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남팔경의 하나 ‘금오산’ 편
* 금오산 대혜폭포
▲ 온천호텔에서 피로를 풀고
식당에 도착한 일행은 우선 맥주와 동동주로 갈증을 풀고 식당 아저씨께 잠잘 곳을 얻어줄 것을 부탁했다. 두어 차례 전화를 걸더니, 온천호텔 방 2개를 12만원에 얻어주었다. 내일의 산행을 위해서는 우선 푹 쉬고 보자고 하여 동화사지구 팔공산온천관광호텔에서 짐을 풀고 온천탕 사우나에서 목욕을 하며 느긋하게 피로를 풀었다. 해발 500고지에서 분출되는 알칼리성 탄산염화나트륨 온천이라 했다.
온천으로서의 효과가 있는지는 몰라도 사우나는 비교적 넓고 깨끗했다. 한숨씩 주무시거나 운동을 하면서 쉰 일행은 8시쯤 되어 식당가로 나왔다. 보신탕 얘기를 하는 회원이 있었으나 물어본 즉 이곳은 불교 성지로서 그것은 팔지 않기로 했다는 것이다. 그러면 어제 백숙을 먹었으니 오늘은 오리로 먹자고 해서 고향식당이라는 상호에 매료되어 오리고기 한방구이와 버섯전골로 저녁만찬을 즐기고 노래방에 들렀다가 호텔로 들어가 11시에 잠을 청했다.
사실 이번에 팔공산을 오면서 이 동화사에 소속된 보물들을 다 찾아볼까 하는 생각을 하고 이곳에 이틀이나 묵을 계획을 세웠다. 그런데 당간지주와 동화사입구마애불좌상 밖에는 접할 수 없었다. 일행이 유적 답사 팀이 아니어서 관심도 덜하거니와 등산을 하고 온 뒤여서 동화사 경내를 둘러보기도 버거웠다. 그리고 그보다 더 큰 이유는 문제의 보물들이 멀리 떨어진 암자에 소재하기 때문이다.
금당암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보물 제248호 동화사 금당암 3층석탑이라든가, 비로암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보물 제247호 동화사 비로암 3층석탑, 통일신라시대의 석불좌상인 보물 제244호 동화사 비로암 석조비로자나불좌상, 하지만 동화사 비로암 석탑 안에서 발견된 사리함 금동선각사방불은 국립중앙박물관에 가 있으니 어찌 해볼 도리가 없다.
* 동화사에서 시내로 나오는 곳에 있는공산터널
▲ 기차를 타고 구미 금오산으로
셋째 날인 8월 12일 일요일. 8시에 출발하여 동화사 관광지구 식당에서 해장국으로 아침을 먹고 그곳을 출발하는 좌석버스를 타고 동대구역까지 갔다. 버스정류소에서 한 4~500m를 걸어 동대구역에 나가 기차를 타고 구미역까지 갔다. 거기 짐 보관 박스에 가방을 넣고 가볍게 대합실 국수를 한 그릇씩 먹었다. 매점에서 물과 간식거리를 사들고 택시 3대를 잡고 금오산 정문에 도착하니 3천원이 나온다.
금오산(金烏山)은 경상북도 구미시, 칠곡군 북삼면, 김천시 남면의 경계를 이루는데, 높이는 977m이다. 소백산맥의 지맥에 솟아 있으며, 산정부는 비교적 평탄하나 기암괴석이 조화를 이룬 급경사의 바위산이다. 본래는 대본산(大本山)이었으나, 중국의 오악(五岳) 가운데 하나인 숭산(崇山)에 비유해 남숭산(南崇山)이라 불렀다가 당의 대각국사에 의해 금오산으로 불리게 되었다.
산정에는 고려시대에 천연의 암벽을 이용해 축성한 길이 3.5㎞의 금오산성이 있으며, 임진왜란 때는 왜적을 막기 위한 내외성(內外城)으로도 이용되었다. 산 전체가 급경사를 이루며, 좁고 긴 계곡이 굽이굽이 형성되어 예로부터 명산으로 알려졌다. 또한 유서 깊은 문화유적이 많아 1970년 6월에 우리나라 최초의 도립공원으로 지정되었고, 면적은 37.9㎢이다.
이번에 금오산을 욕심내게 된 것은 대구에서 가까운 곳 중에 영남8경의 하나로 들어간다는 점과 최초의 도립공원이라는 점도 있었다. 하기야 박정희 대통령의 출신지여서 일찍이 도립공원으로 키우고 케이블카를 시설했다는 점 외에도 산 중턱에 폭포와 곳곳에 보물급의 유적이 산재해 있다는 것은 너무도 큰 매력이었다.
* 금오산 입구 회고가가 새겨진 바위와 채미정 입구
▲ 길재 선생을 기리기 위한 채미정
내려서 걸어 들어가는데 옆에 말로만 들었던 채미정(採薇亭)을 비롯한 일련의 건물들이 보이고, 앞에는 ‘오백 년 도읍지를 필마로 돌아드니/ 산천은 의구하되 인걸은 간데없다/ 어즈버 태평연월이 꿈이런가 하노라’라는 야은 길재(冶隱 吉再) 선생의 시조를 새긴 바위가 보인다. 참으로 감회가 어린데, 시간 관계상 자세히 들여다보지 못하는 게 아쉽다.
채미정(採薇亭)은 조선시대의 정자로 고려 말기의 충신이며 학자인 길재(吉再)의 충절과 학덕을 기리기 위하여 1768년(영조 44)에 건립한 정자다. 벽체가 없고 기둥만 16개로 된 정면 3칸, 측면 3칸의 건물로 중앙에 방 1칸을 만들고 사방을 마루로 하였다. 경내에는 숙종의 어필 오언시가 보존되어 있는 경모각(敬慕閣), 구인재(求仁齋)와 비각 등의 건물이 있다.
잘 아는 바와 같이 길재는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개국하자 태상박사(太常博士)의 관직을 받았으나 벼슬에 나가지 않고 고향에 돌아와 은거생활을 하면서 절의를 지켰다. 1419년(세종 1)에 별세하자 나라에서 충절(忠節)이라는 시호를 내렸는데, ‘채미(採薇)’는 고사리를 캔다는 뜻으로 주(周)나라의 곡식 먹기를 거부하고 수양산에 은거하여 고사리를 캐먹으며 은나라에 대한 충절을 지켰던 백이·숙제의 고사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 금오산 입구 시민헌장탑
▲ 케이블카를 타고 해운사까지
시간이 꽤 지나 있어 서둘러 케이블카를 타러 갔다. 3층으로 된 대합실은 새로 공사 중이었고 케이블카는 대인 왕복 5천원이다. 시간 관계상 왕복을 끊고 타러 갔더니 아주 오래된 차 두 대가 15분 간격으로 일몰시까지 오르내리고 있었다. 거리는 805m로 나와 있고 속도는 시속 18kmfh 해운사까지 5분이 소용된다. 팔공산 것보다 크고 여유가 있어 10명 모두 타고 주변을 보면서 올라갔다. 아래로 보이는 나무의 높이가 엄청나고 금오산성의 문도 보인다.
케이블카에서 내려 조심스럽게 밖으로 나가니 비가 산산이 내려 비옷으로 무장하는데 나는 갑갑할 것을 예상해서 우선 우산만 쓰고 나섰다. 이어지는 곳은 해운사(海雲寺)로 신라의 고승 도선(道詵)이 세웠다고 전해지며, 불기2992년에 봉안되었다는 칠성탱화가 유명하다. 기암절벽을 등지고 있어 경치도 뛰어나고 울창하고 오래된 나무가 있어 고색창연하다.
아무려면 어쩌랴 싶어 비를 맞으며 계속 진행해 나가다 오른쪽 도선굴로 가는 길을 외면하고 왼쪽으로 나아가 대혜폭포로 다가섰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와서 사진을 찍느라 야단이다. 얼마나 폭포가 긴지 카메라를 모로 세우지 않으면 화면 속에 다 잡을 수도 없다. 그러는 사이에 비는 가늘어지고 마냥 있을 수도 없어 할딱고개 비탈길을 뚜벅뚜벅 걸어 올랐다.
그래도 길이는 비교적 짧아 얼마 안가 다 오르니 거기에 사방을 둘러볼 수 있는 암반이 있다. 멀리 금오지가 시원히 내비치고 칼다봉 능선은 훤한데 정상인 현월봉은 구름과 안개에 가려져 있다. 여기서 물을 마시고 몸을 추슬러 걸음이 비교적 느린 회원들을 다독이며 비탈진 산길을 오른다. 어느 곳 한 곳 쉬운 곳도 없고, 안개에 싸였는데 이정표도 없어 어디가 어딘지 갑갑하기만 하다.
* 자연보호헌장탑 옆의 어린이상
▲ 두 시간 만에 정상에
비가 왔기 때문에 정상은 안개에 싸여 있고 그 안개가 비가 되어 나무에서 물방울만 뚝뚝 듣는다. 간혹 물봉선이 피어 답답하게 걸어가는 일행을 위로한다. 거의 능선 가까운 곳에 낙숫물을 받아먹는 음수대가 있어 잠시 쉬어 위로 오르는데, 마애보살입상이 있다는 표지판이 나온다. 맑은 날 같으면 가보자고 할 것을 정상도 갈지 말지 불분명한 터에 섣불리 가보자는 말도 못 꺼내보고 입구를 지나쳤다.
보물 제490호로 지정된 입상으로 금오산 최정상 아래 북쪽 암벽에 특이한 구도로 조각되었는데, 일선지에 의하면 이곳에 보봉사(普峰寺)가 있었다고 한다. 드디어 능선에 올라 길을 걷는데 아주 편하다. 칼다봉에서 줄곧 능선을 따라 올라왔다는 일행과 마주쳐 길을 물으니 조금 더 올라가 왼쪽으로 돌면 정상이라 한다. 힘을 내어 걸어 조금 더 가니 돌무더기가 양쪽에 쌓였는데 금오산성의 일부라 한다.
금오산성의 잔재는 여러 곳에 산재해 있다고 전했다. 이곳은 정상부에 위치한 내성(內城)으로 영남 보장(保障)의 요충지였던 곳으로 석축 둘레가 7,644자, 높이가 7자, 무성절벽이 661보(步)이며, 성안에 7개의 못과 한 곳의 시냇물, 8개의 우물이 있었다고 한다. 앞으로 남은 길은 0.6km. 왼쪽으로 돌아 비탈길을 오르는데 바위가 많아서인지 너무 패이고 어지럽다. 비탈도 심하여 미끄러지기 십상이다.
힘을 내어 오르니 왼쪽 아래로 약사암 문이 보인다. 그러나 오다가 들르기로 하고 오른쪽 능선으로 오르니 바로 정상. 달이 걸리는 봉우리라는 뜻의 현월봉(懸月峯)이라 새긴 비석이 비를 맞고 서있다. 높이는 976m라 새겼다. 그러나 이곳에도 방송국 안테나가 커다랗게 점령했다. 그 옛날 건설이면 무엇이든 용서되는 시절에 마구 세워 이제는 주인인 양 의젓하게 폼 잡고 있다. 시계를 보니 두 시간에 오른 셈이다.
* 금오산 정상 현월봉 표석(위)과 그 옆에서의 기념촬영(아래)
▲ 사진을 찍고 하산하다
먼저 비석을 찍고 먼저 올라온 다섯 명 중 네 명이 기념사진을 찍었다. 5명이 뒤에 떨어져 있어 언제 올라올지 모르니 그곳에서 기다리기로 하고 남은 술로 정상주를 대신했다. 추워하는 여회원들은 미리 암자에 가 있기로 하고 기다리는데 법성사로 올라왔다며 30대로 보이는 건장한 청년이 올라왔다. 사진을 찍는 동안 나머지 인원도 다 올라왔다. 전화도 안 통하고 황경연수원으로 가는 길로 가다가 돌아왔다고 한다.
시간도 없고 마애보살상은 포기하기로 하고 약사암 입구 바위로 돌아와 복숭아를 깎아 몇 조각씩 먹고 힘을 내어 내려가기로 하였다. 내리는 길 역시 미끄러지기 쉬워 천천히 돌아서 내린다. 아직도 안개가 걷히질 않아 어디 바라볼 곳도 없고 곧장 발밑만 살피며 걸으니 왔던 길이어서 제법 속도가 붙는다. 앞서 간 이들은 할딱고개 위 바위에서 쉬고 있었다.
마지막 부대가 도착하자 남은 술을 내놓고 마셨다. 안개는 조금 걷혔으나 여전히 금오산 정상은 얼굴 내밀기를 거부한다. 이번에는 인연이 아닌가 보다. 이제야 천천히 오르는 분들도 있다. 그저 케이블카 타고 올라와 갈 수 있는 데까지 가다가 힘들면 내려오는가 보다. 서울서 왔다는 일행과 술을 나누며 담소를 하였다. 그리고는 이 번 산행은 팔공산을 제대로 본 것으로 만족하기로 하고 천천히 걸어 내려왔다.
할딱고개도 내려올 때는 수월하다. 그렇게 길지 않아 곧 대혜폭포에 도달할 수 있었다. 그곳에는 아직도 꽤 많은 인원이 사진을 찍으며 폭포를 즐기고 있다. 다시 언제 볼지 모르는 아쉬움에 찬찬히 보며 셔터를 누르고 해운사에 내려와 보니, 먼저 온 일행이 기다리고 있다가 1시간 걸렸다고 한다. 야은(冶隱) 선생이 수도했다는 도선굴이 바로 폭포 옆에 있었으나 시간을 핑계로 그냥 케이블카를 타고 내려왔다.
* 금오산 정상에 있는 약사암으로 가는 동국제일문(위)과 금오산성 내성의 자취(아래)
▲ 돌아오는 길
케이블카에서 휴대폰에 메시지가 와서 켜보았더니 아시아나항공에서 제주항공 기체 사고로 비행기가 7시에서 7시 45분 출발로 45분 늦어진다는 내용이다. 택시로 갈 때 얼핏 제주항공 사고 소식은 들었으나 어찌된 일인지 그 항공기는 도무지 안심이 안 된다. 올라오는 차가 얼마 없어 매표소를 지나 시내로 내려가는 세 갈래 길에 내려가 택시를 잡고 구미역으로 갔다. 우리가 탄 개인택시 기사도 금오산에서 돌아오는 길이라 했다.
구미역에서 차표를 끊는데 좌석이 없다고 한다. 중간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 그냥 빠른 입석으로 끊고 짐을 찾아 탔다. 차량에 분산해서 빈 자리를 찾자고 했는데, 조금 앉으면 주인이 다시 타고 하면서 그도 용이치 않다. 예민한 사람이 우리에게 땀내가 나는지 꺼리는 것 같아 조금 피해 기대서서 동대구역까지 갔다. 다시 비행기가 20분이 늦어진다는 연락이 와서 전화를 걸었더니 더 이상 지연은 없다고 한다.
시간은 많이 남고 제주 도착은 늦어져 제주에 가서 회를 먹으며 뒤풀이를 하기로 한 것을 여기서 저녁을 먹고 제주에 가면 밤이 깊을 것이니 그냥 해산하자고 해서 동대구역에 내려 마땅한 식당을 찾았다. 일행 중 아구찜을 희망하는 회원이 있어 바로 아래를 내다보니 한양식당이라고 아구찜과 여러 가지를 하는 식당이다. 아구찜과 지리를 시켜 술과 함께 먹으며 여행에 대한 회포를 풀었다.
택시를 타고 3천원이 나오는 공항까지 가보니, 처형님이 조카와 함께 나와 있다. 식사 한 번 시켜 주지도 못해 미안타고 하면서 2층에 가서 차를 마시잔다. 이번에 여러 가지로 폐를 끼치게 되어 미안하나 한 번은 거쳐야 할 일이라 생각하고, 저녁 때 팥빙수 얘기가 있어 그것을 시켜 전회원이 먹었다. 미안스럽게도 내 갈아입을 옷까지 사온 처형의 마음 씀에 그만 손을 들어버린다. 8시10분 드디어 대구공항을 출발 9시에 제주에 도착 해산하며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 금오산에 도착했을 때 올려다 본 칼다봉 능선
▲ 후기(後記)
이번에 다녀온 팔공산 행사는 중국 시안(西安)과 화산(華山)에 다녀온 지 나흘 쉬고 다시 시작된 행사였다. 여행에 익숙한 나야 걱정이 없지만 구성원이 구성원인지라 연 사흘 산을 탄다는 것은 무리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평 없이 믿고 따라준 회원들에게 감사드린다. 김창집 김동한 곽재근 강의길 황태문 김경복 김양순 양순열 김정림 김승이. 어쩌다 보니 구성이 딱 10명 단위에다 남녀 비율이 같았다.
이번 여행은 당초에 차를 빌리려다 너무 비쌀뿐더러 크게 필요하지 않겠기에 그대로 진행하다보니, 주변 먹고 싶은 것은 다 먹은 셈인데도 돈이 좀 많이 남아 임시총회 명목으로 전 회원을 소집하여 8월 28일 소라횟집에서 뒤풀이 행사를 했다. 이날 행사를 돌아보며 반성과 개선점을 적어보면, ① 다음부터는 너무 등산 위주로 하지 말고 이틀 정도 가벼운 등산에 하루는 그 주변 유적답사를 하는 것이 좋겠음.
② 다음 행사시에는 차량 관계는 더 알아보고 알맞은 방법을 채택하는 것이 좋겠음. ③ 시기도 총회에서 정해서 많은 회원이 축제처럼 갈 수 있도록 하고 그 경우 예산에서 행사비를 책정하여 집행함으로써 개인 부담을 덜었으면 더 많이 참여하지 않을까? ④ 여행 중 총무와 진행, 의무 등 직책을 주어 규모 있게 운영하도록 함. ⑤ 그 외 장소도 미리 의논을 해서 정하도록 함.
끝으로 이번 행사에 많은 심려를 끼치며 도와주신 처형님 내외분과 조카사위 구 서방, 조카 봉준이에게 감사드린다. 참 조카 봉희도 남편 챙기느라 수고가 많았다. 보내준 수박과 청사과는 아주 맛있게 먹었다. 끝으로 우리를 태워다주고 짐을 실어다 주는가 하면 이틀 동안 수소문하여 방을 빌어준 동화사 팔육식당 조순호 사장님께도 고맙단 말을 전한다. 아무튼 모두가 흐뭇하고 무엇인가 하나씩 얻었다는데 보람을 느낀다. (완)
* 올 때 딱고개 위에서 본 안개에가려진 정상 부분
♬ 돌아오라 소렌토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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