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오름 이야기

비가 우리를 피했는지, 우리가 비를 피했는지

김창집 2003. 7. 11. 23:58

돝오름, 비자림, 바농오름 답사기[2003. 7. 6.]

 

 

(소나무가 아름다운 돝오름 등성이에서)

 

▲ 계절의 변화가 감지되는 돝오름

 

 비가 오는 날에는 나무가 없는 풀밭 오름에 오르는 것이 불문율이 되어 있다. 나무가 많은 오름은 나무 때문에 비를 조금 피할 수는 있지만 칙칙하고, 게다가 안개라도 끼면 사방을 분간할 수 없어 길을 잃기 쉽다. 그래서, 비를 피해 오랜만에 찾은 곳이 돝오름. 송당에서 16번도로로 수산쪽으로 가다가 왼쪽으로 처음 나뉘어진 아스팔트길로 들어가면 바로 눈앞에 나타나는 오름이다. 오름 바로 밑으로 길이 둘이 나 있는데, 왼쪽 시멘트 포장길이 돝오름으로 오르는 길이고, 오른쪽 비포장길은 비자림으로 통하는 길이다. 길로 들어서자 굵은 열매를 달고 있는 푸조나무가 싱싱한 채로 우릴 맞는다. 지금 제주 전역에 있는 수많은 팽나무가 병충해를 입어 누렇게 떠 있지만 푸조나무는 가는 곳마다 싱싱하다. 둘 다 느릅나무과의 낙엽교목인데 너무 대조적이다.

 

 왕고들빼기가 싱싱하게 자라 풀숲에서 자태를 드러내고, 큰뱀무의 노란 꽃들이 바람에 나부낀다. 오름 오른쪽 목장 철문을 열고 들어가 삼나무 숲을 지나면 눈앞에 비자림이 나타나고, 왼쪽으로 바로 오름 정상으로 오르는 길이 보인다. 비에 젖은 오름에선 극명하게 계절의 흐름을 감지할 수 있었다. 그 동안 온 산을 수놓았던 개민들레와 개망초는 이제 시들어 그 명맥만 유지하는가 하면, 가을까지 이어 피는 섬잔대와 쥐손이풀 꽃이 서서히 그 모습을 드러냈다. 타래난초도 마지막 안간힘을 다하고, 찔레나무 계열인 돌가시나무꽃도 열기에 들뜬 모습이다. 다만 빗속의 솔나물만이 좁쌀 같이 노란 꽃무더기를 자랑하고 있다.

 

 

(돝오름 입구에 한창 피어오르는 큰뱀무 꽃)

 

 누가 이 오름을 '돝오름'이라 이름했을까? '돝'은 '돼지'의 고어이자 제주어이다. 정상에 앉아 그 모습을 살피면 통통하게 살오른 돼지가 몸을 오그려 낮잠을 즐기는 모습이다. 정상에 서면 눈앞에 질펀하게 펼쳐지는 푸른 숲은 비자림이다. 비자림을 건너온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고개를 들면 적당한 거리에 앉아 있는 다랑쉬오름과 둔지오름이 정답다. 오름은 올라서 사방을 둘러보는 맛도 있지만 멀리서 조망하는 즐거움이 그만이다. 저 아름답기로 유명한 다랑쉬오름도 이 돝오름에서 봐야 제격이다. 이 넓은 섬에 오름이 없이 한라산만 덩그마니 있었으면 얼마나 쓸쓸했으랴?

 

 몇 년 전 늦가을엔 보랏빛 꽃향유가 온통 산을 덮어 꿀벌이 잉잉거리고 있어 벌을 무서워  하는 회원들이 호들갑 떨던 모습이 떠올라 웃었다. 새참거리를 풀어놓으니 아침을 제대로 먹은 회원들은 살이 찐다고 오름 분화구를 돌러 가버리고 아침이 부실한 회원들만 앉아 경치를 즐기며 먹는다. 정상 서쪽으로 등성이를 따라 돌며 정원수처럼 자리잡은 소나무를 감상하다 망아지처럼 겅중겅중 뛰어도 보고, 풀밭을 뒤져 막 피어오르기 시작한 들꽃들을 찾는 기쁨을 만끽한다. 아무래도 요즘 들어 들꽃이 피는 시기가 빨라졌다는 얘기를 하며 한바퀴 돌아 그 길로 비스듬히 내려왔다. 비자림이 마주 보이는 산기슭엔 새로 6,100본의 비자나무를 심어놓았다. 비자림 숲이 수명이 다할 때를 대비해서 북제주군에서 벌이는 사업이다.

 

 

(돝오름에 새로 피어나기 시작한 쥐손이풀)

 

▲ 비자나무 숲을 한 바퀴 돌며

 

 보기만 하여도 싱그런 비자림을 향해 가다가 호랑나비 유충과 어린 장수하늘소를 만날 수 있었다. 그래 이곳은 오염이 안된 곳이니까. 처음 우리 학교가 이사간 월평에서도 자주 보이더니, 주변에 과수원이 많이 조성되어 농약을 치면서 뜸했는데 오랜만이다. 제주를 너무 좋아하여 일년의 반은 제주에 산다는 이생진 시인의 시구가 갑자기 떠오른다. '겨울밤에 네가 생각하는 것은/ 결코 깊은 생각이 아니다 / 푸른 천지에서 여름을 살다 간 벌레 한 마리/ 하늘소 / 너의 긴 수염을 깎으면 / 너는 얼마나 허약한 꼴이 되는지 아느냐/ 의자 밖으로 쫓겨난 권위를 너도 봤지 / 죽어도 수염은 깎지 말라' --『수염을 깎지 말라 - 하늘소』전문

 

 비자림으로 들어가는 길게 나 있는 들길에는 선밀나무 순이 한창 피어오르고 있다. 산길 담벼락에 마구 자라 여름에 들에서 일하는 농부들의 좋아하는 나물이 되어 왔는데, 길을 마구 넓히고 빼면서 이것도 요즘은 보기 힘들어졌다. 저걸 유난히 좋아하여 자주 뜯어다 드렸던 기억 때문에 선밀나무만 보면 일찍 저 세상으로 가버린 아버님 생각이 난다. '부지런 부자 하늘도 못 막는다.'면서 비온 날 갠 날 없이 땀에 절은 갈옷을 벗지 않으셨던 당신. 연한 순과 잎사귀를 먹는데 독특한 맛이 나는 산나물이다.

 

 

(비자림 울타리에서 찍은 어린 장수하늘소)

 

 이곳 비자림은 300∼600년 된 비자나무 수천 그루가 약 45ha의 면적 안에 빽빽이 들어선 천연자생 상록수림 군락지로 단일수종 군락지로는 세계 최대 규모라 한다. 비자나무는 주목과에 속하며 암수 딴 그루인 상록수인데, 1년에 겨우 1.5cm 가량밖에 안 자라는 나무다. 나이테도 없고 15∼20년이 지나야 비로소 열매를 맺는다. 전 해에 맺힌 열매가 다음해 가을까지 익고 봄에 다시 피어난 꽃이 열매로 달려 사시사철 열매를 볼 수 있다. 열매는 옛날 식용과 구충제 등으로 쓰였다. 나무 결이 고와 고급가구 재료로 애용되었으며, 바둑판을 만들면 최상품이 된다. 비자나무 고목 사이사이에는 다른 활엽수들이 자라 더욱 울창한 숲을 이루었다. 비자나무 고목에는 풍란, 콩자개란, 흑난초, 비자란 같은 희귀한 난초들이 기생한다.

 

 숲 중앙으로 가서 '새천년 비자나무'란 이름을 붙인 고목나무를 본다. 1천년 가까운 세월 동안 선조들과 함께 온갖 풍상을 이겨낸 세계 최대의 이 비자나무는 지역의 안녕을 지켜온 숭고함을 기리고 지역주민의 정신적 지주로 삼기 위해 2000년 1월 1일 그렇게 이름을 붙인 것이다. 전라도 지방에도 이름난 비자나무가 몇 군데 있지만 이곳은 천연기념물 제374호 지정돼 있어 오전 9시서부터 오후 6시까지만 산책이 허용된다. 문화재청에서 소유하며 북군청에서 관리하고 있다. 중산간에 위치한 오름에서 가끔 비자나무들이 보이는데 아직 열매가 달린 것은 못 보았다. 다만, 집에 심어놓은 나무에서 가끔 열매를 볼 수 있는데. 우리 학교에 심어 가꾼 비자나무 몇 그루에 금년에 열매가 달렸다.

 

 

(우리 학교에 달려 있는 비자나무 열매)

 

▲ 바농오름 - 언제 올라도 좋은 곳

 

 남조로 할머니집은 원래 인가와 멀리 떨어져 있는 곳이어서 우리 나라 전래 정서로 내려오는 산골 주막을 연상시킨다. 하긴 이곳이 고평동이라고 4. 3때 사라져버린 마을이어서 아직도 집터와 당이 남아 있고, 집이 하나둘 복원되고 있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곳은 폐허였다. 할머니집은 한쪽에 몇 가지 물건을 진열하고 의자와 탁자를 몇 개 들여놓아 순대국과 국수를 말아 파는 소박한 곳이다. 그러나, 몇 년 전 조선일보 '山(산)' 기자들이 이곳에 들러 음식을 먹어보고 그 담백한 손맛에 끌려 취재한 사진이 크게 걸려 있고, 손바닥 지도 광고에도 나온 바 있는 제법 유명한 곳이다. 다만 그 때 고왔던 사진 속의 할머니의 모습이 몇 년 새에 주름이 늘어난 게 달라진 점이라고나 할까?

 

 할머니집에서 선밀나무 순을 나물로 곁들여 포식한 나그네들이 다음에 오른 곳은 바로 그 위에 있는 바농오름이었다. 돝오름 부근에서는 안개 때문에 다른 오름이 보이지도 않았었는데, 여기서는 대기가 빗방울을 머금고 있어서인지 유난히 가까워 보인다. 이기풍 선교기념관 윗길로 들어가 적당한 곳에 차를 세운 일행은 삼나무 숲으로 나 있는 길을 따라 철조망을 건너 계곡 옆길을 따라 오른다. 남조로를 지날 때 보면 여근곡(女根谷)처럼 보여 웃음을 자아내게 하는 곳이다. 사람과 소의 발에 패이기 시작한 오름 길은 수로(水路)로 변해 연무른 속살이 마구 헤집어졌다.

 

 

(바농오름 남쪽 돌문화공원에 모아놓은 돌과 독)

 

 나는 이런저런 이유로 이 오름을 1년에 최하 다섯 차례는 오른다. 봄은 봄대로 여름은 여름대로 적당히 들꽃과 그늘을 주고, 가을 억새가 오름을 수놓을 때, 그리고 눈이라도 쌓인 겨울 산의 모습에 반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한번은 모 스포츠 신문사 기자와 동행했는데, 저 계곡에서 으름을 한 아름 따낸 일도 있다. 오름 이름에 들어 있는 '바농'은 '바늘'을 뜻하는 제주어지만 실상 오름과 이름과는 관련이 없어 보인다. 가시나무숲이 많아 바늘 모양의 가시에서 연관지어 이름을 그렇게 붙였을 것이라는 그럴듯한 견강부회식 해석만 남았다. 앉아 쉴 틈도 없이 표고 552.1m, 비고 142m를 단숨에 올라 남쪽 방화초소 옆에 자리를 잡았다.

 

 가을 같으면 분화구의 억새 숲을 가로지르며 그 정취를 맛보았겠지만 젖어있는 풀숲을 피해 동북쪽 나무 그늘로 나 있는 길을 따라 오른 것이다. 이 오름은 정상에 분화구가 있고 서쪽 능선 조금 내려간 곳에 북동쪽으로 벌어진 말굽형 화구가 있는 쌍둥이형 복합 화산체이다. 정상에서 바라보면 절물오름에서 민오름, 큰지그리, 족은지그리에서 흘러 이 바농오름까지 흘러내린 것이 산맥을 연상시킨다. 남쪽 넓은 벌판에는 지금 돌문화공원을 조성하느라 공사가 한창이다. 그쪽으로 내려와 줄을 맞춰 세워놓은 항아리를 보다가 오름 옆길을 걸어 다시 출발지점으로 돌아왔다. 3시 반. 장마 중 이곳 저곳에 비가 내렸는데도 불구하고 우리가 비를 피하고 다녔는지 비가 우리를 피해줬는지 즐거운 산행이었다.

 

 

(바농오름 옆으로 새로 다듬어 놓은 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