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답던 지난가을의 따라비오름의 모습)
▲ 그 해 가을은 낭만이었네
몇 년 전이던가? 오름이라면 모두가 좋았던 시절(하긴 지금도 그렇지만), 처음 따라비오름에 오를 때는 모든 것이 감동이었다. 남영목장 입구에 차를 세우고 삼나무 길을 걸으면서 본 오름의 오밀조밀한 모습. 혹 양하 뿌리에서 솟아난 봉오리(속칭 양하간)에서 피어오른 가녀린 꽃이나 그림으로만 보던 용담 꽃의 그 신비한 빛깔까지도 바람에 너울대는 억새 너머로 지긋이 앉아있는 저 따라비오름의 자태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었다.
봉긋한 봉분을 머리에 이고 있는 알오름을 지나 오름에 접어들었을 때, 같이 가던 여류 시인이 꽃을 밟을까봐 까치발을 하고 사뿐사뿐 걷는 모습이라니…. 오름 도처에는 섬잔대, 야고, 물매화, 쑥부쟁이, 쥐손이풀, 자주쓴풀, 미역취 등 가을꽃이 억새, 띠, 잔디에 촘촘히 박혀 있었다. 3개의 분화구 가운데 움푹 들어간 두 군데 굼부리. 그 아래로 한쪽이 곱게 무너져 알맞게 형성된 알오름과 본체의 균형이 어쩌면 그렇게 아름답던지.
(안온했던 과거 따라비오름의 모습)
▲ 이름에 현혹되었던 시절
지금 내가 즐겨 이용하는 네이버 백과사전에서 '따라비'를 찾아보면 다음과 같다. * 따라비제주도 남제주군 표선면 가시리에 있는 기생화산구(火山口). 해발 342m, 높이 107m, 둘레 2,633m, 면적 44만 8111㎡로, 가시리에서 북서쪽으로 약 3㎞ 떨어진 지점에 있다. 고구려어에 어원을 둔 '다라비'에서 온이름으로 '높다'라는 뜻의 다라는 달을(達乙), 달(達)에서 왔으며, '비'는 제주도의 산 이름에 쓰는 미의 접미사로, 높은 산이라는 뜻이다. 다라비가 따라비로 경음화하여 따하라비, 땅하라비로 풀이되어 한자어로 지조악(地祖岳)이 되었다. 몇 가지 유래가 더 전하는데 모자오름과 가까이 있어 지아비, 지어미가 서로 따르는 모양이라고 해서 부르게 된 이름이라고도 하고, 가까이에 모자오름, 장지오름, 새끼오름이 모여 있는 중에 이 오름이 가장 격이라 하여 따애비라 불리다가 따래비로 와전된 것이라고도 하며, 모자오름과 시아버지와 며느리의 형국이라고 하여 따하래비라 부르기도 하였다.
크고 작은 여러 개의 봉우리가 어우러져 부드러운 등성이로 연결되며 원형분화구 안에 3개의 작은 화구를 가진 특이한 화산체이다. 북쪽 사면에는 말굽형으로 침식된 흔적이 있고 말굽형으로 벌어진 방향의 기슭 쪽에는 화산재가 형성된 후에 흐른 용암 암설류의 퇴적으로 이루어진 작은 언덕들이 흩어져 있다. 오름 전체가 풀로 덮여 있다. 찾아가려면 가시리에서 제동목장을 지나 제주시와 성읍리로 가는 사거리에서 성읍리 방향으로 120m 가다가 왼쪽으로 난 포장도로를 따라 올라간다.
(들어가면서 띠밭에서 찍은 잔대꽃)
우습다. 이름에 대한 장황한 설명들…. 저 속에 사실이 얼마나 들어 있을까? 게다가 저 찾아가는 길의 엉터리 설명이라니? 저 안내대로라면 따라비오름에 가기 위해서는 가시리까지 갔다가 제동목장을 거쳐 다시 대천동 사거리로 나와 성읍 쪽으로 120m 가서 왼쪽으로 난 포장도로를 따라 올라 가야 하는데, 120m 더 가봐야 왼쪽으론 승마장이 끝나지도 않는다. 전혀 엉뚱한 방향이 아닌가? 요즘 인터넷에 떠있는 정보들이 이 모양이다. 그 정도면 제법 알아주는 회사의 백과사전 내용이 이 정도라면, 앉아서 베끼는 인터넷의 세계에는 얼마나 많은 허상(虛像)들이 존재할는지?
나는 요즘 오름엘 오르면서 그 이름의 해석에 불만이 많다. 조천읍의 오름만 해도, 바농오름? '바농(바늘의 제주어)'하고 무슨 관련이 있기나 한가? '까끄레기'는 무슨 '보리 까끄레기'? 그럼, '늡서리' '지그리' '어후' '우진제비'…. 이런 것들은 무슨 뜻이란 말인가? 사람들은 이상하게도 이름을 놓고 견강부회식으로 해석하기를 좋아한다. 의미가 없으면 그만 둘 일이지. 그렇다면 대통령의 이름은 노(盧 : 밥그릇. 화로. 창 자루), 무(武 : 굳세다. 자만하다. 남을 업신여기다. 군인), 현(鉉 : 솥귀. 삼공의 지위. 활시위). '창 자루'를 잡으니까 '자만하면서' '활시위'를 자꾸 당기는 사람인가? 마찬가지로 '따라비'면 그냥 '따라비'지. 무슨 '따하라비'란 말인가?
(굼부리 속에서 평화롭게 놀고 있던 말)
▲ 따라비오름과 말(馬)
광복절. 요즘 힘겹게 붙들고 있는 일에서 놓여나고 싶었다. 태극기만 내걸고 아침 식사도 거른 채 나갔다. 나까지 세 사람. 안개 속을 헤매다 문득 따라비오름에 가고 싶어졌다. 그것도 안 가본 코스로. 제동목장 삼나무 사이로 차를 몰았다. 소록산을 지날 때 비행장을 고르면서 파내어 버린 부분을 생각했다. 지금은 그 후 심어놓은 소나무로 겉 상처는 아물었지만 사라져버린 속살 때문에 몸체가 한없이 일그러져 보인다. 우주항공관을 지나고 따라비오름이 바로 내다보이는 목장 문 앞에 차를 세우고 문을 넘었다. 내를 건너 길을 따라 들어가다가 밭일을 하던 아줌마들을 만난다. 더덕밭에 한 길이나 자란 여뀌를 베다가 막 점심을 먹고 있다. 어디 가느냐고 묻는다.
오름에 간다고 하면 거부감이 생기겠지. 요즘 좀 이르지만 벌초 시기여서, 그냥 "산 돌아보레 감수다." 하고 만다. 해놓고 보니, 맞는 말이다. '산(오름)에 올라 돌아보러 가고 있으니까. '새 길을 개척하는 것이 어렵듯이 오름에도 없는 길을 새롭게 만들며 가려니까 힘들다. 억새와 띠가 우거진 밭을 지나 양하가 많이 나 있는 철조망을 통과하여 말이 먹이를 찾아다니던 길을 찾아 올라간다. 남서쪽 능선이다. 가파르지만 갈만하다고 느끼는데, 조금 쉬어 가잔다. 가만히 앉아 주위를 둘러봐도 대록산에서 보이던 길은 찾을 길이 없다. 정석비행장 너머로 좀 전에 올랐던 물영아리가 안개 속에 어슴프레 보이고 그 앞에 번널오름과 병곳오름만 선연하다.
(겨울 오름처럼 황량하게 변해버린 따라비 주봉)
가끔씩 이질풀꽃과 쥐손이풀꽃이 얼굴을 내민다. 이들은 모두 쥐손이풀과여서 어느 것이 이질풀이고 어느 것이 쥐손이풀인지 도무지 구분이 안 선다. 하긴 쥐손이풀도 여러 가지니까. 정상에 올라 바라보니, 오름은 만신창이가 되었다. 억새로 유명하던 오름에 봄부터 계속 말을 놓아먹이다 보니, 알오름 쪽은 이른 봄 뒷동산보다도 더 참혹한 모습이다. 거기에 더하여 오름 북쪽으로 이어진 억새밭들은 모두 개간해버려 붉은 흙을 드러내고 있다.
그러나, 어쩌랴. 예로부터 오름의 주인은 말과 소였던 것을…. 평화스럽게 노는 말의 사진이나 찍어 둔다고 셔터를 누르고 오름을 돌면서 보니, 올해여기서 가을꽃을 보기는 어려울 것 같다. 푸른 것은 아래 분화구에 몰려있는 양하 뿐이다. 그리고, 꽃이라곤 가시덩굴에 피어오른 쥐손이풀꽃이 고작이다. 등성이를 거쳐 동남쪽 자락으로 내려오면서 다음과 같이 중얼거렸다. '그래, 올해는 말들 너희 차지다. 그깟 들꽃과 억새 못 보는 것이 대순가? 다른 오름에 가서 보면 되지.' 하고…. [2003. 8. 15.]
(나오다가 어느 띠밭에서 찍은 병아리난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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