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북촌의 상징처럼 바닷바람에 시달린 팽나무
♠ 제14회 전국 민족문학인대회
전국 12개 지회를 돌며 문학인대회를 개최해온 민족문학작가회의가 을사늑약 100년, 을유해방 60년, 4. 3항쟁 57주년을 맞아 제주에서 '그 질곡의 세월 넘어 한라에서 백두까지'라는 슬로건을 내세우고 300여 명의 작가가 참가한 가운데 성대하게 거행되었다. 첫날인 4월 1일에는 중소기업지원센터 대회의실에서 문학 심포지엄 '지구화 시대의 4·3문학'이라는 주제로 4·3문학의 새로운 도약을 위한 방법론을 모색했다.
둘째 날인 4월 2일은 제주국립박물관 대강당에서 '고통의
기억을 넘어 평화의 연대로'라는 슬로건으로 전국민족문학인대회가 열려 전란의 참상을 체험하고 그것을 예술적으로 재현해낸 아시아의 대표적인 작가로서
진정한 평화와 인권을 정립하기 위한 아시아 작가들의 연대를 모색하는 자리를 가졌다. 이 대회에서는 소설가 현기영 선생의 '고통의 기억을 넘어
평화의 연대로'와 팔레스타인 시인 자카리아의 '아시아 작가들의 연대를 위하여'라는 연대 발제가 있었다.
* 4. 3의 영혼을 매개하듯 날아오르는 까마귀
이어 문충성 시인의 개막 서시 '질곡의 세월 넘어 한라에서
백두까지', 염무웅 이사장의 대회사 '반민족적인 것들을 준엄하게 꾸짖는 민족문학의 이름으로', 김광렬 제주지회장의 '통한의 세월 넘어 남북
분단의 맺힌 고리를 푸는 시발점'이 이어졌다. 제주시장의 축사는 행사 중에 이루어졌고, 팔레스타인 시인 아부하시하시의 발언과 시낭독, 김병택
부회장의 주도로 전국 민족문학인 제주선언, 끝으로 문무병의 굿시가 시연되었다.
이 날 거리굿 및 4·3 전야제를 참관한 작가들은
하니크라운호텔 연회장에서 어울림 한마당을 가졌고, 셋째 날인 4월 3일에는 4·3평화공원에서 열리는 위령제 행사를 참관한 다음 이 기행에
참가했다. 이번 기간 중에 4·3평화공원에서는 제주작가회의 주최로 시화전이 열렸고, 대회를 기념한 4·3평화 인권 공동 시집 '뼈를 잇고 살을
붙여 피를 돌게 하고'를 발간했다.
* 유서 깊은 마을임을 증명하는 북촌리 바위 그늘 집자리
♤ 너분숭이에서 가진 평화 기원제
이번 문학 기행지인 북촌리는 4·3 당시 제일 많은 희생자를 낸 마을이다. 1948년 11월16일과 한 달 후인 12월 19일(음), 두 차례에 걸쳐 450여 명이 희생되었고, 마을의 가옥이 전소되는 비운을 맞았다. 북촌 사람들의 집단 희생은 제주도민이 겪은 여느 마을, 집단의 사건 양상과는 다른 진압 군인들에 의하여 자행된 대학살 사건이다. 그런 이유로 이 마을 속칭 너분숭이에서 작가회의 주최로 희생자 가족들을 모신 가운데 평화 기원제를 지낸 것이다.
마침 청명과 한식을 앞둔 일요일이었기 때문에 나는
도종친회에서 묘제(墓祭)가 있어 위령제에는 참석을 못하고 혼자 차를 몰고 먼저 북촌리에 도착해 바닷바람 때문에 육지 쪽으로 기운 이 마을
상징물과 같은 팽나무를 촬영하고, 내친 김에 북촌 바위그늘 집자리 유적까지 다녀올 기회를 가졌다. 다녀오고는 바로 일행이 도착해 있어 도시락
먹기를 기다려 기원제에 들어갔다.
* 순이 삼촌의 작자 현기영(가운데) 선생 등 3헌관
먼저 현기영 선생을 비롯한 작가회의 임원들이 3헌관을 이뤄
제를 지냈고, 각 대표들이 나와 분향한 후 평화 기원비를 제막하면서 동백나무로 평화 기원 기념 식수를 하고 전국에서 가져온 흙과 물을 뿌려
합토, 합수식을 거행했다. 이곳은 4·3을 문학적으로 형상화하여 진실 규명의 물꼬를 텄던 소설 현기영의 '순이 삼촌'의 배경이 되는 곳이며,
애기무덤인 아총(兒塚)이 보여주는 무고한 인권 유린의 상징적 장소다.
이어 유족 대표의 인사를 시작으로 현기영 선생의 취재 당시
회고담, 이곳 너븐숭이 이야기를 중심으로 북촌 마을의 피해 상황을 기록한 '애기무덤'의 필자 황요범 선생의 소개가 있었고, '잠들지 않은 남도'
노래 합창으로 끝났다. 이 날 발행한 책자 '애기무덤'에는 '4·3이 남기고 간 북촌 사람들의 집단 희생'에 대한 기록이 구체적인 인명, 재산
피해 내용과 함께 실려 있다.
* 돌로 둘러 있는 애기무덤들
♠ 애기무덤들이 슬픈 '너분숭이'
1949년 1월 17일 함덕 주둔 2연대 3대대 군인들에 의해 북촌국민학교 운동장에 집결한 북촌리민들은 50여명, 100여명 단위로 끌려나갔다. 먼저 학교 동쪽 당팟쪽에서 총소리가 났다고 한다. 그리고 이곳 너분숭이 일대로 주민들을 끌고 온 군인들은 속칭 탯질, 개수왓 등지로 끌고 가 주민들을 집단 총살했다. 시신을 수습하기에도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임시 가매장했다가 사태가 안정된 후 안장되기도 했으나, 일부 어린이들은 당시 매장한 상태로 지금까지 그대로 남아있다.
주민 김석보 씨는 "어머니와 내가 그 날 세 동생의 시신을
너분숭이에서 발견했다. 어머니는 뒷날 이곳에 와서 동생들의 시신을 너분숭이 구석에 임시 매장했다. 지금도 그때 묻은 자리에 그대로 동생들은
묻혀있다."고 증언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하기는 이곳에 있는 애기무덤(兒塚)이 모두 4·3 당시 희생된 어린이들의 무덤으로 보기는 어려운
점도 있다. 그 시기를 전후해서 전염병 등으로 죽은 시신들이 있었을 터이므로.
* 제의 절차를 지켜보는 팔레스타인 작가들
이 무덤들은 소나무 밑에 가시덤불이 무성한 상태로 있다가 2001년도 북제주군 소공원
조성사업으로 부지가 정리되면서 드러나게 된 것이다. 지금 현재 이곳에는 20여기의 애기무덤이 모여 있고, 옆 밭에도 1기가 있다. 잔디를
입히거나 변변한 봉분도 없이 초라하게 흙으로 덮여 있어 당시의 참혹하고 무모한 학살을 웅변으로 전해주는 공간이다.
제주말로 빌레에 자리한 곳이어서 원두막을 연상시키는 어설픈
정자(?)가 서 있고, 애기무덤 옆으로 개량 동백이 너무 붉은 색으로 피어 있어 슬프다. 오늘 찬바람이 심하게 부는 이 자리에 서보니,
엘리어트가 말한 '잔인한 달 4월'이 실감난다. 제주사람들은 4·3 때문에 4월이 잔인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 감정을 갖고 있어 그런지
길가에 늘어선 유채꽃조차 슬퍼 보인다.
* 취재에 열중인 일본서 온 소설 '화산도'의 작가 김석범 선생
♤ 주민들의 집결 장소였던 북촌초등학교
1949년 1월 17일 아침 세화 주둔 2연대 3대대 중대 일부 병력이 대대본부가 있던 함덕으로 가는 도중에 북촌초등학교 서쪽 고갯길에서 무장대의 기습을 받아 2명의 군인이 숨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마을 원로들은 숙의 끝에 군인들의 시신을 들것에 실어 함덕 대대본부로 운반했다. 그러나 함덕 주둔 3대대 군인들은 스스로 운반했던 사람들이 10명의 연로한 주민들인데도 불구하고, 경찰가족 1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총살해버렸다.
그리고, 2개 소대쯤의 병력이 북촌 마을을 덮쳐 숨을 만한
곳을 뒤지고 집에 불을 지르며 주민들 모두에게 학교로 집결할 것을 명령했다. 학교운동장을 에워싼 군인들에 의해 기관총이 3각으로 장전되어
주민들의 도주를 차단하고 있는 가운데 군 지휘관이 민보단장을 불렀으나 타 지역에 출타 중이었다. 이에 머뭇거리던 청년단장 장운관(39)이 나오자
"민보단 운영을 이따위로 해서 폭도를 양산시켰다."고 질책하면서 총대로 때린 뒤 웃옷을 벗겨 운동장을 돌리다가 뒤에서 사살해버렸다.
이에 집결했던 주민들이 당황하기 시작하자 학교 울타리에
설치됐던 기관총이 불을 뿜더니 주민 7명이 쓰러지면서 운동장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널브러진 시체를 한쪽으로 옮기는 사람들이 있었고
연고가 없던 하인 조모 씨의 시신은 군인들에 의해 서쪽 울타리 밖으로 던져졌다.
* 마을의 역사를 지켜본 팽나무
그 후 군경 가족과 민보단 가족의 구분 과정에서 주민들은 직감적으로 군경 가족 대열에 들어가면 살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여 어떻게든 그 대열에 합류하려고 했다. 용케 들어간 사람도 있지만 대부분은 군인들의 제지로 합류하지 못했다. 이 과정에서 한 여인이 군인의 총에 사살되고, 그 품에 안겼던 아기는 죽은 어머니 젖을 빨려고 울며 덤볐다는 애달픈 사연이 전해진다.
우왕좌왕하는 사이, 월정에 주둔한 11중대를 시찰하고 돌아오던 3대대장은 북촌리가 불타고 주민들이 집결한 것을 보고 북촌초등학교로 왔다. 보고를 들은 대대장과 휘하 장교들은 대대장이 타고 온 차량(앰블런스) 안에서 주민들에 대한 처리 방안을 놓고 즉석 회의를 했다. 당시 제주경찰서 차량계 소속 경찰로써 그 날 임시로 대대장이 승차한 차량을 운전했던 김병석(남, 76세)은 "앰블런스 안에서 대대장을 포함한 지휘관들이 의논을 하는데 기관총을 걸고 집중사격을 가하자는 등 여러 가지 방안이 나왔다. 그런데 한 장교가 '우리 사병들은 적을 사살해 본 경험이 없는 군인이 대부분이다. 그래서 적을 사살하는 경험도 쌓을 겸 몇 명 단위로 데려가서 총살시키자'는 제안을 했는데 그게 채택이 됐다."고 증언했다.
* 집결지로 사용됐던 비극의 장소 북촌초등학교
군인들은 주민들을 학교 동쪽 당팟과 서쪽 너분숭이 일대 등으로 끌고 가 총살하기 시작했다. 그때까지 넋을 잃고 총소리를 듣던 김병석 씨가 대대장에게 호소했다.
“대대장님 저기 있는 사람들 중에는 우리 친척도 있고 동창도
있습니다.”
“저 사람들을 살리면 어디로 보내느냐?”
“함덕은 큰 마을입니다. 친척들도 있을 것이고 살릴 수 있습니다.”
“좋다 그럼 가서 아는 사람을 선별하라!”
그렇게 된 이후에 비로소 계속되는 총살은 멈출 수 있었다.
하지만 벌써 340여명 이상의 주민이 학교 주변 이곳 저곳에서 참혹하게 쓰러진 뒤였다.
* 또 하나의 학살 장소 옴팡밭
♠ 또 한 번 피비린내를 풍겼던 학교
북촌초등학교 운동장은 또 하나의 역사 장소로 기록된다. 북촌대학살이 있은 지 5년 후인 1954년 1월 23일 세칭 '아이고 사건'으로 다시 한번 4. 3의 아픔을 되새기게 한 것이다. 이 날 한국전쟁 참전 전몰장병인 북촌 출신 김석태의 고별식을 끝내고 제주의 전통 풍습인 "꽃놀림(꽃상여를 만들어 들고 다니면서 영혼을 위로하는 풍습)"을 통하여 젊은 나이에 세상을 뜬 영혼을 학교 운동장에서 추도키로 했다.
당시 마을 이장이던 신승빈은 "이왕 꽃놀이를 하는 바에
4. 3 대학살 때 죽어간 영혼을 함께 달래자"고 제안했다. 이에 주민들은 술을 올리고 망자의 이름을 부르며 "아이고, 이이고(초상 및 대소기시
상주들이 내는 울음소리)" 하며 대성통곡을 시작했다. 황급히 달려온 지서 경찰에 의해 제지됐지만 그 후유증은 컸다.
제주경찰서는 '4. 3 당시 형살자를 추모했다.'는 죄로
신승빈 이장 등 마을 주민들을 조사하여 반성문을 쓰게 하는 등 4. 3의 한을 더욱 덧칠하여 북촌 주민들을 옥죄었다 한다. 당시 북촌초등학교는
단층 기와였으나 마을이 소각된 후 초등학교 건물은 해체되어 함덕리 한청단장 한재원이 창고를 지어 한청 사무실로 쓰이기도 하였다. 지금은 학교의
부지가 당시와 별반 차이가 없으나 건물의 형태는 옛날의 모습을 아는지 모르는 지 새롭게 변모돼 있었다.
* 말없이 사건 현장을 지켜본 북촌포구의 도대불
♤ 북촌 포구와 도대불
1948년 6월 16일 우도에서 출발한 한 척의 배가 북촌 포구로 들어왔다. 제주읍으로 향하던 이 배는 갑자기 몰아친 풍랑 때문에 함덕포구로 향하던 뱃머리를 북촌포구로로 돌리게 된 것이다. 당시 이 배에는 양태수 경사(27세/우도지서장 한림 출신)와 진남호 순경(23세/인천 출신)을 포함해 15명이 동승하고 있었다. 당시 서장은 북촌 해안을 지나며 고기떼를 향해 총을 쏘곤 했는데 이 소리를 듣고 북촌 주민들은 포구에 모여들었다.
배가 북촌 포구에 닿자 3명의 남자가 배 위에 올라와
양태수 경사를 그 자리에서 쏴 죽이고 진순경에겐 총상을 입혔다. 청년들은 동승했던 사람들을 끌어내어 선흘곶으로 납치해 가서 굴에 감금했다.
9연대는 강노반 중위의 지휘 아래 수색작전을 펼쳐서 납치 당한 사람들을 6일만에 구해냈다. 총상을 입었던 진순경은 감금 상태에서 도망치다가
무장대에게 붙잡혀 죽었다고 한다.
* '애기무덤'을 발간한 황요범 인화초등학교 교감
이 포구사건으로 인해 북촌마을은 더욱 폭도의 소굴로 '찍히는' 결과를 초래하여 그 후 대학살을 낳게 한 도화선이 되었다는 분석을 하기도 한다. 포구에 있는 도대불은 '등명대(燈明臺)'라는 표지석에 '대정(大正) 4년(1915년) 12월 건립'이란 글자가 선명하다. 이 도대불은 민간등대의 역할을 했으며, 관솔불로 지피거나 호롱불 혹은 석유 등피를 사용했다. 지금은 낡아 형체만 남아 있으나 도내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알려졌다.
그 옆 식당에서 주인인 신의정 이장이 우리
마을의 현안을 위해 방문해 줘 고맙다고, 4. 3의 완전한 해결을 위해 작가분들이 노력해 달라면서 소라와 문어를 안주로 내놓고
이곳에서 얼마든지 술을 드시고 가라고 했다. 이미 비행기 시간 때문에 출발해버린 작가 분들을 빼고라도 200여 명이나 되는 작가회의 식구를 위해
손님을 안 받으면서 기꺼이 자리와 맛있는 안주를 마련해준 이장 님께 이 난을 빌어 고마운 인사를 드립니다.
* 북촌 포구에서 만난 자유를 꿈꾸며 비상하는 대백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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