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립중앙박물관 고고관을 보고 나서 (완)
* 발해의 첫번째 수도 동모산의 유적(출처 : 다음 불로그 - 문화유적 찾아보기)
▲ 해동성국으로 일컬어지던 발해(渤海)
발해는 중국 둥베이[東北] 지방 동부·연해주·한반도 북부에 있던 나라(698∼926년)로 발해에 관한 기록은 '구당서(舊唐書)' 발해 말갈전과 '신당서(新唐書)' 발해전에 전하는데, '구당서(舊唐書)'에는 대조영을 고구려 별종이라고, '신당서(新唐書)'에는 말갈의 나라라고 기록했다. 그리하여 고려와 조선시대에는 발해를 신라와 이웃한 나라로 여겼을 뿐 한국사에 포함시키지 않았다. 조선 후기에 실학자 유득공(柳得恭)이 발해사를 우리 역사라고 주장한 이래 그것을 한국사에 포함시키는 것을 당연시하였다.
최근에는 통일신라와 발해가 병존한 시기를 남북국시대라고 한다. 668년 신라와 연합하여 고구려를 멸망시킨 당나라는 고구려 유민 2만 8000여 가호를 중국 땅으로 강제 이주시켰는데, 이때 발해를 건국한 대조영(大祚榮:뒤의 고왕)도 그의 아버지 걸걸중상(乞乞仲象)과 함께 요서지방의 영주(營州:조양)로 옮겼다.
당시 영주는 당이 북동방의 이민족을 제어하기 위한 전진기지로 운영한 전략도시였다. 이곳에는 고구려 유민을 비롯하여 말갈인·거란인 등 다수 민족이 집결되어 있었다. 이들은 당이 약화되면 언제든지 반란을 일으킬 수 있는 상태였다. 696년 5월 마침내 거란인 이진충(李盡忠)과 손만영(孫萬榮)이 영주도독(營州都督) 조홰(趙?)의 통치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켰다.
* 정효공주의 무덤 내부의 벽화(출처 : 다음 불로그 - 문화유적 찾아보기)
이 틈을 타서 대조영은 고구려유민·말갈인과 함께 영주를 빠져나와 만주 동부지역으로 이동하였다. 대조영은 추격해오는 당군을 천문령(天門嶺)싸움에서 크게 무찌른 뒤에 만주 동부지방에 남아 있던 고구려유민과 말갈인을 규합하여, 698년 길림성 돈화현(敦化縣) 부근의 동모산(東牟山:육정산) 기슭에 진국(震國:振國)을 세웠다.
현재 남아 있는 오동산성(敖東山城)과 성산자산성(城山子山城)이 바로 그 유적지이다. 당은 발해의 건국이 기정사실이 되고, 게다가 요서지역에 대한 돌궐(突厥)·거란·해(奚) 등의 압력으로 요하유역과 만주일대에 대한 지배가 사실상 어려워지자, 705년 사신을 보내 발해의 건국을 인정하였다. 더구나 713년에는 대조영에게 발해군공(渤海郡公)이라는 관작을 수여하였는데, 이로부터 나라이름을 발해로 바꾸었다. ('네이버 백과'에서 발췌)
* 육정선고분군 앞 비석(출처 : 다음 불로그 - 문화유적 찾아보기)
▲ 발해실
발해(698-926년)는 대조영(大祚榮)이 고구려 유민들을 모아 만주 동모산(東牟山) 일대에 세운 나라이다. 전성기의 발해는 대동강 이북의 한반도 북부 지역, 중국의 랴오닝 성(遼寧省), 지린 성(吉林省), 헤이룽장 성(黑龍江省)과 러시아의 연해주 일대에 이르는 넓은 영토를 차지하였다. 중국에서 '바다 동쪽의 융성한 나라(海東盛國)'로 칭송할 정도로 수준 높은 문화를 이루었으며, 선진 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각종 제도를 정비하였다.
발해는 넓은 영토를 효과적으로 다스리기 위하여 5경을 두었고, 여러 차례 수도를 옮겼다. 도성인 상경·중경·동경에서는 잘 지어진 궁전 건축물과 화려하게 장식된 기와, 벽돌, 용머리, 토기, 무기, 각종 불상 등이 출토되어 발해 사람들의 높은 문화 수준을 보여주고 있다. 발해는 당나라와 신라는 물론 일본과도 활발하게 교류하면서 발전하였다. 발해는 멸망한 후에도 유민들 중 일부가 고려로 들어와 우리 민족사에서 그 맥을 이어 갔다. (* 사진을 찍을 수 없는 박물관의 형편상 지금부터 나오는 내용과 사진 모두 '국립중앙박물관 홈'에서 뽑았습니다.)
▲ 용머리(石製龍頭)
건물 기단에 끼워 넣어 장식하였던 것으로, 벽면에 튼튼하게 끼워질 수 있도록 뒷부분을 쐐기 모양으로 길게 깎아내고 고정하기 위한 홈을 팠다. 상경성을 비롯한 발해의 도성(都城)에서 몇 개가 출토되었지만 형태와 조각 기법은 모두 같다. 귀밑까지 찢어진 입, 날카로운 이빨, 툭 튀어나온 두 눈, 머리에서 귀 뒷부분까지 이어진 갈퀴 등이 어떤 악귀(惡鬼)도 얼씬하지 못할 상서로운 용의 모습이다.
▲ 짐승얼굴기와(怪獸面瓦)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듯 부리부리한 눈, 크게 벌린 입에 날카롭게 튀어나온 송곳니와 길게 내민 혀, 벌름거리는 코 등 사납고 험상궂은 짐승 얼굴을 형상화하였다. 여기에 짙푸른 녹색 유약까지 입혀져 더욱 기괴한 인상을 주고 있다.
△ 발해기와(渤海瓦當)
수키와, 암키와, 막새기와, 치미 등 고대 건축물에 사용된 기와는 모두 갖추고 있다. 그 중에서 녹색의 유약을 발라 구운 기와가 사용된 것을 보면, 녹색으로 물들여진 발해 기와 지붕의 화려함을 짐작할 수 있다. 특히 연꽃무늬 막새기와는 문양과 제작 기법에 있어 고구려 문화를 고스란히 이어받았음을 말해준다.
▲ 말 탄 인물상(靑銅騎馬人物像)
말을 타고 있는 사람의 모습을 간결하게 표현하였다. 말 등에는 구멍이 뚫려 있어 본래 끈을 꿰어 매달고 다녔음을 알 수 있다. 발해의 수도였던 상경 용천부에서 출토되었다.
△ 글씨가 있는 불비상('咸和四年' 銘佛碑像)
아미타불을 중심으로 가르침을 듣는 승려와 보살(관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이 새겨져 있다. 위에는 용으로 보이는 동물 2마리가, 아래에는 글씨[銘文]와 인왕상이 각각 새겨져 있다. 글씨는 함화 4년(834) 발해 허왕부(許王府)의 관리였던 조문휴(趙文休)의 어머니가 모든 불제자들을 위해 만들었다는 내용이다. 이를 통해 발해에서 '함화(咸和)'라는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였으며, 허왕(許王)이 관할하던 관청이 있었고, 그 허황 위에 발해 황제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 부처(二佛竝坐像)
석가와 다보 두 여래상이 나란히 앉은 모습을 표현한 이불병좌상(二佛竝坐像)이다. 광배에는 연꽃을 통하여 다시 태어나는 동자상(童子像) 5구를 돋을새김 하였다. 이 연화화생상은 이 세상에서 ‘좋은 일을 하면 극락간다.’는 아미타신앙이 반영된 것이다. 발해 팔련성(八連城) 제2사지에서 출토되었다.
* 연해주 발해 주거유적 시굴조사 광경(출처 : 다음 불로그 -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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