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오름 이야기

찬란한 저녁놀, 그리고 대보름 달

김창집 2004. 10. 1. 21:20

대보름 달맞이를 위한 다랑쉬오름 등반기(2004. 9.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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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날 저녁놀은 유난히 아름다웠다.

 

● 태풍 '매미' 속에 진행됐던 작년 행사

 

 해마다 우리 오름오름회에서 실시하는 대보름 달맞이가 올해는 쾌재(快哉) 속에 진행되었다. 추석날은 차례를 지내느라 바쁘다고 이튿날인 연휴 마지막날 오후에 계획된 다랑쉬오름 등반은 14명의 회원이 참가한 가운데 시종 환호(歡呼) 속에 진행되었다. 어디에 근거를 두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보름날인 15일보다 16일 달이 더 크다는 얘기가 헛말이 아닌 듯싶었다.


 작년에 황당한 경우를 당했기에 오늘의 행사는 더 빛났다. 지난 해 추석 뒷날에 있었던 얘기다. 비바람 속에 약속된 시간인 오후 3시에 맞춰 차를 몰고 집을 나섰다. 바로 그 시간이 태풍 매미가 제주를 강타하는 시간이었다. 집에서 별로 멀지 않은 곳이지만 신호등이 떨어져 자동차를 덮칠까봐 노심초사하며 현장에 이르니, 그 비바람을 뚫고 3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아무리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바람이 부나'지만 이 정도면 오름에 미친 사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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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르기 전에 찍은 용눈이오름

 

 추석이어서 그랬는지 태풍이 불어서 그러는지 문을 연 음식점도 거의 없었다. 꼭 찾고 말리라 작정하고 차 1대에 동승하여 한참을 가다가 유일하게 문을 연 '도남오거리식당'으로 들어가 삼겹살이 담긴 커다란 쟁반으로 달구경을 대신하였다. 가까이 살고 있는 회원 한 분까지 불러내어 흥을 돋운 우리는 이호해수욕장으로부터 용두암에 이르는 해안도로에 가서 태풍이 일으키는 파도를 구경했다. 그 뒤 생맥주를 마시며 내일 아침 일찍 일출을 보러 가기로 하고 헤어졌다.

 이튿날 새벽 약속대로 만난 두 사람은 비바람에 씻긴 해를 보기 위해 제주도의 서남단인 안덕면 사계리로 갔다. 새벽까지도 하늘을 어지럽히는 검은 구름으로 봐서는 도무지 해의 꼬리도 기대할 개재가 아니었지만 이왕 나선 길, 갈 데까지 가보자고 강행군을 계속하였다. 그 날 완전하진 않았지만 형제섬 사이로 떠오르는 멋진 태양을 맞을 수 있었다.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이란 말이 그냥 나온 게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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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무 곁으로 보이는 푸른하늘과 흰구름

 

◐ 마음을 비우고 기다린 행사

 

 이번 행사를 실시하는 글을 홈페이지 '공지사항' 난에 올리고 나서 작년처럼 태풍이 올라오지 않을까 불안한 마음으로 이틀을 보냈다. 추석이 가까워질수록 제주와 남부 지방은 비가 와 보름달을 기대할 수 없다는 암담한 뉴스뿐이었다. 더욱이 제21호 태풍 메아리가 추석 뒷날 일본의 큐슈섬에 상륙한다는 보도를 접했을 때는 이번에도 작년처럼 되지 않을까 하고 체념 상태가 되어갔다. 

 추석 전날도 비가 내리고 추석날도 비가 내렸다. 추석 뒷날 태풍이 큐슈섬에 상륙한다는 보도가 있었다. 너무 집착하지 않기로 하고 마음을 비웠다. 비가 오면 모인 사람들끼리 막걸리라도 사들고 어디 사라봉 망양정(望洋亭)에라도 올라 술잔 위에 달 하나씩 그리며 한 잔 마시면 그만인 것을…. 어디 날씨가 사람 마음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성질의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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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명한 색을 자랑하는 쥐손이풀 꽃

 

 추석날 저녁 혼자 우산을 들고 별도봉과 사라봉을 산책하면서도 줄곧 그런 생각을 했다. 지금까지의 경험에 따르면 저녁놀이 괜찮을 것 같아 카메라를 들고나서면 별 볼일 없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오늘은 뭐 없을 거라 지레 짐작하고 카메라를 두고 간 날은 가끔 가슴을 치는 광경이 눈앞에 연출되곤 했다. 어쩌다 인연이 닿을라치면 무심코 카메라를 들고 간 날 건질 것이 나타나는 수가 종종 있었으니까…. 그런 것을 두고 사람들은 행운이라고 하나보다.

 추석 뒷날 아침 일어나 하늘을 보니 구름이 바삐 움직이며 걷힐 기미를 보인다. 텔레비전을 켜니 청소년 축구가 예맨을 4 : 0으로 대파했다는 쾌보(快報)다. 그래, 바로 이것이다. 마음을 비운다는 것도 그렇고, 진인사대천명도 그렇고…. 내가 할 일을 열심히 해놓고 나머지는 하늘에 맡기면 되는 것이다. 낮이 되면서 하늘에 구름이 걷히고 찬란한 햇빛이 쏟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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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을 들판을 장식하는 쑥부쟁이

 

♧ 비 맞아 더욱 싱싱한 가을 들꽃

 

 다랑쉬오름에 도착해 보니, 패러그라이더가 창공을 수놓고 많은 사람들이 오름에 오르고 있다. 너무 아름다운 오름이라고 소문이 나서 사람들이 대거 몰리는 바람에 무른 흙의 등산로가 황폐하기에 이르렀는데, 이번에 북제주군에서 등산로를 정비하여 일부는 나무 계단으로 받치고, 위로는 타이어로 짠 발판을 정상까지 깔아 놓았다. 또, 다른 길은 마대에 흙을 담아 패인 길을 묻어놓았다.  

 우리는 들꽃 촬영을 위해 사람들의 발길이 뜸한 남쪽 등산로를 택해 오르기 시작했다. 초입의 억새가 푸른 하늘에서 내리쬐는 햇빛을 받아 은빛 물결을 이루고 멀리 용눈이오름의 곡선이 너무 곱다. 남녘 들판에는 우주인이 내려와 기지를 건설하다가 지구인에게 들켜 공사를 중단하고 가버렸는지 요상한 건물들이 짓다만 채로 늘어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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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름 옆 벌판에 짓다만 요상한 집들

 

 오솔길에서 처음 눈에 띈 것은 메밀꽃을 닮은 뚝깔과 바디나물이다. 아침까지 비가 내리다 햇빛이 비쳐서 꽃들이 너무 싱싱하다. 참취꽃도 작지만 앙증스런 꽃잎을 하얗게 뽐내고, 그늘의 며느리밥풀꽃은 밥알을 두 개씩 입에 물고 수줍게 웃는다. 쥐손이풀꽃은 선명한 자태로 홍조(紅潮)를 띠었고, 곳곳의 절굿대도 둥근 봉오리 위로 보랏빛 꽃을 가만히 밀어 올렸다.

 능선에 무리져 피어 있는 저 쑥부쟁이의 맑은 자태도 아름답지만 구름처럼 수줍게 잎을 펼친 구름체꽃은 레이스 달린 옷을 입은 공주의 자태다. 이곳에서 자세가 빼어난 꽃을 찍고 나면 저곳에서 더 나은 꽃이 나타나고, 저곳에서 새로운 꽃이 나타나 찍고 나면 또 다른 곳에서 예쁜 꽃이 나타나고…. 이건 달 보러 온 것이 아니라 꽃 보러 온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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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절굿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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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름체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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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며느리밥풀꽃

 

○ 탄성 속에 보낸 저녁 노을

 

 능선을 따라 꽃을 찍으며 북쪽 정상으로 오르는 동안 주변에 흩어진 오름에 포커스를 맞추었다가 렌즈를 돌려 오름 능선의 곡선과 억새를 찍기도 하면서 1시간 여를 보냈다. 아니, 우리가 정상에서 새참을 먹고 있는 동안에도 사진을 찍은 몇몇 회원들은 2시간도 더 걸려서야 도착할 정도로 많은 사진을 찍었다.

 명절 차례를 지내고 난 퇴물(退物)을 가지고 와서 요기를 해야 달뜨는 것을 보고 내려와 늦은 저녁을 먹을 때까지 견딜 수 있다고 해두었더니 진짜 맛있는 음식들을 싸고 와 풀어놓는다. 새로 약밥을 지어온 회원도 있고 집에서 추석을 차리지 않았다고 대신 과일이나 과자를 사 온 분도 있다. 송순주와 맥주를 곁들여 든든히 요기를 하고 나자 해가 서쪽 능선 위로 깔린 구름을 물들이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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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녁놀 속의 억새꽃

 

 이곳은 제주 섬의 동쪽에 치우쳐 있어 한라산 봉우리 --우리는 흔히 부악(釜岳)이라 부른다.-- 아래 많은 오름들의 곡선이 중첩된다. 그 위로 구름까지 걸려 있으니 오늘의 저녁놀은 대단한 풍광일 게 틀림없다. 회원들은 자신이 원하는 자리를 차지하여 삼각대를 세우는가 하면 억새를 앞에 두고 자리를 잡고 앉아 벌써부터 셔터 누르기에 여념이 없다.

 해가 구름 속으로 들어가기 시작하자 주위에 붉은 빛이 감돈다. 가만히 보니 붉은 색만이 아니다. 스펙트럼의 조화로 빨주노초파남보가 짙으면 짙은 것끼리 옅으면 옅은 것끼리 사방에 퍼져 빠른 속도로 변환한다. 탄성이 쏟아지고 셔터 소리가 요란하다. 억새를 앞에다 놓고 지는 해를 향해 찍는 사람도 있다. 해가 빨간 불덩이로 변해 마지막 지평선으로 넘어가는 것을 보고 나서도 셔터소리는 멈추질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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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진 뒤 한라산의 은은한 저녁놀 

 

○ 찬란한 저녁놀 뒤에 솟은 둥근 달 

 

 한 동안 야단법석이 끝나고 몸을 반대로 돌려 일출봉 쪽으로 향한다. 그러나 동쪽 수평선에는 옅은 구름 띠가 걸려 있어 6시반이 지났는데도 달은 나타나질 않는다. 더러는 해가 진 뒤 음영(陰影)으로 드러난 오름의 곡선을 카메라에 담느라 아직도 서쪽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잠시 실망의 빛이 역력한 일행의 침묵을 깨는 소리가 들린다.

 "달이다!" 고개를 들어보니, 수평선과 구름 띠 사이에 빨간 불덩이가 조금 보이더니 더 커지며 천천히 솟아오른다. 순간 가슴이 울컥 치밀며 오랫동안 묵은 체증(滯症)이 서서히 내려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달은 한 달에 사나흘을 제외하고 매일매일 뜨고 지건만 지금까지 살면서 뜨는 달을 보며 이렇게 감동을 느낀 적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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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가 진 후 드러난 오름의 능선들

 

 이렇게 지구상의 자연 현상에서부터 사람 사는 일에 이르기까지 감동적인 일은 분명 수없이 많을 테지만 관심을 갖지 않아서 모르고 지내온 셈이다. 이 외경(畏敬)을, 가슴이 벅차 오르는 감동을 오래오래 잡아두기 위하여 천천히 카메라 셔터를 눌렀다. 그러나, 찍히질 않는다. 오히려 카메라가 내 능력 밖이라는 듯 셔터 밑으로 붉은 불빛만 껌뻑거릴 뿐이다. 어쩔 수 없어 동영상으로 작동한다는 신호다.  

 달이 잠시 구름 띠 속에 머물다 솟아오를 때까지 몇 번을 시도했으나 허사였다. 하긴 설령 찍힌다 할지라도 잡아당기는데 한계(限界)가 있어 찍고 보면 사진에 나타난 것은 둥그렇고 노란 덩어리가 전부일 것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아예 카메라를 접고 저걸 머리 속에 넣어두기로 했다. 달은 공중으로 오를수록 빛나며 우리가 사진 찍기를 마치고 내려올 때까지 어둠을 밝혀 주었고, 늦은 저녁을 먹기 위해 들린 횟집의 둥근 접시와 겹쳐 둥실둥실 넘나들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