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오름 이야기

한라산의 여름 2>

김창집 2002. 7. 24. 17:10

▲ 진짜로 믿고 싶었던 백록담 전설

한라산 정상에는 화산폭발로 형성된 분화구인 산정호수 백록담(白鹿潭)이 있다. 능선 둘레는 대략 1.7㎞, 화구호의 깊이는 110여m인데 그 넓이가 6만평이 조금 넘는다. 장마철 집중호우가 내려 만수가 되면 화구호의 3분의 2가 물에 잠긴다. 그러나 요즘에는 자연적인 증발로 인해 수량이 많이 줄어, 보는 이의 마음을 안타깝게 한다. 백록담이라는 명칭은 흰사슴을 데리고 신선이 내려와서 놀다 간다는 전설에서 기인한다. 선녀들이 하늘에서 내려와 목욕하고 간다는 전설도 있다. 대학 시절 하도 답답하여 비가 오는 데도 불구하고 혼자 올라와 한쪽 구석에 텐트를 쳐놓고, 빗소리를 들으면서 덮였다 걷혔다 하는 운무(雲霧) 사이로 혹시 날개옷을 입은 선녀가 내려오지 않나 하고 엉뚱한 생각을 했던 적이 있다.

분화구의 모양이 가마솥뚜껑을 엎어놓은 듯하여 오름으로 분류할 때는 부악(釜岳)이라 부른다. 남한에서 제일 높은 곳, 더구나 바다로부터 시작된 산이기에 높이 1950m지만 생각보다 더 높아 보여 예로부터 '은하수(漢)를 잡을(拏) 수 있을 정도로 높은 산(山)'이란 뜻으로 한라산(漢拏山)이라 이름하고 있는 것이다. 백두산(白頭山)에 가 보았지만 그곳은 높은 장백산맥 위에서 뻗어난 산이어서 산체만 보면 그렇게 높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태평양 바다 한 가운데 솟았기 때문에 지나가는 기압골이 봉우리에 걸려 언제나 운무를 데리고 있기에 신령스러움을 더해준다.

겨울이 되어 머리에 눈을 이기 시작하면 이듬해 5월에야 녹는다. 영주10경의 하나가 녹담만설(鹿潭晩雪)인데, 지난 2월에 왔을 때는 눈보라가 몰아치고 운무 사이로 언뜻언뜻 눈만 보여 그 아름다움을 느낄 여유가 없었다. 오늘은 그간의 출입통제로 단정하게 잘 자란 파란 풀들이 고운 색으로 넘쳐난다. 전에는 이곳 분화구에 구상나무와 주목, 진달래 같은 나무가 우거져 보기가 좋았는데, 나무가 사라지면서 토사가 흘러내려 못을 메우고 물이 스며들어 장마철이 아니면 그윽한 호수의 정취는 느끼기 어렵게 돼버렸다. 오늘은 그런 대로 갈증을 풀 정도의 물이 남아 있다. 서쪽 정상은 갈 수 없게 돼 있어 동쪽 능선 목책을 기대어 백록담을 그윽이 바라보며 한라산 소주를 한 잔 들이켰다.

옛날에 활을 잘 쏘는 사냥꾼이 있었다. 그런데 그 날은 이상하게 사냥이 신통치 않았다. 그래서 빈손으로 집으로 돌아가려는데, 마침 흰사슴 한 마리가 언뜻 지나가는 것이었다. 그는 재빨리 활시위를 당겼다. 그러나 사슴은 맞지 않고 그만 옥황상제의 궁둥이를 건드리고 말았다. 화가 난 옥황상제는 벌떡 일어나서 한라산 봉우리를 뽑아 사냥꾼을 향해 던졌다. 그러나 사냥꾼은 맞지 않고 바닷가로 날아가 떨어졌다. 그것이 안덕면에 있는 산방산이고, 뽑힌 자리는 백록담이 되었다. 이것은 산방산과 백록담의 둘레가 얼추 비슷하고 서북벽의 기암이 산방산의 거무튀튀한 바위가 닮은 데서 유추해 생겨난 전설이지만, 나이가 들어 산방산은 약 75만년 전에 바다에서 솟아올랐고, 백록담은 마지막 화산 폭발이 있을 시기인 약 2만5천년 전에 형성된 것이라는 걸 알았을 때의 허무함이란…….


▲ 한라산 정상에서 만나는 선인들의 감흥

동릉 정상에서 일행들이 모두 올라오기를 기다리며 사방을 둘러본다.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감탄의 소리, 사진 찍기에 바쁜 사람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나무로 만들어 놓은 자리에서 맛나게 식사하는 사람들…. 누군가가 장남 삼아 "대∼한민국!"을 외치니, 모두 쳐다보며 "짝짝짝 짝짝!" 박수를 치며 웃는다. 월드컵 4강 신화를 이룩한 직후였으니, 만나는 사람마다 흐뭇한 얼굴이다. 여기저기 붉은 악마의 유니폼인 빨간 셔츠를 입은 어른과 아이들 모습도 볼 수 있다. 올라오면서 힘들어하는 붉은 옷 입은 아이에게 "대∼한민국!"을 외쳤더니, 힘든 중에도 갑자기 얼굴이 환해진다. 이렇듯 월드컵 4강은 우리들에게 대단한 힘을 모으게 해주었음을 한라산 정상에서도 느꼈다.

젊은 나이에 형조판서에 올라 조광조(趙光祖)와 함께 나라의 적폐를 고치고자 진력하던 중 이 섬에까지 귀양 왔다가 서른다섯 나이에 절명시 한 편을 남기고 자진한 충암 김정(沖菴金淨, 1486∼1521) 선생은 그가 쓴 <제주풍토록>에 "옛날 이태백이 '구름은 대붕(大鵬)의 날개처럼 바다를 덮고, 파도에 물고기가 빠져 들어간다'는 경지를 느낄 수 있었네."하고 읊었는데, 정말 동쪽으로 파도 같은 구름이 밀려오기 시작한다. 1601년(선조34) 길운절(吉雲節) 반란사건을 위무하고자 어사로 왔던 청음 김상헌(淸陰金尙憲) 선생도 이곳에 올라 "남쪽에는 두류산(頭流山)이 있고,/ 북쪽에는 장백산(長白山)이 있다네./ 금강산과 묘향산이 이름이 높지만은/ 기이하고 수려함은 감히 독점 못하리./ 예로부터 영주라고 일컬어 왔으니/ 신선이 살고 있던 곳이라 하였네…." 하고 그의 <남사록>에 썼다.

천하호걸로 이름난 "청초 우거진 곳에 자난다 누웠난다"의 백호 임제(白湖林悌) 선생은 1577년 문과에 급제하고 당시 제주 목사로 와 있던 아버님을 뵙고자 왔다가 한라산에 올랐는데, "눈으로 보는 한계로 말한다면 해와 달이 비치는 곳까지 바라볼 수 있는데, 안력(眼力)에 한도가 있어 단지 하늘과 물 사이에 있을 뿐이니 한스럽다."고 말했다. 또, 단발령에 과감히 반대하여 "차라리 내 목을 자를지언정 머리는 자를 수 없다"던 면암 최익현(勉庵崔益鉉) 선생도 1873년에 유배와 2년만에 풀리자 한라산에 올라 "<맹자>에 '바다를 본 자는 바다 이외의 물은 물로 보이지 않으며, 태산에 오르면 천하가 작게 보인다.' 했는데, 성현의 역량을 어찌 우리가 상상이나 할 수 있겠는가? 또, 소동파(蘇東坡)에게 이 산을 먼저 보게 하였다면, 그의 이른바 '허공에 떠 바람을 다스리고,/ 신선이 되어 하늘에 오른다.'라는 시구가 적벽(赤壁)에만 알맞지는 않았을 것이다."라고 찬탄했다.

어찌 다 열거하랴? 다만 저 유명한 '향수'의 시인 정지용이 왔다가 한라산에 반해 쓴 '백록담' 구절을 생각하며 내려올 준비를 서둘렀다. "귀신도 쓸쓸하여 살지 않는 한 모롱이, 도체비꽃이 낮에도 혼자 무서워 파랗게 질린다./ 바야흐로 해발 육천 척 위에서 마소가 사람을 대수롭게 아니 여기고 산다./ 풍란이 풍기는 향기, 꾀꼬리 서로 부르는 소리, 제주 휘파람새 휘파람 부는 소리, 돌에 물이 따로 구르는 소리, 먼데서 바다가 구길 때 솨 -솨 솔소리, 물푸레 동백 떡갈나무 속에서 나는 길을 잘못 들었다가 다시 칡덩쿨 기어간 흰돌배기 꼬부랑길로 나섰다./ 가재도 기지 않는 백록담 푸른 물에 하늘이 돈다. 불구에 가깝도록 고단한 나의 다리를 돌아 소가 갔다. 쫓겨온 실구름 일말(一抹)에도 백록담은 흐리운다. 나의 얼굴에 한나절 포긴 백록담은 쓸쓸하다. 나는 깨다 졸다 기도조차 잊었더니라."


▲ 비를 맞아도 즐거웠던 관음사 코스 하산 길

옛날부터 이용해온 관음사 등산 코스는 성판악 코스와 더불어 정상에 오를 수 있는 기점의 하나다. 출발점은 5.16도로라고 하는 제1횡단도로와 1100도로로 알려진 제2횡단도로를 잇는 산록도로 중간지점에 위치해 있는데, 동쪽에서는 산천단을 넘어서서 오른쪽으로 들어가면 되고, 서쪽에서는 노리손이오름 위로 나있는 길로 들어서서 섬문화축제장과 탐라교육원을 지나 길가의 야영장을 만난다. 처음엔 관음사 옆으로 길이 나 있었는데 지금은 좀더 지나 야영장 한라산국립공원 관리사무소 분소에서 출발하여 '매표소 → 1.5km → 구린굴 → 1.7km → 탐라계곡 → 1.7km → 개미목 → 1.9km → 용진각 대피소 → 1.9km → 정상'에 도달하는 데는 5시간 정도 걸린다. 이제 내려갈 때는 역순이 되는 셈이다.

모두 도착하여 점심을 끝낸 일행은 이제 싫어도 내려가야 한다는 나의 말에 모두 아쉬운 표정이다. 동쪽 능선을 돌아 내려가면 곧 구상나무 지대를 지나게 된다. 바닥이 험한 부분은 걷기 좋게 나무를 깔아 놓았다. 구상나무의 진한 향기를 맡으며 걷다 보니, 오른쪽으로 돌오름과 흙붉은오름 너머로 불칸디오름, 물장오리, 태역장오리, 살쏜장오리 건너 개오리오름 위로 구름이 몰려온다. 그 모습은 마치 파도가 밀려오는 것 같기도 하고 수만 마리의 양떼가 몰려오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걸 놓칠세라 카메라를 든 분들이 바빠진다. 길섶 구상나무 아래에는 큰앵초가 많이 피었다. 용진각에서 무척 가파른 길을 올라온 등산객들의 얼굴엔 송글송글 땀방울이 맺혀 있다.

얼마 안가 왕관능(王冠陵) 위 조그만 초원에 다다랐다. 제주조릿대 사이사이에 시로미가 뽀얗게 꽃을 피우고 있었다. 우리 나라에선 한라산과 백두산에만 자라는 희귀한 식물로 6월에 자주색 꽃을 피우고 8∼9월에 익는 열매는 검은색을 띄며 상큼한 맛을 낸다. 시로미차는 갈증을 없애며 피를 깨끗이 한다고 알려졌고, 옛날 중국 진시황 때 서불(徐市)이 진시황의 명을 받들어 삼신산(三神山)의 하나인 이곳 영주산(瀛洲山)으로 불로초를 캐러 왔다가 신선의 열매라는 한라산 시로미를 얻었지만 불로초는 구하지 못하고 서쪽으로 돌아갔다는 전설이 있다. 왕관능은 오름에 박힌 바위가 마치 왕관 모양과 비슷해서 붙은 이름으로 '탐라순력도'에는 이곳이 연대(烟臺)라고 씌어 있으나, 구름이 끼는 날이 많고 올라오기 힘들어 없어진 것 같다.

용진각에는 두 개의 대피소가 있는데, 하나는 오래되어 붕괴 위험이 있음으로 폐쇄시켰다. 젊은 날 저곳에서 얼마나 많은 불면의 밤을 보냈던가? 길이 좋지 않고 차량 통행이 많지 않았을 때는 제주시에서 이곳까지 오면 거의 저물녘이 되었다. 아침에 아래쪽 샘물에서 손을 호호 불어대며 쌀을 씻던 기억이 새롭다. 삼각봉 아래 조그만 동산에서 마지막 남은 소주잔을 기울이며 왕관능을 바라보는데 비가 제법 굵어지기 시작한다. 오늘 정상에서는 흐려 덥지 않은 날로 택일을 잘했다는 회원들의 칭찬을 들었는데, 이렇게 한 치 앞도 보지 못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 누구도 불평을 털어놓지 않고 기분 좋은 얼굴이다. 맑은 날씨에 그리던 정상과 백록담을 보았기 때문에 이후 3시간 정도의 하산 길은 오히려 시원히 비를 즐기는 편이었다. 같은 과정을 거치는데도 생각하기에 따라 이렇듯 달라지는 게 사람의 마음이다.
[2002. 6. 23.]


<사진> 위는 등수국이고, 가운데는 산수국, 아래는 삼각봉 쪽에서 바라본 왕관능 전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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