 피어있다. 문을 활짝 열고 이미 발굴이 끝난 굴 앞으로 불러들여 오늘의 일정과 제주도 선사시대
유적 전반에 대해 얘기했다. 제주도에서 가장 오래된 유적은 제4빙기인 4만∼3만5천년 전 빌레못동굴 유적이다. 이곳에서는 약간의 석기와
순록황곰뼈 화석이 나왔다. 그러나, 그곳은 막아버려 가지 못하고 박물관에서 유물만 확인해야 한다. 물론 가도 껍질밖엔 안
남았지만….
* 삼양동 고대 마을 유적을 복원한 모습(일부)
▲ 삼양동 고대 마을 유적(濟州三陽洞遺蹟)
삼양동 마을 유적을 가기 위해 다시 차에 오른다. 이제는 완연한 봄이 되어
덥기까지 하다. 한국 고고학 사전에 따르면, 이곳은 원삼국시대 제주도를 대표하는 마을유적으로 제주시 동쪽 삼양동에 동서 1.2∼1.5㎞, 남북
0.5∼0.6㎞의 3만여 평 범위에 위치한다. 그 대부분은 밭으로 조성되고, 유적지 주변부로는 민가가 들어서 있다. 해발 높이 12∼14m
정도의 해안단구상의 편평한 대지에 위치하는데, 유적지 동쪽으로 속칭 '음나물내' 건천, 북쪽 해안으로 수량이 풍부한 용천수가 발달하여 있어 현재
제주시 상수원으로 사용되고 있다.
음나물내를 건너 동쪽으로 해발 172m의 원당봉이 솟아 있는데, 지표조사에 따르면 이 원당봉 기슭에도 유적이 분포할 가능성이 있다고 한다. 1973년에 동 유적 남쪽으로 고인돌(支石墓) 3기, 1986년 제주대학교박물관의 지표조사에서 원삼국시대에 속하는 적갈색토기와 돌도끼 등의 유물을 수집한 바 있어 이미 유적의 존재가 알려졌지만, 주거지 유구는 1996년 제주시에서 실시한 토지구획정리 공사에 의해서 노출 확인되었다.
이에 따라 1996부터 1999년까지 제주대학교박물관에서 수 차례에 걸쳐 발굴조사를 한 결과, 확인된 주거지는 총 230여 기에 이른다. 이 중 155기의 주거지 내부조가가 이루어지고, 나머지는 윤곽만 확인되었다. 236기 주거지 중 반움집 형태로서 원형(圓形)이 173기로 가장 많고, 장방형(長方形) 17기, 부정형(不定形) 18기, 지상식으로서 부정형 주거지 20기와 굴립주 건물지 8기가 확인되었다. 원형주거지는 이른바 송국리형으로서 내부 중앙에 타원형 구덩이를 파고 그 내부 양쪽 끝에 중심기둥의 구멍이 배치되어 있다.
* 국립제주박물관에 전시중인 토기
주거지역이 중심과 주변으로 구분되어 있는데, 6호 주거지에서는 중국 한대(漢代)의 환옥을 비롯하여 유리구슬, 청동기, 철기 등의 외래유물이 집중적으로 출토되었다. 6호 주거지의 북쪽으로 인접하여 각종 토기와 유리구슬, 동물뼈, 조개껍질 등이 다량 폐기된 유구가 있다. Ⅱ-1구역에는 원형주거지 사이사이로 다량의 토기가 완전 소성되지 않은 상태로 발견되는 부정형의 집자리가 배치되어 있는데, 이는 토기제작 등의 작업장으로 추정된다.
각 단위 주거지군 배치상에서 두드러진 특징으로 들 수 있는
것은 10여 기 전후의 주거지가 군을 이루고 한가운데를 비우고 원형으로 배치된다는 점이다. 가장 동쪽에 위치한 Ⅴ구역의 예가 대표적인데, 한
가운데에는 야외 화덕자리(爐址)가 배치되어 있다. 주거지 이외에 마을을 구성하는 시설물로는 석축 담장지 2개소, 폐기장 1개소,
구상유구(溝狀遺構) 1개소가 확인되었다.
주거지 내부에서 출토되는 유물로는 우선 토기를 들 수 있는데, 단면 원형 삼각형 점토띠토기(粘土帶土器)와 제주도의 특징적인 적갈색 외반구연항아리형토기가 특징적이며, 석기로는 간돌검(磨製石劍), 간돌화살촉(磨製石촉[金+族]), 홈자귀(有溝手斧), 돌도끼(石斧), 돌끌(石鑿), 숫돌(砥石), 갈돌(石棒), 갈판 등이 있고, 금속유물로는 한대 삼각형 동화살촉(銅촉(金+族)), 주조쇠도끼(鑄造鐵斧), 그리고 장신구류로서는 유리구슬, 환옥 등이 있으며, 자연유물로서, 보리, 콩과 쌀이 수습되었다.
200여 기가 넘는 주거지로 구성된 마을 유적지로 지금까지 조사된 남한 최대의 마을 유적지 중의 하나로서 원삼국시대에 초기복합사회의 모습을 총체적으로 보여준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또한 제주도에 원삼국시대 집자리가 남한지방에서 청동기시대에 유행하였던 송국리형주거지라는 점에서 집자리 짓기 방식의 전통이 남한에서 제주도로 이어지는 양상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새로 복원해 놓은 옛 움집을 배경으로 기념 촬영을 끝내고 박물관으로 향한다.
* 국립제주박물관에 전시중인 고산리 출토 돌화살촉들
▲ 국립제주박물관 (國立濟州博物館, Jeju National Museum)
선사시대 유적지를 돌다 보면 삼양동처럼 움집을 복원해놓고 전시관을 갖춘 곳도 있지만 대부분은 발굴을 끝내고
아무 것도 없어 허망하다. 하기는 주변 환경을 보며 옛 사람들을 상상해보는 것도 중요하지만 당장 눈에 보이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북촌 유적은
그래도 굴이 있지만 빌레못 동굴은 아예 입구를 막아버렸고, 국사 책에 나오는 고산리 유적도 허허벌판에 간판만 세워져 있다. 그래서 그곳에서
발굴한 유물을 전시해놓은 박물관으로 가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국립제주박물관은 제주시 사라봉 공원 부근에 제주 전통민가 형상으로 지어져 제주의 토착 역사·문화를 종합적으로 소개·전시하는 고고·역사박물관으로 2001년 6월 15일 개관하였다. 대지 5만 572㎡, 연건평 9,287㎡, 지하 1층 지상 2층 건물에 2,511건 7,231점의 유물이 소장되어 있다. 개방적인 해양문화와 제주문화의 형성과정을 문화사 발전 단계별로 볼 수 있도록 대공간 전시실·선사고대실·탐라실·조선시대실·기증실·기획전시실·야외전시장 등으로 구성하였다.
전시실 입구 대공간 전시실에는 제주읍성 축소 모형을 설치해 놓아 제주의 성곽, 건물, 민속을 한눈에 알 수 있도록 하였다. 선사 고대실에서는 고산리 출토 석기, 북촌리·상모리 유적 출토품, 삼양동 유적 출토 유물과 대단위 취락모형 등을 통해 제주의 자연환경과 선사문화가 전개·발전되어 온 과정을 볼 수 있다. 탐라실에서는 삼국시대부터 통일신라시대 동안 발전한 제주 탐라문화의 형성과 발전, 고려시대의 제주 관련 유물을 전시한다. 곽지리유적 출토품, 용담동 선사무덤유적·고내리유적·신창리 해저유적과 제주의 불교유물, 탐라의 옛 지도 등이 있다.
* 국립제주박물관에 전시중인 토기
조선시대실에서는 제주목(濟州牧)을 비롯해 삼읍 체제가 이루어지는 조선에서
근대까지의 제주 모습을 볼 수 있다. 이곳에는 제주목관아지(사적 380) 출토품과 제주의 인물, 유배인과 학문, 생활자료, 회화류, 제주관련
서양자료 등 관련 유물 350여 점과 하멜 표류와 관련된 유물이 있다. 기증실에는 김순이 씨가 기증한 도자기·목가구·의상 등 50여 점이 있다.
기획전시실에서는 제주의 역사와 문화와 관련한 다양한 주제의 특별전시를 개최한다. 야외전시장에 전시된 돌하르방·동자석·정낭 등 제주도에서만 볼 수
있는 유물 100점은 직접 만져볼 수도 있다.
박물관으로 막 들어가는데 누군가가 유홍준 문화재청장을 보았다는 말을 한다. 유홍준 청장이라면 우리 나라에 유적 답사 붐을 일으킨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의 저자이면서, 요즘 한창 잘 나가는 '답사여행의 길잡이' 시리즈를 낸 한국문화유산답사회의 얼굴이다. 우리 박물관대학 졸업생들은 10기를 넘기는 동안 모두 그의 강의를 들었다. 가서 한 마디를 부탁했더니 반기면서 이익태 목사 특별전을 보고 와서 보자고 하더니, "우리 문화 유산 보존과 아끼는 일은 여기 모인 당신들의 힘이 필요하다."는 요지의 이야기를 10여분 동안 해주었다.
* 제주고인돌 100여기를 대표하여 자주 모습을 보이는 용담동 고인돌
▲ 용담동(龍潭洞) 무덤 유적과 고인돌
오늘은 도내답사로 올해 처음 답사이기 때문에 정기총회를 가져야 한다. 큰 안건이
없어 박물관 뒷동산 잔디에 앉아 일사천리로 회의를 끝낸 다음 맘모스 뷔페로 가서 점심을 먹었다. 여유를 갖고 모처럼 답사 도중 시내에서 먹어보는
점심이었다. 마침 학생문화원에서 전국 새우란 전시회가 오늘까지여서 가는 길에 들러보기로 했다. 자주 가보는 전시회지만 갈수록 명품들이 나와 눈을
즐겁게 한다.
제주시 용담동 속칭 월성마을에 위치한 무덤 유적은 해발 40m 내외의 완만한 평지로서, 해안에서 1.5㎞, 제주시 한가운데를 흐르는 한천(漢川)에서 서쪽으로 약 700m 떨어져 있다. 이 유적에서 북동쪽으로 500m 정도 가면 속칭 먹돌생이라 하여 1959년 김철준(金哲埈)이 조사한 고인돌군이 있었던 것이 나온다. 발굴 결과 20-30cm 두께의 경작 표토층, 역시 20-30cm 두께의 무유물층(無遺物層)의 두층 아래 유물 포함층에서 적석유구 묘역(積石遺構墓域)이 확인되었다. 확인된 유구의 범위는 동서 길이 18m, 남북 길이 8m로서, 남쪽과 동서 양끝이 각기 주택 담장과 밭의 돌담으로 잘려 나갔다.
발굴에 참여했던 이청규 교수에 의하면, 묘역은 그 한가운데 동서 방향으로 길게 이어진 석열(石列)을 경계로 하여 남북 두 구역으로 나뉘었다. 남쪽 구역에서는 고인돌 하부구조처럼 보이는 석곽묘 3기, 북쪽 구역에서는 6기의 옹관과 1기의 다소 폭이 좁은 장방형 석곽묘가 확인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전자에서는 공렬토기, 구순부(口脣部) 각목토기, 적색과 흑색의 마연토기(磨硏土器)와 함께 다량의 철제유물과 유리구슬 제품이 발견되었다.
* 국립제주박물관에 전시중인 용담동 출토 제주 유일의 옹관
이 두 구역의 유물은 서로간에 뚜렷한 시기의 차이를 보이는 것으로, 남쪽 구역이
먼저이고 북쪽 구역이 나중에 축조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철기가 출토되는 북쪽은 남쪽과 마찬가지로 할석(割石)을 깔아 놓아 묘역을 확보하였는데,
대체로 전체가 동서로 긴 장방형을 하고 있다. 발굴 착수 당시 이미 묘역의 북쪽은 밭 경계로 끊어져 있어 묘역의 원래 범위를 확인하기가 어렵다.
확인된 묘역만을 보면 동서 길이 15.6m 남북 폭 3.6m로, 총면적은 대략 60㎡로 남쪽 묘역의 2배 가까이
된다.
무덤은 장방형의 공간을 돌로 둘러싸서 만든 일종의 석곽묘(石槨墓)일 가능성이 있는 유구(遺構)도 있으나, 윤곽의 확인이 어려운 예가 있다. 석곽묘는 전체 묘역 중 다소 동쪽으로 치우쳐 있으며, 그 주위로 일정한 형식 없이 독무덤이 배치되어 있다. 이 북쪽 묘역은 남쪽 보다 20cm이상 더 높이 조성되어 있어 자연히 그 상부로 가해진 후대의 교란 정도가 보다 심하였다. 어제 미리 돌아보았기 때문에 곽지리에 다녀오다가 시간이 남으면 보자고 해서 고인돌 유적을 보고 서쪽으로 향했다.
* 고인돌이냐 아니냐를 놓고 설왕설래한 관전동 고인돌
▲ 관전동 고인돌과 하귀지석묘(제주도기념물 제2-22호)
관전동 바닷가에 고인돌이 있다기에 어제 오후에 미리 돌아보러 갔다가 마침 일몰
직전이어서 사진을 찍고 나서 안경을 놓아두고 온 기억이 나서 물이 빠져나간 자리에 있는 고인돌로 안내하고 나서 안경을 찾으러 가보니 마침 그
자리에 있었다. 물이 들어오면 잠기는 곳이고, 바닥 한쪽이 암반으로 되어 있어 고인돌이다 아니다 설왕설래하며 토론하였다. 고인돌은 꼭 무덤인
경우만 있는 것이 아니어서 혹 제사를 지냈던 곳이 아닌가 하고 숙제로 하자면서 곽지리로
향했다.
하귀지석묘 1호는 하천변의 주택 사이 경작지에 있으며, 상석(上石)의 크기는 길이 361㎝, 폭 192㎝, 두께 70㎝로 대체로 장축방향은 남북쪽이다. 상석의 북쪽과 동쪽에 이중으로 놓인 괴석상(塊石狀)의 지석(支石)을 고였고, 다소 지대가 높은 남쪽으로는 작은 돌로 고였다. 이중(二重)으로 겹쳐진 지석은 서귀포시 색달동 지석묘에서도 볼 수가 있다. 2호는 하귀초등학교 구내에 있는 것으로, 상석(上石)은 길이 243㎝, 폭 171㎝, 두께 34㎝로 장축은 북동 방향을 가리키고 있다. 상석의 남서쪽에 큰 할석(割石) 1매를 포함해서 주위를 돌아가며 5매의 납작한 지석을 고였다
그밖에 비지정 하귀지석묘로 학원동에 과수원에 있는데, 상석(上石)은 길이 185cm, 폭 135cm, 두께 25∼40cm로 두께가 고르고 윗면의 평평한 네모꼴이다. 장축방향은 대체로 남북방향을 가리키고 있고, 지석(支石)으로 상석(上石) 남쪽에 길이 35cm, 폭 25cm의 1매의 괴석(塊石)이 고여 있는 것이 확인되었다. 시간이 부족하여 오다가 제1호 지석묘만 보고 그대로 돌아왔다.
* 지방문화재인 하귀리 지석묘 1호
▲ 아직도 토기 파편이 널려 있는 곽지패총(제주도기념물 제41호)
곽지패총은 이미 제주도뿐만 아니라 고고학계에서도 중요한 유적으로 평가받는 유적이다. 이 유적은 선사인이 만들고 사용했던 토기, 석기 등의 일상용품과 먹고 나서 버린 음식물이 차례로 퇴적된 조개더미(貝塚)이다. 이 패총은 지표상에 흩어진 유물 분포 범위가 1만평 이상의 대규모 유적지이다. 바로 내가 나고 자란 마을이어서 패총의 형성 과정으로부터 고려 때 있었던 커다란 해일(海溢), 그리고 전설까지 들려주었다.
1973년이래 여러 차례의 발굴 조사를 통해 제주상고문화의 변천과정을 살피는 데 중요한 자료를 제공하여 주었다. 밑바닥에서는 초기철기시대(기원전 300∼0)에 해당하는 구멍무늬토기 문화층이 확인되고 있고, 그 위층으로는 삼국시대의 항아리형 적갈색토기 문화층이 퇴적되어 있다. 다음 층으로 통일신라시대의 깊은 바리형토기문화층과 연속해서 고려·조선시대의 각종 도자기, 질그릇이 포함된 문화층이 확인되고 있다.
이렇게 오랜 시기동안 연속해서 퇴적된 패총 문화층의 확인되고 있다. 이 패총의 중심시기는 제주의 탐라시대(삼국·통일신라)에 해당된다. 토기는 육지부에서 수입한 회색도기로 나누어지며, 이외의 생활유물로 각종 철기류, 수확용기인 전복껍질로 만든 칼, 간돌도끼 등의 인공유물과 조개껍질, 동물뼈 등의 자연유물이 다량으로 확인되고 있다.
* 국립제주박물관에 전시중인 토기
곽지패총 5지구는 1989년 9월 15일에서 22일 사이에 제주대학교 박물관에서 발굴 조사한 유적이다. 이 지점은 1973년 강판휘미(江坂輝彌)교수가 패총의 퇴적 상태를 처음 발견하였고, 1984년 전주공사에서 2점의 완형 무문토기가 수습되었던 장소이다. 또한 이 지점은 1985년 유리제 곡옥 1점을 지표에서 수습한 지점이기도 하다.
이미 도로 연변을 따라 깎여 나간 길이 15m의 단면을 수직으로 다듬어 그 층위상태를 확인하는 한편, 그 층위 단면에서 노출된 5점의 완형무문토기가 있는 구역에 2×2m의 방형 핏트를 구획하여 발굴하였다. 유물 포함층은 경작표토층 바로 밑에서 드러났는데 패총의 토적층이 아니고 극히 짧은 기간에 이루어진 토기 집락군이었다. 유구의 범위는 동서 3m, 남북 2.5m로 남고북저, 동고서저의 완만한 경사면을 따라 적갈색토기 수십점이 겹겹이 쌓여 있었다.
토기는 퇴적층의 압력에 눌려 깨어져 있었지만 완형 복원 가능한 것이 대부분이다. 야외가마일 가능성을 생각하며 바닥면에 특별한 시설이 있는지를 살펴보았으나 보통 가마터에서 기대되는 불에 구워져 단단하게 된 층도 보이지 않고 토기소성의 증거로 필요한 검은 목탄재도 확인되지 않았다. 토기가 매립된 주위에 별다른 시설도 없으며 더욱이 출토된 완형토기내에 유기물질이 부착되어 있음을 볼 때, 이 유구가 가마터라고 보기는 어려웠다.
완형의 토기가 이렇게 무더기로 쌓인 데에는 특정한 이유와 목적이 있을 것으로 기대되나 발굴조사 현장에서의 단기간 육안 관찰을 통해서 이루어져 아무런 해석을 할 수가 없었다. 유적의 성격에 대해서는 파악이 어렵지만 이 유적이 토기공작이 극히 짧은 기간에 형성되었다는 점에서 이 시기 제주도 토기유물 복합군을 아는 표식적 유적이 되겠다. 이전에 확인되지 않았던 컵형토기, 발형토기, 소형토기 등이 출토되어 원 삼국시대의 제주도 토기 공작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 국립제주박물관에 전시중인 토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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