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래의 이름이 관봉 석조여래좌상인 갓바위(보물제 제431호)
▲ 4개의 시와 군이 만나는 곳
2007년 8월 12일 금요일 흐리고 비. 기다리고 기다리던 날이 밝아 팔공산으로 떠나는 날이다. 오름오름회를 대표한 10명의 회원들은 9시까지 모두 제주국제공항에 집결해 수속을 마친 뒤, 아시아나 항공기에 올랐다. 이 항공사를 택한 이유는 오는 날 대구발 제주행 마지막 항공편이 7시에 있기 때문이다. 9시 반이 되자 비행기는 활주로를 뒤로 밀어내며 산뜻하게 출발한다.
우리 ‘오름오름회’에서는 전신인 ‘오름나그네회’ 때부터 해마다 전국에 산재한 적당한 산을 골라 원정등반을 실시해 왔다. 1년 내내 섬 안에 있는 오름만 돌다보면 변화가 필요했고, 우물안개구리라는 이미지를 탈피하기 위해서라도 밖으로 나가는 즐거움을 원했던 것이다. 이번에 굳이 팔공산을 택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탐문회에서 이곳을 답사하면서 언젠가는 한 번 올라야 할 산으로 낙점해 두었기 때문이다.
* 구름에 가려진 여서도(위)와 거문도(아래)
팔공산(八公山)은 그 오지랖도 넓어 대구광역시와 영천시, 군위군 부계면(缶溪面), 칠곡군 가산면(架山面) 등 4개의 시군을 포함하고 있는 산이다. 높이는 비록 한라산에 못 미치는 1,193m이지만 대구의 진산으로, 남쪽으로 내달리던 태백산맥이 낙동강, 금호강과 만나는 곳에 솟아 있어 행정구역상으로는 대구광역시 동구에 속하지만, 영천시, 경산시, 칠곡군, 군위군 등 4개 시군이 경계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주봉인 비로봉(毘盧峰)을 중심으로 동서로 20㎞에 걸쳐 능선이 이어지는데, 예로부터 부악(父岳), 중악(中岳), 공산(公山), 동수산(桐藪山) 등 여러 이름으로 불렸으며, 남쪽에 문암천(門岩川), 북쪽과 동쪽에 한천(漢川), 남천(南川), 신녕천(新寧川) 등 여러 하천과 계곡이 발달하였다. 그 가운데 골짜기가 깊고 숲이 우거진 수태골이 특히 유명하고, 그 품에 국보와 보물을 간직한 절이 여러 개 있다.
* 갓바위 입구에서 우리를 맞아준 작은 폭포(위)와 맥문동꽃(아래)
▲ 거룩한 불교의 성지
넘실대는 파도 속에 여서도와 거문도가 보이는데 구름 우산을 펼치고 있다. 남해안을 지나면서는 구름에 가려 육지가 안보인다. 중부지방에 폭우가 내린다는데 혹 물난리가 나면 어쩌나 걱정이 되면서도 한 구석 믿는 곳, 모든 것을 부처님께 맡기기로 했다. 팔공산은 대한불교조계종 제9교구 본사인 동화사(桐華寺)를 비롯해 파계사(把溪寺), 부인사(符仁寺), 은해사(銀海寺) 등의 사찰과 군위삼존석굴, 관봉석조여래좌상 등 불교 문화재가 곳곳에 깃들어 있는 곳이 아닌가?
동화사(桐華寺)는 대구 동구 도학동에 위치해 있는데, 493년(신라 소지왕 15) 극달(極達)이 세운 유가사(瑜伽寺)를 832년(흥덕왕 7)에 심지왕사(心地王師)가 중건할 때 사찰 주변에 오동나무 꽃이 만발하여 동화사라 개칭하였다고 전하는데, 그 후 여러 차례 중창을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경내에는 1732년 8번째 중건한 대웅전과 극락전을 비롯하여 근래의 통일약사대불까지 국내외에 널리 알려진 절이다.
부인사(符仁寺)는 대구 동구 신무동 팔공산 남쪽 중턱에 자리해 있는데, 동화사의 말사로 사당인 선덕묘(善德廟)가 있는 것으로 미루어 신라 선덕여왕 때 창건된 절로 짐작된다. 신라와 고려시대에는 39개의 부속암자를 관장하였고 2천여 명의 승려가 머물며 수도하였다고 한다. 고려 현종 때부터 문종 때까지 도감(都監)을 설치하고 고려 초조대장경(初彫大藏經)을 판각한 곳으로도 유명하다.
* 갓바위 입구 부도밭(위)과 가는 도중 지장보살상 위에 앉은 새(아래)
파계사(把溪寺)는 대구 동구 중대동의 팔공산(八公山) 서쪽 기슭에 자리 잡은 동화사(桐華寺)의 말사로 804년(애장왕5)에 심지(心地)가 창건하고, 1605년(선조38) 계관(戒寬)이 중창하였으며, 1695년(숙종 21) 현응(玄應)이 삼창하였다. 이 절에는 영조(英祖)의 출생과 관계되는 설화가 전해지는데, 1979년 관음보살상을 개금할 때 불상에서 나온 영조의 어의(御衣)는 설화의 신빙성을 더해 주며, 보물 제1214호 파계사 영산회상도(靈山會上圖)가 있다.
은해사(銀海寺)는 영천시 청통면 팔공산에 있는 사찰로 전국 31본산(本山)의 하나이자 대한불교조계종 제10교구 본사이다. 809년(신라 헌덕왕1) 혜철국사(惠哲國師)가 해안평(海眼坪)에 창건한 사찰로 처음에는 해안사(海眼寺)라고 하였다. 1264년(고려 원종 5)에 홍진국사(弘眞國師)가 중창하며 확장하였는데, 1545년(조선 인종 1)에 소실되어 1546년(명종 1)에 천교(天敎)가 지금의 자리로 옮겨지었다.
법당과 비석을 세워 인종(仁宗)의 태실(胎室)을 봉한 뒤 은해사라고 하였는데, 1563년(명종18)에 다시 소실되어 이듬해 묘진(妙眞)이 중건했고, 1589년(선조 22)에 법영(法英), 의연(義演), 광심(廣心) 세 승려의 원력(願力)으로 다시 중창하여 대가람이 되었다. 1847년(현종 13)에 또다시 불탄 것을 후에 팔봉(八峰), 해월(海月) 두 승려가 중수하였다.
현존하는 당우는 대웅전과 설선당(說禪堂), 심검당(尋劒堂), 종루, 보화루(寶華樓), 독성각, 승당, 요사채 등이 있다. 주요 문화재로는 국보 제14호인 거조암영산전(居祖庵靈山殿), 보물 제486호인 백흥암극락전수미단, 보물 제514호인 운부암청동보살좌상, 보물 제790호인 백흥암 극락전 등이 있으며, 이 밖에도 60여 점의 문화재와 24동(棟)의 건물이 있다.
* 관암사로 오르는 길의 표지석(위)과 거욱대(아래)
▲ 공항에 내려 바로 갓바위로
10시30분. 비행기가 대구국제공항에 사뿐히 내려앉을 때 밖을 보니 비는 내리지 않고 밤에 비가 내렸는지 땅만 촉촉이 젖어 있다. 공항에서 조카와 통화할 때 이미 들어 알고 있었지만 눈으로 확인하니 마음이 놓인다. 이미 와 있던 처조카사위에게 배낭을 제외한 짐을 맡기고, 처형께서 마중 오며 사온 물과 빵을 받고 나가 막바로 갓바위로 가는 좌석버스를 탔다.
처형님은 너무 인정이 많고 인척을 잘 챙기는 분이어서 이번에 이곳 팔공산으로 가게 된 것도 ‘대구에도 한 번 오라’고 몇 번 강조해서 안 가면 섭섭해 할 것 같아 한번은 치러야 할 절차라고 생각한 끝에 결정한 것이다. 차비는 1,500원, 25분 정도가 지나 그곳 종점에 내렸다. 입구 정자 아래에서 등산 계획을 세우고 사온 요구르트를 나눠 마시며 빵과 물을 배분한 뒤 점심은 관봉에 있는 암자에서 공양하기로 하고 출발했다.
11:30. 산으로 오르는 초입에는 제주에는 이미 져버린 참나리와 비비추, 그리고 맥문동이 화려하게 피어 우리를 맞는다. 제주에서는 쉽게 맞볼 수 없는 철철 내리는 물소리를 들으며 올라간다. 비가 온지 얼마 안 됐기 때문에 서늘한 기운이 미풍에 날려 울창한 나무 그늘로 오르는 우리를 응원하고, 매미 소리 역시 버리지 못할 정취다. 곳곳에 할머니들이 청정 채소와 농산물을 팔고 있다.
오랜만에 산에 오르는 두 회원이 있어 이들을 격려하며 같이 오른다. 아직 몸이 풀어지기 전이고 계단이 연속이다 보니, 엊저녁 늦게 잤던 나까지도 힘에 부친다. 물을 마시고 격려를 하면서 두어 차례 쉬며 걷다 보니 어느덧 간판이 뚜렷하고 자판기가 양쪽에 늘어서 있는 것이 보인다. 독경소리가 낭랑하고 향냄새가 물씬 풍긴다. 1시간여를 고생한 끝에 모두 등정에 성공했다.
* 천일기도 법회를 알리는 글(위)과 관암사(아래)
▲ 영험 있기로 소문난 갓바위
갓바위는 입시는 물론 입사와 진급 등에 영험이 있다고 전국에 알려져 있다. 평일이었지만 많은 분들이 절을 하며 소원을 빌고 있었다. 10여년 만에 다시 만나지만 입가의 미소까지 하나도 변한 것이 없다. 우선은 일행이 있는 곳에 짐을 풀고 삼배를 올리며 소원을 빌었다. 먼저 온 일행은 벌써 사진 촬영을 끝내고 주변 풍경을 둘러보느라 야단이다. 너무 좋아서 또 힘들여 올라와서 그럴 테지만 분위기상 정숙을 요하며 사진을 찍었다.
머리에 특이하게 갓처럼 생긴 바위를 쓰고 있어 갓바위라지만 본래의 이름은 관봉 석조여래좌상(冠峰石造如來坐像)이다. 통일신라시대의 불상으로 1965년 9월 1일 보물 제431호로 지정되었으며, 높이 4m, 재료는 화강석이다. 대좌와 불상이 하나의 돌로 조각된 좌상불이다. 소발(素髮)에 육계가 명확하고 얼굴은 풍만한데, 눈·코·입은 세련되게 표현하여 풍만한 얼굴과 조화를 이룬다.
코끝에서 입 가장자리까지 八자로 깊이 판 것은 시대성과 유파성(流派性)을 보여주는 좋은 보기이고, 이마에 뚜렷한 백호(白毫)도 특징적이다. 귀는 어깨까지 내려오고, 굵고 곧은 목에 삼도(三道)가 있다. 어깨는 넓고 반듯하며 가슴도 발달되어 풍만하다. 손은 항마촉지인을 하고, 다리는 결가부좌(結跏趺坐)하여 그 비율도 격식에 맞고 조각수법도 훌륭하다. 통견(通肩)한 법의는 평행단상(平行袒裳)이 기본을 이루며 옷도 퍽 얇고 선도 유려하다.
대좌는 4각형이나 앞과 양 옆으로 옷자락이 내려와 상현좌(裳懸座)가 되어 있고, 전면의 옷 주름이 세 가닥으로 내려진 점은 경북 군위 삼존불(軍威三尊佛) 본존의 좌상과 같으나 변화를 생략한 점이 다르다. 선본사(禪本寺) 사적기에 따르면, 원광(圓光)의 제자 의현(義玄)이 사별한 어머니를 위하여 조성한 미륵보살이라 하나 이것은 불상의 형태이어서 확실한 상명(像名)을 단정할 수는 없다.
* 갓바위에서 바라본 어느 작은 봉우리(위)와 우리가 점심 공양을 했던 곳의 칠성각(아래)
▲ 석조여래상의 보우로 비를 피해
애초에 등반계획을 세울 때는 점심이 문제였다. 밥을 먹기엔 조금 이른 시간이고 또 곧 식사를 하고 바로 산에 오르는 것은 힘이 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작년에 산에 오를 때 아침 절에서 식사 공양을 한 것이 너무 좋았다는 곽 사장의 말도 떠오르고 해서 오르기 전 간단히 요기를 하고 점심은 산신각에서 공양하기로 했다. 기념사진을 촬영한 우리는 식사를 위해 우리가 올랐던 반대편 선본사 가는 길로 내려갔다.
앞에 칠성각이 있는 맞은편 식당에는 많은 등산객과 신도들이 식사를 하고 있었다. 신발을 벗을 때 비가 후드득 떨어지더니, 식사가 끝날 즈음엔 어둑해지며 퍼붓듯 쏟아진다. 피로도 풀 겸 숭늉을 마시며 조금 쉬어가자고 하여 조금 있으려니, 비가 가늘어진다. 오늘 가야 할 길이 멀어 이제 완전무장으로 떠날 때가 되었다고 채근하여 밖으로 나와 우산을 들고 앞장서 출발했다.
입구에 흰진범과 투구꽃이 곱게 피어 우리를 반긴다. 아래로 조금 내려가는데 비가 거의 개어 나는 아예 우산을 걷어 배낭에 넣고 앞장서 왼쪽으로 난 길에 들어서서 기다리다가 두 갈래 길에서 10명의 인원을 확인한 후 숲길을 따라 내려온 만큼 올라가는데, 입속 혀 위에 밥알 두 개를 물고 있는 며느리밥풀꽃을 만났다. 우리가 이틀 동안 팔공산 능선을 오갈 때 계속해서 응원해준 들꽃이다.
얼마 안 가 능선에 이르렀다. 고생 끝 행복 시작! 비는 완전히 개었고, 흠이라면 높이 솟은 기암괴석에 안개가 둘러쳐 그 광경을 즐기지 못하는 것 뿐! 그러나 봉우리를 하나 둘 지나면서 서서히 걷히기 시작하더니, 20분 정도 지나면서부터는 활짝 개어 최고봉인 비로봉과 동, 서봉을 제외하고는 나머지가 모두 눈에 들어온다. 갓바위 즉 관봉석조여래좌상의 보우(保佑)로 우리는 멋지게 비를 피했고 이후 즐거운 산행이 되었다.
* 등산 도중 곳곳에서 보았던 바위와 산봉우리들
▲ 제1초소봉에서 신령재까지
능선을 걷는데 갑자기 앞에 막아서는 것이 있어 바라보니 안개 속에 높은 바위가 막아서 길을 돌아가게 되어 있었다. 왼쪽 헬기장으로 길이 난 것으로 보아 여기가 바로 제1초소봉(852m)인 것 같다. 조금 더 내려가니 조그만 고개가 나타났는데 왼쪽으로 북지장사, 오른쪽으로 선본사 가는 길이다. 산 아래로 선본사(禪本寺) 당우(堂宇)들이 한 폭의 그림처럼 옹기종기 모여 있다.
사실 갓바위인 관봉 석조여래좌상(冠峰石造如來坐像)은 선본사 소속이다. 제일 높은 곳에 바위를 깎아 만든 여래상을 모시고 그 아래 향초 공양을 하는 노전격인 중단, 그 아래에 대중에 공양하는 하단 등 3단으로 구성되어 있는 셈이다. 따라서 신도들은 우리가 올라온 곳으로 오르지 않고 경산군 와촌면 동강리에서 출발하여 선본사에 들른 후 1km쯤 떨어진 갓바위로 오르는 것이다.
조금 더 걸어가니 안개가 서서히 걷히며 능바위(872m)가 나타났다. 모두들 함성을 지르며 그곳으로 오른다. 안개가 걷히고 멋있는 전경이 나타나자 다리가 아프다던 회원들도 언제 그랬냐 싶게 기분 좋게 올라선다. 얼마 안 가 노적봉을 넘어서니, 멀리 기암 능선이 나타난다. 가벼운 걸음으로 단숨에 삼봉(三峰)을 넘고 은해봉(882m) 이르러 한껏 쉬며 정상주를 들었다.
헬기장을 조금 넘어 느패재에서 동화사로 내리는 길이 있으나 내일의 일정을 조금이라도 줄여 볼까하여 1시간쯤 더 걸어두기로 계획했음을 알리고 다시 걷기 시작했다. 길도 잘 나 있고 굴곡이 심하지 않아 즐기며 산행을 하였다. 문무봉을 지나고 얼마 안 가 신령재에 이르렀다. 세워 놓은 안내 지도판을 보며 우리가 내려 갈 길을 살펴 내려갈 준비를 하였다.
* 등산 도중 곳곳에서 보았던 바위와 산봉우리들
▲ 신령재에서 내려 동화사로
4시가 조금 넘은 시각 폭포골로 하산하기 시작했다. 앞장서 빗물로 흐트러진 길을 찾아 내려오다 보니, 물소리가 제법 낭랑하다. 얼른 엎드려 물맛을 보고 냇물을 몇 번 가로지르며 내려오는 사이에 물이 제법 늘어 소리도 커지고 건너기도 힘들어 간다. 숲은 울울창창 녹음이 깊이 내렸다. 능선에서 계속 우리를 반겨주던 며느리밥풀꽃이 없어지고 낙차가 큰 곳에서는 제법 물 흐름이 세다.
이름에 걸맞게 곳곳에 폭포를 이루니 하얗게 부서지는 물살이 볼만하다. 그렇게 한참 내려오다 큰물을 건너게 될 ,물 가운데 바위가 있어 그곳에 앉아 쉬면서 남은 음식을 모두 꺼내 나눠 먹었다. 거세게 흐르던 물은 평탄한 길이 나타날수록 속도가 느려진다. 얼마 남지 않은 곳에 별장 터인 듯 헌집이 있고 사방으로 길이 나 있어 그곳을 버리고 능선을 따라가다 보니 너무 멀리 와버린 것 같아 다시 돌아와 냇물을 따라 나왔다.
이곳 팔공산을 등반하면서 제일 불편한 것은 갈래길이나 교차하는 길이 나타났을 때 이정표가 없는 점과 주요 지점이나 봉우리에 위치 번호만 표기된 점이다. 거리와 지명을 표시해주면 등산인들이 얼마나 편하고 좋을까? 한라산을 가보면 100m 단위로 고도가 달라질 때나 주요 지점에 온 거리와 현위치, 남은 거리 등을 표시한 안내판이 있어 편하고 즐거운 등산을 할 수 있다.
그것이 국립공원과 도립공원의 차이일까 싶으면서도 아쉽고 답답하기만 하다. 내려온 곳은 일주문에서 동화사로 가는 길인데 500m를 더 걸어 동화사 경내에 들어가 보니, 마침 법고(法鼓) 소리가 들려 다가서서 스님 네 분이 북 두드리는 광경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안으로 들어가 대웅전과 극락전 등을 보고 나와 통일대불까지 본 뒤, 이곳 5개의 보물 중 하나의 보물이라도 보아야 한다는 욕심으로 다시 걸어 나와 일주문 옆에 있는 마애불좌상(보물 제243호)과 마주했다. (계속)
* 폭포계곡의 물과 동화사 마애불좌상(보물 제24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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