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숲의 이미지
숲을 열어보자
여닫이창이라 여기고
가만히 눈 열어보자
그 안으로
낮 그늘이 고요를 깔고
저들 끼리만이 자유로운 색깔 없는 숨을 쉬며
그 자유로운 숨결을 피워
볕살을 들이켜 살찌우는 참죽나무 잎새들
기둥가지를 찍어내는 새소리로
침묵에 겨운 오수를 털어 내는,
부지런한 여름이 익는
이네들의 눈 훔쳐보자
숲 뿌리에서 솟는 삶의 인내
가만 가만 인생을 깨치자
--- 김광자 '숲의 명상' 전문
'물찻오름'을 지도 위에서 찾으려면 '검은오름'을 찾아야 한다. 이 '검은오름'의 '검은'은 어원적으로 '신(神)'이란 뜻을 가진 고조선 시대의 '감' '검' 에 뿌리를 두는 것으로 풀이하는 분이 있으나 뚜렷하지 않고, 여러 곳에 있는 '검은오름'이라는 이름으로 유추하건데, '숲으로 덮여 검게 보인다'는 뜻으로 보는 것이 더 자연스럽다. 이렇듯 '물찻오름'은 '숲'을 떠나서는 생각할 수 없는 오름이다. 그리고 또, 견강부회의 해석일지 모르나 '물찻'은 여러 곳의 검은오름 중 그 분화구에 '물이 차 있어서' 붙은 이름이 아닌가 한다.
물찻오름은 오름 자체만 숲으로 되어 있다기보다는 '거대한 숲 속에 자리한 숲 오름'이다. 한라산 국립공원 동쪽 경계선 너머 자리한 넙게오름과 궤펜이오름에 이어지는 산록은 마지막으로 말찻오름을 거느린 표고 717.2m의 물찻오름에서 멈춘다. 이곳은 북제주군 조천읍, 남제주군 남원읍과 표선면의 경계를 이루는 꼭지점이기도 하다. 숲으로 둘러싸여 있기에 곳곳에 표고밭이 자리하고 있다. 제1횡단도로를 따라 가다가 송신탑이 즐비한 개오리오름(견월악)을 넘어서서 교래리로 통하는 길로 들어서면, 양쪽에 늘어선 삼나무숲의 행렬을 만날 수 있고, 800m쯤에 오른쪽으로 나 있는 시멘트 포장의 임도(林道)에 다다른다.
이 숲길로 접어들면 포장된 부분과 비포장된 부분이 있어, 오랫동안 손보지 않은 관계로 승용차로는 가기 힘들기 때문에 차를 세우고 천천히 삼림욕하는 기분으로 걸어 들어가지 않으면 안 된다. 이 길은 남조로변 붉은오름 옆으로 뚫려 있어 양쪽에서 다 진입이 가능하다. 부는 바람이 초피나무 잎을 스쳐 자리물회를 생각나게 하는 진한 향기로 흩어지고, 곳곳에 산딸기가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 4.7㎞ 지점에 이르렀을 때, 수런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물찻오름을 찾지 못해 숲을 헤매다 돌아온 일행을 만나게 되었다. 그 정도로 숲이 무성한 곳이다.
우리는 일행이 도착하기를 기다려, 길 잃은 나그네를 인도하며 세 갈래 길에서 북쪽으로 난 임도를 따라 들어간다. 숲은 잘 자란 나무가 하늘을 온통 가렸지만 사방으로는 환하게 트여 있다. 표고 재배목으로 활용되는 참나무와 서어나무는 베어버려 가끔씩만 그 얼굴을 나타내고 단풍나무, 산뽕나무, 산딸나무, 때죽나무가 주종을 이룬다. 3년 전 <월간 산(山)> 기자들을 데리고 왔을 때는 이곳에서부터 안개가 짙게 깔려 있어 신비한 태고적 원시림을 상상하게 한다며 시종 입을 다물지 못했다. 앞에서 뱀이 지나간다고 놀라 뒤로 물러선다. 이것은 먹이사슬이 온전하여 숲이 건강하다는 증거이리라.
⊙ 호수의 이미지
자욱한 안개 속에
하늘과 땅이 맞붙어
태초의 원형을 그린다
미풍이 신비한 손짓으로
호수의 베일을 벗기니
처녀의 신비처럼
잠에서 깨어나
기지개를 켜며
하늘을 보며 수림을 보며
잔잔히 미소한다
제비도
하늘 가까운 산상에 올라와
사랑의 몸짓으로
호수 위로 날으며
맑은 물결 위에 몸을 적신다
아, 자연의 아름다움을 즐기는
자유의 날개여!
--- 박용주 '산상의 호수' 전문
곳곳에 붉은 빛을 띈 괴상한 모양의 화산석을 모아 쌓아놓은 것으로 보아 이곳이 다른 오름보다 더 늦은 시기에 솟아난 것으로 추측된다. 그곳을 지나 깔때기 모양 분화구의 가장 낮은 서쪽 능선을 넘어서니, 눈앞에 펼쳐진 넓은 호수---. 눈이 휘둥그레진다. 그것도 초록빛 그릇에 물을 담아 놓은 것처럼 물위로 드러난 부분의 무성한 나무 그림자가 둥그런 호수 가장자리로 내비치고, 가운데로 흰 구름 떠 있는 하늘이 하얗게 빛난다. 산은 이곳을 찾는 사람들을 위해 숲 속에 또 이렇게 고즈넉이 호수를 마련해 놓고 있었다.
아이들이 찰흙을 가지고 받침 위에 하나하나 여러 가지 모양을 만들어 붙여나가는 것처럼, 제주 섬이 바다에서 떠오른 후 화산활동은 이곳저곳에 368개의 오름을 만들어 놓았던 것이다. 그 중 산정 호수로 유명한 물장오리오름의 전설에는 제주도를 만든 거신(巨神) 설문대할망이 빠져 죽을 정도로 깊었다는데, 그 물을 호스로 뽑아 쓰면서 점차 빠른 속도로 메워져 늪지가 되고 있으며, 절집이 들어설 정도로 물이 좋던 금오름의 산정호수도 4. 3때 나무를 불태워 목장이 되는 바람에 말라 늪지가 돼버린 동수악이나 물영아리처럼 장마 때나 임시로 고인 물을 볼 수 있다. 그에 비하면 이곳은 깊숙한 숲 속에 자리해 있기 때문에 아직도 건재할 수 있었던 것이리라.
그러나, 한 30년 전 실험 정신이 강한 어느 표고밭 관리자가 이곳에다 붕어를 풀어놓아 이제는 물이 좀 탁하게 되어간다. 이곳은 산 속이면서도 시냇가로 흘러내리지 않기 때문에 고기가 스스로 이곳에 올라올 수는 없다. 앞장서 물가를 걸어가는데 개구리가 물 속으로 텀벙텀벙 뛰어들며 사람을 놀라게 한다. 이쯤 되면 어느 구석에서 물뱀도 나타날 것이다. 얕은 물 속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붉은 빛을 띈 작은 붕어들도 여럿 보인다. 2년 전 겨울에 이곳에 왔었는데, 얼음 낚시 왔다가 얼음이 굳게 얼지 않아 술만 먹고 나무에 걸어둔 채 남겨 두고 간 낚시 채비 10벌을 수거한 적이 있다. 나오면서 들은 얘긴데 월척도 간간이 걸린다고 한다.
▲ 산의 이미지
모반과 미움으로 칼을 품은 사람들에게도
그는 미소와 용서를 잊지 않는다.
--- 나태주 '산' 전문
어떤 이들은 이 오름에 와서 그저 넓은 산정 호수가 연출에 놓는 풍경에 그만 넋 놓은 채 물만 바라보다 가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남쪽으로 167m의 가파른 등성이를 허위허위 올라와서는 숨을 고르며 쉬었다 가기도 한다. 그래저래 산정 호수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어 오름의 참 모습은 들여다 볼 생각도 않고 좋다고 감탄사만 연발하다 가는 셈이다. 마치 외모에 반하여 그 사람의 됨됨이를 파악해보지도 않고 반해버리는 것처럼. 우리 주변에서 그렇게 무작정 결혼해서 불화가 잦거나 이혼하는 경우를 종종 본다. 겉으로도 화려하고 속도 꽉 차면 좋으련만, 외화내빈(外華內貧)이라고 그렇지 못하니 문제다.
오름을 제대로 보려면, 사람을 보는 것처럼 가끔씩은 멀리서 바라보기도 하고, 바짝 다가서서 면면을 살피기도 하고, 전망이 트인 봉우리에서 자신을 살피듯 주변의 오름을 돌아봐야 한다는 게 나의 지론이다. 오늘도 우리는 원형 분화구 능선을 한 바퀴 돌며 오름을 속속들이 들여다봄은 물론 주변의 오름을 살핀다. 이제는 이 코스도 너무 잘 알려져 있어 길이 제법 닳아 있었다. 한라산 고지대에나 자라던 제주조릿대가 이곳 능선을 중심으로 많이 퍼져 있다. 높은 능선이지만 숲이 너무 빽빽이 우거져 있어 밖을 바라보기가 쉽지 않다. 홈페이지에 올리기 위해 할 수 없이 높은 나무에 올라 건너에 있는 말찻오름을 찍었다.
남동쪽으로 조금 트인 곳을 찾아 주변을 살피니, 숲 속에 마은이오름과 마은이옆오름이 소녀의 젖무덤 같이 봉긋이 솟았다. 저걸 언제 가 보나? 한겨울 낙엽이 지면 길을 찾아 한번 가 본다 가 본다 하는 것이 오늘에 이르렀다. 아침에도 저곳이 거론되었으나, 이 녹음(綠陰)에 그곳에 갔다가 미궁에 빠져 하루 종일 헤매게 될까봐 말렸다. 곡차와 차를 마시며 신선한 공기를 즐긴다. 힘들게 산 정상에 오르려는 것은 고통 끝에 맛보는 이런 즐거움 때문은 아닐는지? 오늘은 옆의 오름 말찻에 오른 후 점심 시간을 갖기로 했다. '물찻'이 '물이 차 있다'는 뜻이라면, '말찻'은 '말이 차 있다'는 뜻이다. 꼭 300년 전에 이형상 목사가 만든 탐라순력도 '산장구마(山場驅馬)'에 등장하는 오름이다.
내려와 남조로 쪽을 향해 숲길을 달린다. 포장이 안된 부분은 곳곳에 바위가 드러나 있어, 힘들게 끌고 간 승용차 3대가 그곳을 빠져 나오느라 고생깨나 했다. 다음에는 짚차나 하다 못해 농사용 트럭이라도 몰고 와야지, 승용차는 몰고 올 데가 못된다. 자동차가 다 도착하기를 기다려 길섶에 차를 세우고 송전 철탑을 세우기 위해 만들어 놓은 길로 들어간다. 다른 곳에서는 안 보이던 곰취가 군데군데 보인다. 두 번째 철탑이 세워진 곳에서 왼쪽으로 길이 나있어 비스듬히 올라간다. 재작년 이른 봄 다른 길로 이곳을 찾았을 때는 이리 높지 않았다면서 모두들 의아해 자세히 보았더니, 아하! 이곳은 물찻오름 북사면이다.
우리 인생 길에서도 종종 이런 경우를 본다. 자기가 가는 길이 고되고 지루하여 그 길에서 벗어나 보려고 안간힘을 쓰다 봐도 결국 그 자리로 돌아오고 마는. 그래서 할 수 없이 운명이거니 하고 받아들여 힘써 노력하다 보면 그 일이 즐거워지고 그 방면에서 제일인자가 되는 경우도 있다. 오늘 우리도 이 길을 운명이거니 하고 받아들이며 정상을 확인하기 위해 오른다. 말찻오름을 찍으려고 올랐던 나무에 올라 살폈더니, 철탑 하나를 더 가 세 번째 철탑에서 가야 하는 것을 두 번째에서 올라온 것이다. 내려오다가 백작약을 발견했다. 오름 책에 자생한다고 나와 있는 것만 본 후로 10여 차례나 다녀도 대면할 수 없더니, 사람이 잘 다니지 않은 이 숲에서 비로소 만나게 되었다. 귀한 약용 식물인데 오늘 나와 인연이 되려고 끌었나 보다. 잎사귀 위로 하얀 꽃 한 송이 잎을 오므리고 수줍게 웃는다.
<2002년 6월 9일 일요일 맑음>
동반자 : 김세엽 고길홍 변신규 강부언 박기배 구웅서 양영태 오창홍 고재량 장성희 이창현 김동한(12명)
<사진> 위는 '백작약 꽃'이고, 가운데는 김원의 '숲 속의 자연', 아래는 <월간 산>에 실렸던 '물찻오름의 호수'입니다.



숲을 열어보자
여닫이창이라 여기고
가만히 눈 열어보자
그 안으로
낮 그늘이 고요를 깔고
저들 끼리만이 자유로운 색깔 없는 숨을 쉬며
그 자유로운 숨결을 피워
볕살을 들이켜 살찌우는 참죽나무 잎새들
기둥가지를 찍어내는 새소리로
침묵에 겨운 오수를 털어 내는,
부지런한 여름이 익는
이네들의 눈 훔쳐보자
숲 뿌리에서 솟는 삶의 인내
가만 가만 인생을 깨치자
--- 김광자 '숲의 명상' 전문
'물찻오름'을 지도 위에서 찾으려면 '검은오름'을 찾아야 한다. 이 '검은오름'의 '검은'은 어원적으로 '신(神)'이란 뜻을 가진 고조선 시대의 '감' '검' 에 뿌리를 두는 것으로 풀이하는 분이 있으나 뚜렷하지 않고, 여러 곳에 있는 '검은오름'이라는 이름으로 유추하건데, '숲으로 덮여 검게 보인다'는 뜻으로 보는 것이 더 자연스럽다. 이렇듯 '물찻오름'은 '숲'을 떠나서는 생각할 수 없는 오름이다. 그리고 또, 견강부회의 해석일지 모르나 '물찻'은 여러 곳의 검은오름 중 그 분화구에 '물이 차 있어서' 붙은 이름이 아닌가 한다.
물찻오름은 오름 자체만 숲으로 되어 있다기보다는 '거대한 숲 속에 자리한 숲 오름'이다. 한라산 국립공원 동쪽 경계선 너머 자리한 넙게오름과 궤펜이오름에 이어지는 산록은 마지막으로 말찻오름을 거느린 표고 717.2m의 물찻오름에서 멈춘다. 이곳은 북제주군 조천읍, 남제주군 남원읍과 표선면의 경계를 이루는 꼭지점이기도 하다. 숲으로 둘러싸여 있기에 곳곳에 표고밭이 자리하고 있다. 제1횡단도로를 따라 가다가 송신탑이 즐비한 개오리오름(견월악)을 넘어서서 교래리로 통하는 길로 들어서면, 양쪽에 늘어선 삼나무숲의 행렬을 만날 수 있고, 800m쯤에 오른쪽으로 나 있는 시멘트 포장의 임도(林道)에 다다른다.
이 숲길로 접어들면 포장된 부분과 비포장된 부분이 있어, 오랫동안 손보지 않은 관계로 승용차로는 가기 힘들기 때문에 차를 세우고 천천히 삼림욕하는 기분으로 걸어 들어가지 않으면 안 된다. 이 길은 남조로변 붉은오름 옆으로 뚫려 있어 양쪽에서 다 진입이 가능하다. 부는 바람이 초피나무 잎을 스쳐 자리물회를 생각나게 하는 진한 향기로 흩어지고, 곳곳에 산딸기가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 4.7㎞ 지점에 이르렀을 때, 수런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물찻오름을 찾지 못해 숲을 헤매다 돌아온 일행을 만나게 되었다. 그 정도로 숲이 무성한 곳이다.
우리는 일행이 도착하기를 기다려, 길 잃은 나그네를 인도하며 세 갈래 길에서 북쪽으로 난 임도를 따라 들어간다. 숲은 잘 자란 나무가 하늘을 온통 가렸지만 사방으로는 환하게 트여 있다. 표고 재배목으로 활용되는 참나무와 서어나무는 베어버려 가끔씩만 그 얼굴을 나타내고 단풍나무, 산뽕나무, 산딸나무, 때죽나무가 주종을 이룬다. 3년 전 <월간 산(山)> 기자들을 데리고 왔을 때는 이곳에서부터 안개가 짙게 깔려 있어 신비한 태고적 원시림을 상상하게 한다며 시종 입을 다물지 못했다. 앞에서 뱀이 지나간다고 놀라 뒤로 물러선다. 이것은 먹이사슬이 온전하여 숲이 건강하다는 증거이리라.
⊙ 호수의 이미지
자욱한 안개 속에
하늘과 땅이 맞붙어
태초의 원형을 그린다
미풍이 신비한 손짓으로
호수의 베일을 벗기니
처녀의 신비처럼
잠에서 깨어나
기지개를 켜며
하늘을 보며 수림을 보며
잔잔히 미소한다
제비도
하늘 가까운 산상에 올라와
사랑의 몸짓으로
호수 위로 날으며
맑은 물결 위에 몸을 적신다
아, 자연의 아름다움을 즐기는
자유의 날개여!
--- 박용주 '산상의 호수' 전문
곳곳에 붉은 빛을 띈 괴상한 모양의 화산석을 모아 쌓아놓은 것으로 보아 이곳이 다른 오름보다 더 늦은 시기에 솟아난 것으로 추측된다. 그곳을 지나 깔때기 모양 분화구의 가장 낮은 서쪽 능선을 넘어서니, 눈앞에 펼쳐진 넓은 호수---. 눈이 휘둥그레진다. 그것도 초록빛 그릇에 물을 담아 놓은 것처럼 물위로 드러난 부분의 무성한 나무 그림자가 둥그런 호수 가장자리로 내비치고, 가운데로 흰 구름 떠 있는 하늘이 하얗게 빛난다. 산은 이곳을 찾는 사람들을 위해 숲 속에 또 이렇게 고즈넉이 호수를 마련해 놓고 있었다.
아이들이 찰흙을 가지고 받침 위에 하나하나 여러 가지 모양을 만들어 붙여나가는 것처럼, 제주 섬이 바다에서 떠오른 후 화산활동은 이곳저곳에 368개의 오름을 만들어 놓았던 것이다. 그 중 산정 호수로 유명한 물장오리오름의 전설에는 제주도를 만든 거신(巨神) 설문대할망이 빠져 죽을 정도로 깊었다는데, 그 물을 호스로 뽑아 쓰면서 점차 빠른 속도로 메워져 늪지가 되고 있으며, 절집이 들어설 정도로 물이 좋던 금오름의 산정호수도 4. 3때 나무를 불태워 목장이 되는 바람에 말라 늪지가 돼버린 동수악이나 물영아리처럼 장마 때나 임시로 고인 물을 볼 수 있다. 그에 비하면 이곳은 깊숙한 숲 속에 자리해 있기 때문에 아직도 건재할 수 있었던 것이리라.
그러나, 한 30년 전 실험 정신이 강한 어느 표고밭 관리자가 이곳에다 붕어를 풀어놓아 이제는 물이 좀 탁하게 되어간다. 이곳은 산 속이면서도 시냇가로 흘러내리지 않기 때문에 고기가 스스로 이곳에 올라올 수는 없다. 앞장서 물가를 걸어가는데 개구리가 물 속으로 텀벙텀벙 뛰어들며 사람을 놀라게 한다. 이쯤 되면 어느 구석에서 물뱀도 나타날 것이다. 얕은 물 속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붉은 빛을 띈 작은 붕어들도 여럿 보인다. 2년 전 겨울에 이곳에 왔었는데, 얼음 낚시 왔다가 얼음이 굳게 얼지 않아 술만 먹고 나무에 걸어둔 채 남겨 두고 간 낚시 채비 10벌을 수거한 적이 있다. 나오면서 들은 얘긴데 월척도 간간이 걸린다고 한다.
▲ 산의 이미지
모반과 미움으로 칼을 품은 사람들에게도
그는 미소와 용서를 잊지 않는다.
--- 나태주 '산' 전문
어떤 이들은 이 오름에 와서 그저 넓은 산정 호수가 연출에 놓는 풍경에 그만 넋 놓은 채 물만 바라보다 가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남쪽으로 167m의 가파른 등성이를 허위허위 올라와서는 숨을 고르며 쉬었다 가기도 한다. 그래저래 산정 호수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어 오름의 참 모습은 들여다 볼 생각도 않고 좋다고 감탄사만 연발하다 가는 셈이다. 마치 외모에 반하여 그 사람의 됨됨이를 파악해보지도 않고 반해버리는 것처럼. 우리 주변에서 그렇게 무작정 결혼해서 불화가 잦거나 이혼하는 경우를 종종 본다. 겉으로도 화려하고 속도 꽉 차면 좋으련만, 외화내빈(外華內貧)이라고 그렇지 못하니 문제다.
오름을 제대로 보려면, 사람을 보는 것처럼 가끔씩은 멀리서 바라보기도 하고, 바짝 다가서서 면면을 살피기도 하고, 전망이 트인 봉우리에서 자신을 살피듯 주변의 오름을 돌아봐야 한다는 게 나의 지론이다. 오늘도 우리는 원형 분화구 능선을 한 바퀴 돌며 오름을 속속들이 들여다봄은 물론 주변의 오름을 살핀다. 이제는 이 코스도 너무 잘 알려져 있어 길이 제법 닳아 있었다. 한라산 고지대에나 자라던 제주조릿대가 이곳 능선을 중심으로 많이 퍼져 있다. 높은 능선이지만 숲이 너무 빽빽이 우거져 있어 밖을 바라보기가 쉽지 않다. 홈페이지에 올리기 위해 할 수 없이 높은 나무에 올라 건너에 있는 말찻오름을 찍었다.
남동쪽으로 조금 트인 곳을 찾아 주변을 살피니, 숲 속에 마은이오름과 마은이옆오름이 소녀의 젖무덤 같이 봉긋이 솟았다. 저걸 언제 가 보나? 한겨울 낙엽이 지면 길을 찾아 한번 가 본다 가 본다 하는 것이 오늘에 이르렀다. 아침에도 저곳이 거론되었으나, 이 녹음(綠陰)에 그곳에 갔다가 미궁에 빠져 하루 종일 헤매게 될까봐 말렸다. 곡차와 차를 마시며 신선한 공기를 즐긴다. 힘들게 산 정상에 오르려는 것은 고통 끝에 맛보는 이런 즐거움 때문은 아닐는지? 오늘은 옆의 오름 말찻에 오른 후 점심 시간을 갖기로 했다. '물찻'이 '물이 차 있다'는 뜻이라면, '말찻'은 '말이 차 있다'는 뜻이다. 꼭 300년 전에 이형상 목사가 만든 탐라순력도 '산장구마(山場驅馬)'에 등장하는 오름이다.
내려와 남조로 쪽을 향해 숲길을 달린다. 포장이 안된 부분은 곳곳에 바위가 드러나 있어, 힘들게 끌고 간 승용차 3대가 그곳을 빠져 나오느라 고생깨나 했다. 다음에는 짚차나 하다 못해 농사용 트럭이라도 몰고 와야지, 승용차는 몰고 올 데가 못된다. 자동차가 다 도착하기를 기다려 길섶에 차를 세우고 송전 철탑을 세우기 위해 만들어 놓은 길로 들어간다. 다른 곳에서는 안 보이던 곰취가 군데군데 보인다. 두 번째 철탑이 세워진 곳에서 왼쪽으로 길이 나있어 비스듬히 올라간다. 재작년 이른 봄 다른 길로 이곳을 찾았을 때는 이리 높지 않았다면서 모두들 의아해 자세히 보았더니, 아하! 이곳은 물찻오름 북사면이다.
우리 인생 길에서도 종종 이런 경우를 본다. 자기가 가는 길이 고되고 지루하여 그 길에서 벗어나 보려고 안간힘을 쓰다 봐도 결국 그 자리로 돌아오고 마는. 그래서 할 수 없이 운명이거니 하고 받아들여 힘써 노력하다 보면 그 일이 즐거워지고 그 방면에서 제일인자가 되는 경우도 있다. 오늘 우리도 이 길을 운명이거니 하고 받아들이며 정상을 확인하기 위해 오른다. 말찻오름을 찍으려고 올랐던 나무에 올라 살폈더니, 철탑 하나를 더 가 세 번째 철탑에서 가야 하는 것을 두 번째에서 올라온 것이다. 내려오다가 백작약을 발견했다. 오름 책에 자생한다고 나와 있는 것만 본 후로 10여 차례나 다녀도 대면할 수 없더니, 사람이 잘 다니지 않은 이 숲에서 비로소 만나게 되었다. 귀한 약용 식물인데 오늘 나와 인연이 되려고 끌었나 보다. 잎사귀 위로 하얀 꽃 한 송이 잎을 오므리고 수줍게 웃는다.
<2002년 6월 9일 일요일 맑음>
동반자 : 김세엽 고길홍 변신규 강부언 박기배 구웅서 양영태 오창홍 고재량 장성희 이창현 김동한(12명)
<사진> 위는 '백작약 꽃'이고, 가운데는 김원의 '숲 속의 자연', 아래는 <월간 산>에 실렸던 '물찻오름의 호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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