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별도봉(別刀峰) -- 건강하게 살아남기 경쟁
요즘 도시의 아침은 건강하게 살아남기 경쟁을 하는 사람들로 북적인다. 눈에 띄지 않아서 그렇지 낮과 저녁, 밤까지도 이어진다. 이를 악물고 밤길을 뛰는 사람들을 보면서 '나만 뒤쳐지는 게 아닐까' 하고 조바심이 안 나는 건 아니었다. 그간 누구 못지 않게 술을 즐기면서도, 건강하게 오름에 잘 다닌다는 핑계로 운동과는 담을 쌓고 지내온 게 사실이다.
금년 7월 21일. 드디어 나도 아침 산책 겸 운동을 시작했다. 여름방학이 시작되면서 연로하신 어머님을 시골서 집으로 모셔온 걸 계기로 컴퓨터도 안방으로 옮기고, 될 수 있으면 어머님과 같이 말벗을 해드리기 위해 한 방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낸다.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고 방에서만 지내다 보니, 운동량이 부족한 걸 느끼기 시작했다. 그래서, 이걸 어떻게 해결하나 하고 고심한 끝에 별도봉과 사라봉을 새벽에 오르는 걸로 결정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래서, 집사람이 출근하기 전 1시간 20분 정도를 건강을 위해 투자하기로 결심했다. 제주시에는 여러 곳에 알맞은 오름이 있어 벌써 산책 코스로 만든 지 오래다. 제주시 동쪽 사라봉 별도봉이 그렇고, 시가지를 벗어난 삼양에 원당봉, 서부지구엔 도두봉, 신제주 지역은 민오름과 한라수목원과 연계된 간열악이 있다. 승용차로 10여분 달려가서 차를 세워놓고 '장수(長壽) 산책로'를 따라 걷는다. 전체 길이 1.8km로 말끔하게 다듬어 놓은 별도봉 산책길은 사방으로 열려 있다. 우선은 오름을 한 바퀴 돌도록 길을 만들고, 정상으로 종주하는 코스와 바닷가로 빠져 거기서 운동하도록 만들어 놓기도 하였다. 산책로가 잘 되어 있어 오름 훼손도 안 되고 정말 좋다.
천천히 걷는 사람, 급히 뛰어가는 사람, 뒤로 걸어가는 사람. 공원 한쪽에서는 에어로빅, 배드민턴하는 사람, 팔각정 아래서는 이상한 기체조, 운동기구에 매달려 여러 가지 운동을 하는 사람, 나무를 붙들고 탁탁 몸을 부딫는 사람, 팔각정에 올라 해뜨는 쪽을 향해 기도하는 사람……. 정말 건강하게 살기 위해 몸부림인데, 나만 잠자다 말고 TV 뉴스나 보면서 뭉기적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 별도봉 -- 아늑한 고향에 이르는 길
이제 넉 달, 습관이란 무서운 것이어서 일요일을 제외한 거의 매일 별도봉과 사라봉을 올랐기 때문에 어떡하다 거른 날은 뭔가 몸이 개운치 못할 정도가 돼버렸다. 아침 일찍 오르는 걸 계속하다 보니, 이젠 아침 다섯시만 되기 전에 눈이 번쩍 뜨인다. 전날 아무리 늦게까지 과음을 하드래도 우선 갔다오고 나서 다시 한 2∼30분 눈을 붙인다. 처음에는 게을러질까봐 눈이 뜨는 대로 이불을 젖히고 벌떡 일어나면서 습관을 들였다.
차에서 내려 오른쪽 장수 산책로로 들어서면 오름 옆으로 나 있는 내리막길과 평탄한 길이 나 있다. 소나무와 버드나무, 아카시아, 멀구슬나무, 팽나무, 녹나무 등 고향을 느낄 수 있는 나무들이 오솔길에 쭉 늘어서 있다. 오른쪽에는 밭이 있어 호박이 주렁주렁 열린다. 그리고, 오솔길 길섶엔 시골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온갖 풀이 나 있어 철따라 풀꽃이 핀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닭의장풀꽃에 이어 며느리밑씻개와 여뀌가 꽃을 피우더니, 오늘은 들국화인 노란 산국(山菊)이 한창이다.
모퉁이를 돌면, 일제 말기 이곳에서 최후의 일전을 벌이기 위해 파놓은 굴이 보이기 시작한다. 태평양전쟁 말기 연합군에 쫓기게 된 일본이 남양군도와 오키나와를 버리고 이곳을 최후의 보루로 삼아 이른 바 결7호 작전을 준비했던 흔적이다. 제주도의 해안 절벽과 주요 오름에는 이때 도민들을 강제 동원해서 파놓은 굴과 군사시설이 널려 있다. 이곳 오름 속에는 지하 사무실로 사용하기 위한 방과 그로 들어가는 통로가 남쪽 사면에 10개쯤 뚫려 있어 그 굴에 사람이 출입을 못하도록 나무를 엮어 막아 놓았다. 제주도 수난의 역사를 생각하게 하는 곳이다.
▲ 별도봉 -- 하늘· 바다· 한라산· 일출· 섬, 제주의 모든 것을 볼 수 있는 곳
이 어두운 숲길을 지나면 동쪽으로 환히 트인 여명(黎明)이 기다린다. 그야말로 암흑의 시대를 보내고 광복을 맞는 기분이다. 오른쪽으로 나타난 오현고등학교 체육관에는 불을 밝히고 배드민턴을 치느라 야단이다. 그 평탄한 길을 지나면 다음은 별도봉에 오르는 길이다. 잠시 숲을 지나면 평탄한 커브 길이 이어지고 무덤군이 나타난다. 무덤을 보며 가끔 죽음에 대해서도 생각해보기도 한다. 그 커브를 돌면 어느덧 바다가 보이게 된다. 이곳에서는 바다로 통하도록 길이 나 있다. 지금은 잡초를 베어버려 소풍 장소로 안성맞춤이겠다.
그 시각 고개를 동쪽으로 돌리면 바다에서 둥실 떠오르는 해를 맞게 된다. 시간과 날씨에 따라 해 뜨는 광경도 가지각색이다. 해뜨는 시각 동쪽 지평선에 떠오른 오름 능선은 한라산까지 이어져 장관을 연출한다. 눈이 아릴 정도로 바라보다 눈물이 나면, 바다로 눈길을 돌린다. 아직 칼치와 한치를 낚던 배들이 남아 희미해진 불빛을 단 채 작업이 한창이다. 바람이라도 부는 날이면 어둠 속에 하얀 파도가 부서지는 모습이 발길을 잡는다.
이제부터 두 갈래 길이 나오는데 하나는 해변 쪽으로 도는 길이고, 다른 하나는 정상으로나 있는 가파른 길이다. 정상으로 나 있는 종주길을 택해 유산소 운동을 위해 한껏 심한 운동을 하면서 운동량을 늘린다. 일부러 빨리 오르며 거친 숨을 몰아쉬는 것이다. 처음 3분의1은 타이어로 짠 발판이 깔려 있고, 중간 3분의 1은 나무로 듬성듬성 만들어 놓은 계단, 나머지는 다시 타이어 발판이다. 나는 헉헉거리면서 육체적으로 가해지는 고통을 참기 위해 깊은 사고(思考)를 하거나, 오른쪽으로 눈을 돌려 바다 또는 왼쪽으로 한라산을 우러른다.
드디어 별도봉 정상! 주위가 환하게 트이고 한라산의 웅장하게 다가선다. 한라산의 모습도 날마다 달라지게 마련이다. 잠시 숨고르기 운동을 하며 사방을 둘러본다. 서쪽에 소나무로 덮여 있는 사라봉 정상에 세운 정자가 보인다. 별도봉은 해발 136m지만 바닷가에 있기 때문에 우뚝 솟아 보인다. 바다 쪽으로 자살 터 절벽이 보인다. 지금은 그런 일이 없지만 옛날에는 자신을 비관하여 자살 소동이 자주 일어났던 곳이다. 언제고 살기 힘든 버거운 짐을 진 사람이 있는 법이다. 사소한 오해 때문에 여자 문제로 이곳에 젊은 나이를 버린 친구 생각이 문득 머리를 스친다. (다음 화요일에 계속)
△ 사진 위는 들국화(산국)이고, 아래는 별도봉 사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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