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물, 세미소, 절물오름 답사기 [9월 5일 일요일]
* 가을 하늘을 배경으로 피어 있는 코스모스
♧ 제주시에는 흐리고 비가 내리기 때문에 일단 비를 피할 수 있을지도 모를 서쪽에 있는 정물오름에 오르기로 했다. 제주시를 벗어나 북제주군 지역으로 접어드는 순간, 어둑하던 하늘이 갑자기 환해지면서 높은 하늘엔 흰구름만 유유히 떠 있다. 서부관광도로 길가의 코스모스가 너무 청초(淸楚)해보여 차를 세우고 찍었다. 상큼한 여인의 맵시를 닮은 코스모스를 따라 가을의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욕심껏 담아본다.
* 의젓하게 자리잡은 정물오름 위의 당오름
x-text/html; charset=iso-8859-1" autostart="true" loop="1">♣ 산록도로를 연장하여 금악으로 빼놓은 새 길로 접어들어 다시 한번 차를 세웠다. 거기에는 오늘 우리가 오를 당오름과 정물오름이 당당한 자세로 서 있다. 제주도의 오랜 풍습인 벌초 기간을 맞아 여기저기 무덤의 풀을 베는 모습이 보인다. 우리 집안에서는 다음 주 일요일과 음력 8월 초하룻날 벌초를 할 예정이기에 마음놓고 산에 오르는 것이다. 천고마비(天高馬肥)의 계절을 입증이나 하듯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는 말들이 푸른 하늘과 너무 어울린다.
* 천고마비를 떠올리게 하는 말과 하늘, 그리고 구름
♧ 막 정물오름 초입으로 들어섰는데, 도깨비가지가 꽃과 열매를 매단 채 길섶에서 나를 붙잡는다. 여기가 이시돌 목장이고 보면 분명히 외국에서 들어온 품종이다. 꽃은 가지꽃과 비슷하고 잎사귀는 독말풀을 닮았는데 가시가 돋았다. 열매는 무늬가 요란한 것만 빼고는 방울토마토를 닮았다. 내려올 때 이곳저곳에서 많이 발견되었고, 나중에 들른 세미소오름에서는 이게 아예 분화구의 반을 점령하고 있었다.
* 가지꽃과 독말풀을 연상시키는 도깨비가지꽃
♣ 정물오름은 가을 들꽃의 전시장이라고 할만큼 눈을 즐겁게 한다. 먼저 닭의장풀이 인사를 하고 남아 있는 무릇꽃도 거든다. 쇠서나물 꽃도 그 노란 색을 자랑하듯 홀로 빛나는데, 이질풀꽃과 쥐손이풀꽃은 구별하기가 쉽지 않다. 하긴 이 두 가지가 다 쥐손이풀과에 속하니까…. 세상을 살다 보면 꼭 구별해야 할 것이 있고, 두루뭉실 그냥 넘어가도 되는 것처럼 다 쥐손이풀이라 해도 좋고, 그냥 이질풀이라 해도 좋지 않을까?
* 쥐손이풀(이질풀이라고 우길 사람도 있을 것이다.)
♧ 가파른 오르막길을 가면서도 눈은 연신 이리저리 널려 있는 풀꽃을 더듬는다. 그 많던 잔대는 말이 뜯어먹었는지 꼭 두 송이만 눈에 띄었다. 그런 반면 짚신나물은 말이 아예 안 먹는지 여기저기 무성하게 꽃을 피웠다. 씀바귀도 가장자리에 꽃을 피운 채 간혹 눈에 띈다. 한쪽에 비가 내려서 쨍쨍 내리쬐는 햇볕이 말도 못하게 뜨겁다. 더위 타는 회원들이 나무 그늘을 찾아 내려가잔다. 오이풀도 드문드문 보이고, 산박하는 꽃이 너무 작아 눈에서 자꾸 멀어진다.
* 지난 7월말 도쿄의 어느 지하 일식집에서 만난 범부채꽃
♣ 내려가다가 동쪽 바람이 잘 터지는 곳, 그리 크지 않은 소나무를 의지해 자리를 잡았다. 시원한 물과 차로 더위를 식히는데 옆에 바람에 흔들리는 두 줄기 범부채가 의연히 모습을 드러낸다. 몸체가 납작하여 부채와 같고 꽃잎은 붉은 바탕에 검은 점이 찍혀 범을 연상시킨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 범부채이고 보면, 퍽이나 낭만적인 이름이다. 실하게 여문 씨앗이 정말 믿음직스럽다.
* 꼭 같은 나비만 날아드는 금불초 꽃과 나비
♣ 앉아 쉬는 자리에서 유난히 노란 꽃무더기가 보여 내려가는 길에 가보기로 했다. 그 꽃의 정체는 바로 금불초였다. 해바라기를 닮은 이 꽃은 습지를 좋아하는데, 뿌리줄기가 뻗으면서 번식하기 때문에 여기 이렇게 꽃무더기를 이룬 것이다. 주위가 온통 금불초가 가득한 걸 보고 흐드러지게 핀다는 것은 바로 이런 것을 두고 이른다는 말도 나올 정도였다. 꼭 금불초 꽃에만 날아드는 나비가 있어 금불나비라는 이름을 붙이기도 했다.
* 이름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은 부처꽃
♧ 우산을 연상시키는 말똥버섯도 보이고, 앞서 말한 페루꽈리도 여기저기 보인다. 분홍빛이 선명한 꽃이 있어 나중에 알아보았더니 부처꽃이라고 했다. 천굴채(千屈菜)라고 불리는 이 꽃이 왜 부처꽃이라 하는지 모르겠다. 이 세상에 모든 사물의 이름은 하나같이 어떤 연유에 의해 붙여졌다. 하지만 그 중에는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것도 있고, 전혀 생소하기 이를 데 없는 것도 있다. 그 이미지에 걸맞는 이름을 갖는다는 것은 사람이나 무엇이나 다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 천주교의 시설을 해놓은 세미소오름 입구(삼뫼소라 표기되었다.)
♣ 처음에는 단순히 비가 올 것을 예상해서 잔디 오름인 정물과 당오름을 오르려고 했지만 막상 해가 쨍쨍 내리쬐다 보니, 생각이 달라졌다. 나무 그늘이 그립고 간단히 오를 수 있는 오름에 가고 싶어지는 것이다. 그래 여기저기 손꼽아 보다가 오랜만에 가까이 있는 세미소오름을 가보자고 했다. 우리 인생살이에서도 그렇듯이, 처음에 계획한 대로 가지 못할 때는 상황에 때라 지혜롭게 대처하는 하는 일이 필요하다.
*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만나는 예수상
♧ 세미소오름은 금악리경 이시돌목장 안에 있는 비고 30m밖에 안 되는 오름이지만 나지막한 다섯 봉우리가 완만한 기복으로 둘러싼 원형의 분화구 안에는 이 오름 이름의 근원이 되는 샘을 새롭게 단장하여 종합운동장 정도 크기의 호수를 만들어 놓았다. 삼나무가 늘어선 골목을 따라 안으로 들어서면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상이 나타나고 오른쪽으로 길을 따라 올라 가면서 고난을 당하는 예수의 모습을 담은 조각품과 은총의 동산을 만드는 등 성스러운 장소로 꾸며져 있다.
* 방울토마토를 닮은 도깨비가지 열매
♣ 왼쪽으로 빠져나가 분화구 안에서 도깨비가지를 촬영하고 동쪽을 바라보니, 한 무더기 쑥부쟁이가 있어 다가서려니까 숨어있던 까투리 한 마리가 푸드득거리며 날아오르는 순간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서로가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던 것 같다. 소나무 우거진 길을 따라 한 바퀴 돌다가 더 나아가지 못하고 다시 호수로 나왔다. 잘 정비해놓은 호수를 둘러놓은 길을 한 바퀴 돌아본다. 조경해 놓은 나무들 중 댕강나무가 하얀 꽃을 피워대고 있었다.
* 흔하지만 이 날 모처럼 본 쑥부쟁이
♧ 맑은 호수에는 오름의 그림자와 그 위를 흐르는 구름이 한가로이 비쳐 오랜만에 아름다운 풍경에 젖어 한동안 발을 움직일 수 없었다. 한 바퀴 돌고 나서 다시 은총의 동산을 오른다. 열 발작 디딜 때마다 나타나는 고난을 당하는 예수의 모습과 그 밑에 적힌 글을 읽으며 가노라니, 마침 심어놓은 단풍 서너 그루가 꼭대기 부분이 빨갛게 물든 채로 서 있다. 원래 종자가 빨간 것인지 기온의 변화에 따른 것인지 모르나 진한 색에서 가을을 읽는다.
* 빨갛게 물든 단풍나뭇잎
♣ 너무 더워서 모두의 입에서는 시원한 점심을 원하는 소리가 들린다. 결국 낙착을 본 것이 서문시장 영미식당의 한치물회. 제주시를 향해 차를 몰았다. 광령을 넘어 제주시 경계로 들어서는 순간 햇빛은 사라지고 구름이 잔뜩 끼어 시원한 느낌을 준다. 알고 보니 하루 종일 그랬다는데, 자동차로 한 시간도 안 되는 거리의 일기가 이렇게 다르다는 게 신기할 뿐이다. 옆자리에서 얻은 콩잎까지 곁들이다 보니 점심이 진수성찬이 되고 말았다.
* 정물오름 초입에서 만난 닭의장풀
♧ 그냥 집에 가면 소화가 걱정이다. 조금 걷는 것이 필요하다기 다시 제주시 절물오름으로 갔다. 오늘 오름은 정물과 절물이다. 정물오름에는 번듯한 우물이 있어 정물이고, 이곳은 절이 있고 물이 있다고 절물인데 분명히 물이 먼저였을 터. 시원하게 솟아나는 석간수는 여러 사람의 찬탄을 받고 있다. 지금은 제주시에서 아담하게 자연 휴양림 공원으로 꾸며놓아 어디 못지 않은 경관을 자랑하고 있다. 숲 너머로 보이는 오름은 안개가 자욱하게 끼어 있어 더욱 운치가 있다.
* 세미소오름의 호수
♣ 말을 하며 내리다가 자동차 키를 꽂은 채 문을 잠가버려 낭패를 당했다. 보험사에 연락하고 이곳까지 오는 동안 일행을 먼저 올려보내고 기다리며 주변의 들꽃과 나무를 찾아 사진을 찍는다. 시내에서 이곳까지 오려면 25분이 걸린다는 전언이다. 이번이 이곳에서 두 번째다. 나이가 들어 망령이 드는지, 무심코 행동한 것이 그런 결과를 가져오고 말았다. 지갑에다 비상키라도 넣고 다녀야 하겠다.
* 벌써 빨갛게 물들기 시작한 산딸나무 열매
♧ 어느 결에 산딸나무 열매가 빨갛게 물들었다. 아직 따먹기에는 이른 것 같은데 새들이 익어 가는 것을 골라 쪼아먹었다. 그러니까 그게 6월이었나? 바로 이 나무에 하얀 꽃을 찍었는데 두 달도 안 되어 이렇게 익다니. 그만하면 자연은 많은 일을 하고 진전을 보았는데, 나만 해놓은 것 없이 가을을 나는 게 아닌가 두려워진다. 그 아래로는 방울꽃이 슬픈 자줏빛을 띠고 사그라지고 있는 중이다.
* 보석처럼 익어가는 동백나무 열매
♣ 빨갛게 익어 가는 것은 비단 산딸나무 열매만이 아니었다. 동백도 어느 결에 홍조를 머금고 숨은 가을 햇빛에 반짝이고 있다. 이 놈은 햇빛의 비치는 방향에 따라 그 색을 달리한다. 까마귀베개나 꾸지뽕나무 열매도 붉은 빛을 띠기 시작하고 비목나무 열매는 빨갛게 물든 것이 많다. 화단에 심어놓은 상사화라 부르는 괘무릇도 이제 서서히 지기 시작한다. 비교적 높은 지역이라 그런지 물봉선도 힘을 잃었다.
* 안개 드리운 절물오름 전망대
♧ 허겁지겁 오름을 오른다. 바람에 떨어져 있는 산딸나무 열매가 애처럽다. 정상으로 오를수록 안개는 더 자욱해진다. 어린애와 초등학생, 중학생들이 앞뒤에서 먼저 오르려고 야단인데, 앞선 네 살배기는 딴전이다. 전망대에서 안개만 헛헛하게 전망하다 내려와 샘물을 벌컥벌컥 들이켜 아쉬움을 달랜다. 숲을 따라 내려오는 길에서 노루를 만났다. 찬찬히 다가서며 셔터를 누르는데, 장난치며 뛰어오던 녀석들의 서슬에 놀라 숲으로 도망친다.
* 조심스럽게 주위를 살피는 노루
'오름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찬란한 저녁놀, 그리고 대보름 달 (0) | 2004.10.01 |
---|---|
서영아리의 가을 바람[2004. 9. 14.] (0) | 2004.09.15 |
안개 속을 헤매다 [2004. 7. 11.] (0) | 2004.07.15 |
태풍 '민들레'의 정체를 찾아서 (0) | 2004.07.06 |
비틀거리는 숲길 (0) | 2004.06.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