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얼마 안들어가서 만난 소나무 위의 마삭즐 열매
♧ 시오름의 겨울 채비
시오름은 단풍만 아름다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가는 길, 걸음을 재촉하는 친구들에게 너스레를 떨며
저 모습을 하나라도 더 담으려 노력했습니다.
초가을 그 가뭄도 다 이겨내고
아직 얼어붙을 듯한 차가움에 몸을 떨어보지도 못했는데도
저런 고운 빛을 띨 수 있다는 게 기적입니다.
저 아름답고 신비한 빛을 낳아준 자연의 섭리가
인간의 메마른 가슴을 어루만져 줍니다.
우리가 경외(敬畏)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입니다.
* 노란 단풍을 자랑하는 서어나무
♧ 11월의 편지 - 목필균
지구가 뜨거워졌는지
내가 뜨거워졌는지
아직 단풍이 곱다
갈색 플라타나스 너른 잎새에
네 모습이 서있고
11월이 되고서도
전하지 못한 이야기들
꼬깃꼬깃 접힌 채
쓸려간다
모니터에 네 전령처럼
개미 한 마리
속없이 배회하는 밤이 깊다
네가 그립다고
말하기보다 이렇게 밤을 밝힌다
11월 그 어느 날에
* 떨어지다 남은 누리장나무 열매
♧ 11월에 - 고혜경
달빛에 홀로 선 나목(裸木)
투명한 새벽에 젖어
멀어지는
가을의 마지막 얼굴 되어
별 빛보다
더 시리게 떠나간다
사라져 흙이 되는 것마다
의미는 남아
이슬이 채 밟히지 못한 시간 앞에
때를 따라 아름답게 서성이는
가지에 매달린 마지막 마른 잎
천 년을 두고도 남을
사랑보다 더 깊은 의미의 진실이구나
햇살로 눈을 뜨기 시작하면서
새 소리 만으로
눈물겹고 감격할 수 있는
겨울의 싸늘함 속에
지는 나이를 끌어안기 시작한
11월에 자족할 수 있는
초록 잎 무성한
봄의 향기가 되어보자
* 여유로운 참나무 단풍
♧ 나무의 시 - 류시화
-- 아들 미륵이에게
나무에 대한 시를 쓰려면 먼저
눈을 감고
나무가 되어야지
너의 전 생애가 나무처럼 흔들려야지
해질 녘 나무의 노래를
나무 위에 날아와 앉는
세상의 모든 새를
너 자신처럼 느껴야지
네가 외로울 때마다
이 세상 어딘가에
너의 나무가 서 있다는 걸
잊지 말아야지
그리하여 외로움이 너의 그림자만큼 길어질 때
해질 녘 너의 그림자가 그 나무에 가 닿을 때
넌 비로소 나무에 대해 말해야지
그러나 언제나 삶에 대해 말해야지
그 어떤 것도 말고
* 아직 물이 덜 든 사람주나무 단풍
♧ 가을이 가는구나 - 김용택
이렇게 가을이 가는구나
아름다운 시 한 편도
강가에 나가 기다릴 사랑도 없이
가랑잎에 가을빛같이
정말 가을이 가는구나
조금 더
가면
눈이 오리
먼 산에 기댄
그대 마음에
눈은 오리
산은
그려지리
* 적당히 물드는 비목나무 단풍
♧ 세월의 습곡이여, 기억의 단층이여 - 이성복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날들이 흘러갔다
강이 하늘로 흐를 때,
명절 떡쌀에 햇살이 부서질 때
우리가 아픈 것은 삶이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날들이 흘러갔다
흐르는 안개가 아마포처럼 몸에 감길 때,
짐 실은 말 뒷다리가 사람 다리보다 아름다울 때
삶이 가엾다면 우린 거기
묶일 수밖에 없다
* 잎사귀가 아주 작은 서어나무 단풍
♧ 사랑을 위한 노래 - 김승희
만일 네가 생각한다면
나의 불행한 마차가 그래도 가장 좋은 것이라고
만일 네가 생각한다면
너는 나와 함께 금색 태양을 위한
추운 싸움의 길 떠나야 한다.
만일 네가 생각한다면
암초 때문에 더욱더 빛나는 것이
사랑이라고 만일 네가 생각한다면
우리의 생의 다른 조명등들을
아낌없이 모두 꺼 버려야 한다.
숲들은 슬픈 안개에 아주 덮여 있었다.
비가 내리고 고요한 산정.
하늘 속에선 새들이
그들의 고독한 장난을 다시 시작하고
바람이 불었다.
* 오래된 삼나무는 모양이 좀 틀리다
그때 나는 꿈꾸었다, 너와 함께,
그리고 나서 우리의 발걸음은
지상의 지평선을 모두 잊어버리었다.
온갖 무장한 죽음이 나를 기다릴지라도
너 몰래 끊임없이 나를 괴롭힐지라도
만일 네가 생각한다면
나의 싸움이 용감하였다고
만일 네가 생각한다면
나의 죽음의 검은 도화지 위에
금 칠한 천사를 그리겠다,
너의 얼굴과.
* 이 나무가 '이나무'입니다. 색깔이 화려하지 못한 이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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