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향토문화 기행

봄비 속에서 찾은 고려(高麗)

김창집 2005. 4. 6. 14:29


--- 박물관대학 고려 유적 답사 안내기(2005. 3. 27.)

 


 

* 이 날 참가했던 박물관 대학 수강생들

 

 제주시가 평생교육 차원에서 설강(設講)하고 있는 박물관대학 13기 재학생 120명이 맨 처음 도내 답사에 나섰다. 오전 내내 비가 내리는 가운데 실시되었던 이 답사에서는 고희(古稀)를 맞은 할아버지, 이순(耳順)의 할머니 수강생들도 뭔가 찾아보려고, 나의 해설에 귀기울이며 열심히 듣는다. 어느 하나 놓칠까봐 열심히 메모하는 모습이 너무 보기 좋아 하루 종일 신바람이 났다.

 

 일요일 낮부터 비가 오리라는 예상을 깨고 전날 저녁부터 비가 내리기 시작하자 시청 박물관 대학 담당자가 전화를 걸어 근심스런 어조로 자문을 구한다. 바쁜 현대인이 스케줄은 하나가 허물어지면 다른 일정에 차질을 빚기 때문에 강행해야 한다면서 비옷이나 우산을 준비하도록 했다. 첫 나들이어서 10시에 출발하는 바람에 제일 멀고 시간이 걸리는 하원동 탐라왕자묘를 뺐기 때문에 그렇게 어려운 곳은 없으나 도시락을 준비했다니까 점심 식사할 곳이 문제였다.

 

 아침에 일어나 창 밖을 보니 여전히 비가 추적거린다. 이보다 더 험악해져 눈코 뜰 새 없이 내리지만 않으면 큰 문제는 없으리라 생각하며, 8시 오름오름회 출발하는 곳에 가서 회원들을 빗속으로 보내고 돌아와 우산 하나 꺼내 들고 시청으로 갔다. 강좌가 워낙 인기가 있어 수강자들이 몰리다 보니까 혹시 결석하면 떨어져 나갈까봐 보결생들까지 합쳐 125명이 모였다는 얘기다. 아무려나 고무적인 일이라 생각하며 10시 정각에 삼양동으로 출발했다.    
 


 

* 불탑사 대웅전 앞 물 오른 단풍나무

 

▲ 불탑사 오층석탑(佛塔寺五層石塔) 
 
 제주도의 계룡산으로 불릴 만큼 독특한 오름 원당봉에 자리한 '불탑사 5층석탑'은 사실 '원당사지 5층 석탑'이라야 맞는데, 지금 소재한 곳이 불탑사여서 그렇게 명명되었다. 원당봉은  표고 170.7m, 비고 120m, 둘레 3,411m의 아담한 크기의 오름이지만 좁은 공간이지만 삼첩칠봉(3疊7峰)으로 천태종(天台宗)의 문강사, 조계종(曹溪宗)의 불탑사, 태고종(太古宗)의 원당사 등 3개 종파의 절이 들어서 있는 곳이다.

 

 빗속에 고즈넉이 서 있는 높이 3.85m의 불탑사오층석탑은 고려시대의 석탑으로 1993년 11월 19일 보물 제1187호로 지정되었다. 이 석탑은 고려 충렬왕 때 창건되었다고 전해지지만 전설에 근거한다면 원나라 순제의 황태자 아이시리다라가 태어난 1339년을 기준으로 충숙왕이나 충혜왕 때라야 맞다. 옛 원당사(元堂寺)는 조선 중기에 폐사가 되었고, 현 불탑사는 1950년대 이후 원당사터에 건립되었으며, 근래에 석탑을 해체하여 터를 넓히고 다시 복원하였다.


 


 

* 보물 제1187호 불탑사오층석탑

 

 단층기단 위에 5층의 탑신을 조성하고 탑 정상에 상륜(相輪)을 장식한 일반형 석탑인데, 통돌로 조성한 지대석 상면에는 낮은 1단의 굄을 하여 기단을 받고 있으며, 기단의 면석(面石)에는 뒷면을 제외한 3면에 같은 크기와 형식의 안상(眼象) 내에 귀꽃무늬를 장식하였다. 각층의 탑신석(塔身石)에는 두 우주(隅柱)를 개설해놓아 주목된다. 각층의 탑신은 소문(素文)이지만 각층 옥개석은 낙수면이 평박하여 합각선(合角線)이 뚜렷하며 네 귀퉁이의 전각(轉角)에 반전(反轉)이 있어 경쾌한 면도 보인다.

 

 이 석탑은 현무암으로 건조된 것으로 석재가 특이하고 기단부의 구조, 첫층의 탑신의 감실, 각층의 옥개석 형태로 보아 고려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며, 제주도 유일의 고려 석탑이란 점에서 문화재적 가치가 높다. 전설에 의하면, 고려말 태자가 없던 원나라 순제가 북두의 명맥이 비친 삼첩칠봉에 탑을 세워 불공을 드려야 한다는 한 승려의 계시를 받아들여 탐라국 원당봉에 원당사라는 절과 탑을 짓고 사자를 보내어 불공을 드렸던 곳이다. 내리는 비가 너무 굵어져 서둘러 얘기를 마치고 다음 답사지로 발길을 돌린다.

 



 

* 고조기묘 경내에 피어 있는 산수유꽃

 

▲ 문경공 고조기묘(文敬公高兆基墓) 
 
 다시 제주시내로 진입하여 아라동에 있는 고려시대의 문신 고조기(高兆基)의 묘로 간다. 중앙여고를 지나 신제주로 새로 난 길로 진입하여 갓길에 차를 세우고 내리니 옆 유치원에 벚꽃이 만발이다. 지금 공설운동장 옆에서는 꽃 하나 없이 벚꽃축제를 여는데 안됐다고 생각하며, 무덤 동남쪽에 탐라왕의 사당을 짓고 문을 새로 세우느라 어질러진 골목길을 들어서자 산수유 한 그루가 가지마다 꽃을 가득 피우고 나를 맞는다.

 

 1977년 7월 13일 제주도기념물 제38호로 지정된 고조기묘는 사각형의 분묘인데, 문인석, 무인석, 동자석 등 석물(石物)이 잘 남아 있고 얼마 전에 새로 세운 비석이 듬직하게 서 있었는데, 매년 4월 9일에 제주고씨 종친회에서 제향을 올린다. 묘 앞에 서서 사람들이 오기를 기다려 설명을 시작한다. 공은 고려 초기의 문인으로 초명은 당유(唐愈), 호는 계림(鷄林)이며 시호(諡號)는 문경(文敬)으로 1157년(의종11)에 별세하였다.


 


 

* 여러 가지 석물도 갖춘 무덤

 

 그의 아버지는 고유(高維)로 1057년(문종11) 우습유(右拾遺)를 거쳐, 1070년 비서소감(秘書少監)으로서 동북로병마부사(東北路兵馬副使)와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를 지냈으며, 탐라 고씨로서는 최초로 관직에 올랐다. 문경공은 고려 조정에 출사(出仕)한 이래 칠순의 노령으로 퇴임할 때까지 오직 충절과 청백으로 일관하였다. 이러한 충절을 조정에서 인정하여 수사공상주국(守司空上柱國)이라는 칭호를 주어 그 직위를 높여 주기도 했으며, 시문(詩文)에도 뛰어나 시집(詩集)을 3권이나 저술하였다.

 

 탐라성주와 시어사를 거쳐 인종 때는 김부식과 더불어 묘청의 난을 평정하였고, 중서시랑평장사에 올랐다. 시문에 뛰어나 그의 글귀가 옛 고려 문헌 여기저기 실려 있다. 묘소는 제주시 아라동 지경 남문 밖 제궁동산에 안장하였는데 제주도내의 묘소 가운데 양식과 형태가 비교적 양호한 묘이며 묻힌 사람이 누구인지 밝혀진 가장 오래된 무덤이다. 제주도에는 고인돌은 100여기 남아 있으나 탐라왕의 무덤은 나타나지 않는다. 

 


 

* 산세미오름 앞에 자리한 김수 장군 못

 

▲ 삼별초를 막으려다 전사한 김수 장군묘

 

 제주도에 남아 있는 고려시대 무덤은 몇 안 된다. 아니 몇 안 된다기보다 정확하게 알려진 것은 고조기 묘 하나 정도다. 다음 우리가 가는 곳은 또 하나의 고려 무덤으로 추정되는 김수 장군 묘다. 김수(金須) 장군은 1270년 9월 영암부사로 삼별초 선발대의 입도를 막기 위해 제주에 왔으나, 그해 11월 삼별초군과 제주 송담천 전투에서 사망한 분이다. 그의 추정 분묘는 북제주군 애월읍 광령2리 산세미오름 자락에 있다.

 

 1100도로를 거쳐 한밝 저수지에서 서쪽 원동으로 빠지는 산록도로 중간쯤에 차를 세우고 내리니, 비가 그쳐 있었다. 천아오름 신엄공동묘지 입구라는 표지판이 있는 골목으로 50m쯤 들어가면 조그만 못이 있고 김수 장군 유적비가 있다. 사람들이 다 오기를 기다려 당시 여몽 연합군과 삼별초군의 싸움 이야기를 하면서 또 하나의 동족상쟁의 희생이 되었던 김수 장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 제일 위에 자리한 김수 장군 묘 주변

 

 거기서 200m 거리 산세미오름 기슭 제일 위에 자리한 김수 장군 추정묘는 같은 산담 안에 있는 옆 무덤 후손들의 배려로 지금까지 온전히 남아 있는 것으로 후손들이 돌보지 않아도 벌초를 안 했는데도 잘 보존돼 있어 이런 것이 명당자리가 아닌가 하며 얘기를 꺼냈다. 현무암 판석(20매)을 이용해 직사각형으로 만든 이 분묘는 석곽의 길이가 480cm로, 도내 방형 석곽묘 가운데 가장 길다. 봉토가 함몰돼 있으나 보존 상태가 매우 양호했다.

 

 그러나 이 무덤에 대해서는 이견(異見)이 있다. 김수 장군의 아들 태현의 묘가 개경 선산에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북제주군에서는 이 분묘가 고려∼조선시대 제주도 묘제 변천사를 조명하는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는 자료로 가치가 높다는 의견을 제시하면서 문화재로 지정해 줄 것을 신청했다. 현재 제주도문화재 가운데 방형 석곽묘는 서귀포시 하원동 탐라왕자묘역 1, 3호분, 김녕리 묘산봉 광산 김씨 방묘와 가시리 설오름 청주한씨 방묘 뿐이다. 그러나, 오늘은 너무 늦게 출발하는 바람에 탐라왕자묘는 못 간다.

 


 

* 법화사지 앞 석등

 

▲ 점차 복원되는 법화사지

 

 다시 차를 타고 서부관광도로를 통하여 법화사지로 달린다. 다행히 비가 갰고 법화사지에는 유치원 어린이들을 위한 구내식당이 있어 그곳에서 도시락을 먹어도 좋다고 허락을 받은 터이다. 법화사지(法華寺址)는 서귀포시 하원동에 있는 옛 절터인데 1971년 8월 26일 제주도기념물 제13호로 지정된 곳이다. 창건 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1269년(원종10)부터 1279년(충렬왕 5)까지 중창하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탐라지'에 따르면 1653년 이전에 폐사 되었다고 한다.

 

 1983년 발굴조사 때 현 대웅전 자리에서 법당지로 보이는 건물 터를 발굴하였는데, 규모가 정면 5칸, 측면 4칸의 건물로 기단면적이 약 330㎡인 대단히 큰 건물이었다. 기단의 지대석은 2단이며, 면석이 있는 자리에 턱이 있는 것 등은 오래된 특이한 양식이다. 이곳에서 발견된 도자기 조각과 기와 조각들로 미루어 10∼12세기경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의 대웅전은 1987년에 다시 지은 것이다.


 


 

* 발굴 시 나왔던 기단돌들

 

 법화사는 비보사찰로서 한때는 노비가 280명에 이르렀으나 1408년에 30명으로 감축되는 등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제주도의 사찰 유적중 대표적인 것으로는 고려말에 세워진 제주시 외도동의 수정사지(水精寺址)와 법화사지(法華寺址)가 있다. 이 중 이 법화사는 장보고(張保皐)가 세운 완도 청해진(靑海鎭)의 법화사와 관련짓는 사람이 있으나 근거가 희박하다. 법화사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조선왕조 태종실록(太宗實錄)에서 찾아볼 수 있다.

 

 1406년(태종6)에 법화사에 안치중인 아미타삼존불상이 원나라 때 양공(良工)이 만든 것이라 하여 명나라 사신이 이곳까지 와서 가지고 가려하자 조선 조정은 불상보다는 탐라의 형세를 파악하고자 하는 의도로 받아들이고 불상을 가져오게 해 중국에 보냈다는 것이다. 지금은 1981년 발굴조사된 금당지(金堂地) 위에 법화사 대웅전이 복원되어져 있는데, 아래 기단은 중창당시의 기단석을 그대로 사용하였다.


 

 조선초기의 기록에 의하면 이곳 법화사의 노비숫자가 수정사에 비해 곱절 많았던 것으로 미루어 그 규모가 상당히 컸으리라 추측된다. 1971년이래 지방기념물 제13호로 지정 보호되고 있는 법화사지는 1982년부터 8차례에 걸친 발굴로 사찰의 규모와 성격이 확인됐다. 이에 따라 법화사는 2004년까지 구품연지와 대웅전, 요사채, 중화루 등 13개 동의 당우를 복원했다. 점심을 먹고 몇 분은 헌와(獻瓦)했고 구품연지에 세워져 있는 입술 세 곳을 꿰맨 사내의 입상을 보고는 항파두리로 향했다.

 


 

* 항몽 유적지의 돌쩌귀들

 

▲ 오면서 들른 항몽유적지

 

 비가 그치고 날씨가 개이자 답사자들의 얼굴도 확실히 밝아진다. 이곳 서귀포에도 이제야 목련꽃이 피었다. 큰 상점 앞에 차를 세운 여학생 간부들이 마실 것을 사서 3대의 차에 나눠준다. 차안에서 고사리 꺾는 얘기가 나오길래 주변에 있는 고사리 산지를 알려주자 아줌마들이 좋아한다. 애월읍 고성리에 있는 항파두리 항몽유적지는 고려 때 몽고의 침략을 받아 나라를 지키려고 김통정 장군을 비롯한 삼별초군이 최후까지 항전하다 장렬하게 순의(殉義)한 곳이다.


 삼별초는 고려군의 정예 별동대로서 고려 원종11년(1270) 2월 고려 조정이 몽고군과 강화를 맺고 피난지인 강화도로부터 개경으로 환도하게 되자, 이에 반대하여 몽고군과 맞서 싸워 우리 나라에서 몽고의 세력을 몰아낼 것을 주장하며 독자적으로 반몽항쟁을 계속하였다. 몽고세력이 이를 토벌하기 시작하자, 삼별초는 진도 용장성을 쌓고 근거지를 옮겼다가 그 곳에서 크게 패한 후 제주도로 건너와 항파두리성을 쌓고 몽고군과 맞서 2년여의 싸움 끝에 마침내 원종14년(1273) 4월 전원이 순의했다.


 

* 멀리 보이는 항몽순의비

 

 그 옛날 항파두리성은 15리에 걸쳐 토성으로 외성을 쌓고 그 안에 다시 석성으로 내성을 쌓아 이중의 성곽을 구축하여 각종 방어시설은 물론 궁궐과 관아까지 갖춘 요새였다. 삼별초의 무력항쟁은 외세로부터 나라를 지키려는 호국충정의 발로로서 후세에 많은 교훈을 심어주고 있다. 이에 정부는 삼별초의 항몽정신을 기리기 위하여  1977년 7억5천만 원을 들여 성곽의 일부와 항몽순의비를 건립하여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연락을 받아 기다리고 있던 안내 아가씨의 집전으로 참배를 하고 문화유산 해설사의 설명을 들으며 관람실을 나왔다. 이곳에는 유물전시실은 없고 대신 커다란 그림들이 걸려 있는 실내에 물통으로 보이는 긴 나무와 유물 몇 점만 놓여 있고, 그 밖의 돌쩌귀 같은 유물은 밖에 대충 놓아두었다. 이 성의 규모는 자연 지형을 이용해 쌓은 외성 약 15리(6㎞)와 내성 약 700m 중에 외성인 토성 980m가 복원되어 있다. 답사자들에게 마지막으로 "힘을 길러 외세 때문에 동족상잔의 비극이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하자."고 당부하며 귀가 차에 올랐다. 

 


 

* 답사 도중 비가 잠시 그쳤을 때의 한라산 자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