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탐문회 강원남부 답사기(1)
* 소나무가 아름다운 장릉 전경
♧ 1년 반 만에 떠나는 뭍 나들이
제주시가 주민 평생교육 차원에서 인기리에 개설하고 있는 박물관대학 수료자들로 구성된 사단법인 탐라문화보존회에서는 1년에 두 번 섬 밖으로 답사 여행을 떠난다. 한 번은 국내답사이고, 한번은 해외답사이다. 재작년 여름, 북한의 문화재가 새로 지은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전시될 무렵에 서울을 중심으로 한 문화재 답사를 떠났었고, 작년 여름에는 이번 해외답사와 바꿔 중국의 고도(古都) 시안(西安)에 다녀왔다.
2008. 2. 22. 금 9:30. 우리 답사반 일행 36명을 태운 아시아나 OZ8232편 항공기는 청주공항을 향해 국립제주공항의 활주로를 떠났다. 언제나 그렇듯 여행은 우리에게 활력을 주고 미지의 세계에 대한 설렘으로 조금쯤은 흥분하게 마련이다. 머릿속이 지끈지끈 하도록 복잡한 속세의 일을 잠시 놓아두고 여행만 즐기리라 다짐을 하면서, 안내자로서 앞으로 행해야 할 프로그램을 머릿속에 그린다.
* 장릉 앞 세거리에서 내방객을 인도하는 사슴 가족
일부는 창 너머로 흐르는 구름이나 옅은 안개로 가린 땅 위의 모습을 보고, 더러는 그 동안 못 본 신문을 들추는가 하면, 배부된 자료를 찬찬히 훑기도 한다. 제주에서의 뭍 나들이가 힘든 이유는 바다가 가로막고 있기 때문이다. 개인 스케줄에 얽혀 여러 날 집을 비우는 일이 뜻대로 안돼 배를 타고 며칠 나오는 것이 허용 안 되고 보면 단체 좌석 잡기도 어렵고 항공료 부담 또한 만만치 않다.
1시간 만에 당도한 청주공항은 조용하고 아늑한 것이 마음에 든다. 문을 열고 나가자 바로 대형 관광버스가 대기하고 있어 모두 타고 인원을 점검한 후 강원도 영월 땅을 향해 출발했다. 1시간 40분 정도가 소요된다고 하여 그 동안에 마이크를 돌려가며, 자신의 소개와 이 번 여행에 기대되는 바를 말하라 하였더니, 대부분 오대산과 마지막 날에 있을 부석사, 소수서원 등이 기대된다고 했다.
* 제일 먼저 들른 선돌이 있는 풍경
♧ 맨 처음 찾은 영월의 선돌
30분 정도를 남기고 영월의 문화재를 소개했다. 먼저 왕방연이 수양대군의 명령에 따라 어린 단종 임금을 이곳 영월에 유배시키고 가면서 떨어지지 않은 발길을 옮기며 지었다는 시조부터 무게를 잡고 낭송했다. ‘천만 리 머나먼 길에 고운 임 여의옵고/ 이 마음 둘 데 없어 냇가에 앉았으니/ 저 물도 내 안 같아야 울어 밤길 예놋다.’ 권력이 무엇이길래 형제, 삼촌 조카 사이를 가르고 피비린내를 풍겼단 말인가?
요즘 인기리에 방송되고 있는 정조가 임금이 되는 과정을 다룬 ‘이산’과 막강한 힘을 가진 양녕대군을 물리치고 왕위에 오르는 과정을 다룬 ‘대왕세종’을 예로 들면서 당시의 상황을 얘기했다. 답사에 참가한 어른들 중에는 책도 많이 읽고 아는 것이 많기 때문에 백과사전 수준의 자료를 만들어 드리고, 이번에 살펴야 할 핵심 내용을 말해준 뒤, 나머지는 보면서 공부하도록 유도하는 것이 나의 안내 방식이다.
* 조촐한 장릉의 모습
이곳에는 버섯이나 나물 음식이 대종이기 때문에 장릉 앞에 있는 기사식당에 버섯전골을 시켰는데, 우리가 도착해보니까 아직 음식이 준비되지 않아 막간을 이용해 가까이에 있는 선돌로 갔다. 박 기사의 소개로 가면서 나는 선사유적인 ‘선돌’인줄 알았더니, 가본 즉 그게 아니었다. 서강(西江)에 자리 잡은 기다란 바위였다. 산책로를 나무로 만들어놓았고, 작은 공간이지만 오밀조밀했다.
간판에는 ‘기암괴석이 비경(높이 약 70m)으로 층암절벽과 서강의 푸른 물이 어우러져 한 폭의 동양화를 연상케 한다. 순조(1820) 때 영월부사를 지낸 홍이간(洪履簡)이 새겨놓은 운장벽(雲莊壁)이라는 글귀가 남아 있다.’라 씌어 있다. 아래로 맑은 물을 내려다보며 맑은 공기를 한껏 마시고 나서 단체 사진을 찍었다. 나오면서 자세히 보았더니 유지태와 김지수가 주연했던 영화 ‘가을로’ 촬영지라는 간판도 보인다.
* 명당으로 알려진 장릉에서 내려다 본 풍경
♧ 명당으로 알려진 장릉(莊陵)
차례로 따지면 청령포 다음에 장릉을 찾아야 하는데, 밥 먹은 곳이 장릉 앞이어서 그곳을 먼저 들렀다. 그곳 삼거리에 세워놓은 사슴 가족이 상큼하고 옆 수양버들은 푸른빛이 돌며 봄을 기다리고 있었다. ‘장릉’이라는 이름은 세 군데나 있다. 한자만 다른데, 경기 김포시에 있는 사적 제202호 장릉(章陵)은 인종의 아버지인 원종과 인헌왕후의 능이고, 경기 파주시에 있는 사적 203호 장릉(長陵)은 인조와 인열왕후의 능이다.
장릉(莊陵)은 조선 제6대 단종의 능으로 사적 제196호로 지정되었으며, 영월읍 영흥12리 1086번지에 자리하고 있다. 숙부인 수양대군(세조)에게 왕의 자리를 찬탈당하고, 청령포에 유배된 단종이 17세 되던 해에 죽임을 당하여, 그 주검이 강물에 띄워져 아무도 거두는 이가 없자, 당시 그곳의 호장(戶長)이었던 엄흥도가 죽음을 무릅쓰고 이곳에 암장한 것이다.
* 장릉에서 내려가는 길
* 장릉의 제각과 여러 건물들
밤중에 시신을 거둔 그는 아무도 몰래 산속으로 들어가다가 노루 한 마리가 앉아 있는 것을 보고, 그곳을 파서 묻었다. 떳떳하지 않은 일이기에 터를 고를 겨를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풍수지리 하는 분들이 말에 따르면 모두들 이곳이 천하 명당이라고 한다. 들어서서 오른 쪽 능선을 따라 아름다운 적송(赤松)이 우거진 사이로 올라가자 탁 트인 곳이 나타나고 위로 장릉이 보인다.
그 후 숙종 때인 1698년에 와서야 단종(端宗)이 왕으로 복권되고 단종이 암장된 곳을 찾아내어 왕릉으로 정비하였다. 다 올라가 내려다본즉 무인석(武人石)이 없이 간단한 구조로 이루어져 있었고, 아래쪽으로 눈을 돌리자 정말 모르는 소견에도 명당의 느낌이 들었다. 천천히 걸어 내려와 정자각을 비롯한 단종비각, 배식단사, 재실, 영천, 홍살문 등을 보며 한이 서린 장릉을 나왔다. 해마다 한식제, 1967년부터는 단종제를 거행하고 있다 한다.
♧ 지금은 영월8경이 된 청령포
일정이 빡빡하여 서둘러 청령포로 향한다. 청령포(淸水+令浦)는 강원도기념물 제5호로 영월군 남면 광천리 67-1외 3필지에 자리한 사적지이다. 단종(端宗)이 세조 2년(1456)에 노산군으로 낮추어져 처음 유배되었던 곳으로, 삼면이 깊은 강물로 둘러싸이고, 한쪽은 험준한 절벽으로 가로막혀 있어 배로 강을 건너지 않으면 어디로도 나갈 수 없게 되어 있는 곳이다.
현지에 도착하여 차에서 내려 매표를 하는데 문화유산 해설사를 찾아보라 한다. 가서 해설사를 모시고 배에 오른다. 얼음이 풀리고 있는 맑은 강물 위에는 판옥선 같은 배 2척이 떠 있다. 강물의 폭은 그리 넓지 않으나 다리를 놓은 것보다는 환경보전에 퍽 도움이 되리라 여겨졌다. 배 안은 철재로 되어 있고 줄이 매어져 있었는데도 모터를 달아 운행하고 있다. 때를 보아 해설사를 소개하고 바로 내렸다.
* 단묘유지비 앞에서 열심히 설명해주시는 해설사
소나무가 울창하고 서강(西江)의 물이 맑아 예로부터 ‘영월 8경’의 하나로 손꼽히는 명소로 변해 있어, 가슴 아픈 과거사는 풍광 속에 묻혀버리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래된 금강송 숲으로 걸어가며 옛일을 떠올려본다. 단종이 유배되었던 해 여름, 홍수로 청령포가 휩쓸려버리자, 단종은 영월읍 영흥리에 있는 관풍헌으로 옮겨졌다. 조정에서는 영조 2년(1726)에 일반인의 출입을 제한하기 위하여 금표비(禁標碑)를 세웠다.
영조 39년(1763)에는 단종이 기거하던 곳을 의미하는 ‘단묘재본(端廟在本) 부시유지(府時遺止)’라는 비문을 새긴 비를 세웠다. 해설사는 옛 건물 주변에서 우리 일행을 모아놓고 가슴 아픈 과거사와 역사를 들추며 우리들의 가슴을 울렸다. 복원된 유배 건물을 향하여 절을 올리는 소나무도 몇 그루 보인다. 지금은 강원도 기념물 제5호로 변해버린 청령포에서 단종애사 이야기는 그칠 줄 몰랐다.
* 청령포 소나무 숲에서 해설을 경청하는 답사반원들
♧ 애사(哀史)의 주인공 단종(端宗)
단종(端宗, 노산군)은 1441년 7월(세종23년) 문종과 현덕왕후 권씨 사이에서 원자로 태어났으며, 이름은 홍위(弘暐)이다. 8살이 되던 해인 1448년(세종30년)에 왕세손에 책봉되었고, 예문관대제학 윤상(尹祥)으로부터 학문을 배웠다. 1450년 2월에 세종이 승하하고 문종이 즉위하게 되자 왕세손이었던 홍위는 10세의 나이로 왕세자로 책봉되었으며, 1452년 5월18일 문종이 승하한 후 12세의 어린 나이로 조선 제6대 왕으로 즉위하였다.
죽기 전 문종은 자신이 몸이 약하기 때문에 황보인(皇甫仁), 김종서(金宗瑞) 등에게 나이 어린 세자의 보필을 부탁했고, 집현전 학사인 성삼문, 박팽년, 신숙주 등에게도 좌우에서 힘을 모아 도와주라는 유언을 했다. 그러나 1453년 숙부 수양대군이 권람(權擥), 한명회(韓明澮) 등과 함께 황보인과 김종서 등을 제거하고 모든 권리를 장악하자 단종은 단지 이름뿐인 왕이 되었다.
* 단종의 슬픈 사연을 지켜보았다는 관음송
1455년 단종은 한명회, 권람 등의 강요에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上王)이 되었다. 1456년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이개, 유응부, 유성원 등이 단종 복위를 도모하다 처형된 뒤, 1457년 상왕에서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등되어 강원도 영월로 유배되었다. 그해 9월 경상도 순흥에 유배되었던 숙부 금성대군(錦城大君)이 다시 단종의 복위를 계획하다가 발각되자, 노산군에서 서인(庶人)으로 강등되었고 10월에는 사약을 받고 죽었다.
재위 기간 중에도 1453년 양성지(梁誠之)에게 ‘조선도도(朝鮮都圖)’, ‘팔도각도(八道各圖)’를 편찬하게 하고, 이듬해에는 ‘황극치평도(皇極治平圖)’를 간행하게 했다. 1454년에 ‘고려사’를 만들었으며, 각 도에 둔전(屯田)을 설치하도록 명령했다. 1681년(숙종7) 노산대군으로 강봉되었다가, 1698년 복위되어 묘호를 단종으로 추증하고, 능호를 장릉(莊陵)이라 했다.
* 소나무 아래서 열강중인 해설사
♧ 영월 땅을 떠나면서
우리는 아름다운 소나무 숲을 돌아다니며 단종어가는 물론 단묘유지비, 금표비, 왕방연 시조비 등을 돌아 천연기념물 제349호로 지정된 600년 된 관음송을 돌아보았다. 관음송은 생멸하는 물체로서는 유일하게 단종의 유배를 지켜본 존재이다. 그래서 그 슬픔을 지켜보았다고 관(觀), 하염없이 단종의 오열을 들었으니 음(音)이라는 뜻으로 관음송(觀音松)인 것이다. 두 가닥으로 되어 있는 나무를 바라보다 노산대에 올라 단종이 그리던 한양 땅과 왕비를 생각했다.
예정에는 영월시내에 자리한 관풍헌(觀風軒)을 찾아보게 돼 있었지만 갈 길이 바빠 그곳에 가지 못한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며 오대산으로 향했다. 관풍헌은 조선 초기의 동헌 터로 청령포에 홍수가 터져 단종이 이곳으로 거처를 옮겼다가, 이듬해(1457년) 세조가 보낸 사약을 받고 죽은 곳이다. 관풍헌은 영월 객사의 동헌(東軒) 건물로 영월읍 중앙로에서 동강1교 방향으로 약 700m지점에 위치하고 있으며, 태조 1년(1392)에 객사와 함께 건립되었다.
* 청령포의 소나무들
지금은 신라 문무왕 8년에 의상대사가 창건했다고 전해지는 보덕사의 포교당으로 쓰이고 있다. 관풍헌 동쪽에 작은 누각이 있는데, 어린 단종이 피를 토하며 울었다는 자규(子規, 소쩍새)의 한을 담은 시를 읊었다고 하여 자규루(子規樓)라고 불린다. 차 안에서는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사육신이나 단종의 죽음에 대한 의견과 역사의 편린을 찾아 얘기가 오래도록 유지된다.
영월 땅에는 선사시대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했는데, 삼국시대에는 백제, 고구려, 신라 삼국이 치열한 힘 대결을 벌였고, 고려 때에 이르러 ‘편안히 넘어가는 곳이라는 뜻인 영월(寧越)’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본래는 충청 땅이었으나 조선초 정종 원년(1399년)에 강원도에 속하게 되었다. 백운산, 두위봉, 태화산, 운봉, 구룡산 등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이들 산 사이에 흘러나오는 주천강, 평창강, 하동천이 굽이도는 영월 땅을 지나고 보니, 어느덧 ‘메밀꽃 필 무렵’의 무대가 되는 평창으로 넘어서고 있었다. (계속)
* 금표비 앞에서 설명을 듣는 답사반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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