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해외 나들이

진시황제 지하대군단(상)

김창집 2007. 12. 18. 23:52

 -- 중국의 천년고도 시안 답사기 (7)

 

 * 제1호 병마용갱을 덮어 만든 건물로 들어가는 문

 

♣ 병마용 보러 시안에 왔다는 분들이 많아


 공항에서 내려 호텔로 가는 도중 시간 여유가 있어, 같이 여행하는 사람들끼리 서로 자기소개도 하고 인사도 나누며 여행에 동참하게 된 동기, 또는 보고 싶은 것을 얘기하는 시간을 가졌는데, 의외로 진시황제의 무덤과 병마용을 드는 사람이 많았다. 진시황릉을 보고 난 후 우리는 세계적으로 알려져 있는 세계문화유산이기기도 한 병마용총(兵馬俑塚)과 옆에 있는 박물관으로 갔다.  

 

 병마용(兵馬俑)은 흙으로 빚어 구운 병사(兵士)와 말(馬)을 가리킨다. 옛날에는 주인이 죽으면 그가 부리던 종과 말을 같이 묻는 순장(殉葬) 풍습이 있었다. 순장은 사회가 지배층과 피지배층으로 나뉜 뒤 고대 초기에 널리 유행한 장례풍속이었다. 고대 오리엔트 지방이나 초기 그리스 사회 및 중국, 일본을 비롯해 우리나라에서도 행해졌다.

 

 오리엔트 지방의 경우 유프라테스 강 유역의 우르(Ur) 유적 무덤에서 순장사실이 다수 확인되었고, 초기 그리스의 경우도 호머의 ‘일리아스’에 묘사된 바와 같이 노예가 개와 함께 화장될 수 있었다는 점에서 그러한 풍속이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중국의 경우는 주로 은나라 때 성행하기 시작하여 수십 명에서 수백 명을 순장시킨 무덤들이 다수 발견되었다.

 

 

 

  * 제1호 병마용갱 속에 복원 재생해 놓은 병마용들의 모습(1)

 

 당시의 우주관은 사람이 죽으면 저 세상에서도 이 세상처럼 사는 것으로 믿었다. 그러기 때문에 저 세상에서 가서 살 집(유택, 幽宅)과 부릴 종이나 말, 가구 등을 같이 묻었던 것이다. 중국을 통일한 최초의 황제인 진시황도 살아서 아방궁을 지어 호화로운 생활을 하는 한편으로 미리 저 세상에서 황제로 살아갈 땅속의 궁전을 36년(?)에 걸쳐 지었는데, 이것이 바로 우리가 보았던 진시황릉인 것이다.

 

 그런데 능을 계획하며 가만히 생각해 보니 저 세상에 가서도 걱정이 되는 일이 있었다. 전쟁터에서 무자비하게 죽인 적국의 왕과 병사들의 보복이 두려웠던 것이다. 그래서 북동쪽에서 쳐들어올 여섯 나라(한, 위, 조, 연, 제, 초)의 오랑캐를 막을 요량으로 1.5㎞ 떨어진 이곳에 진을 치고 병사들을 매복 시켜놓은 꼴이다.

 

 분서갱유(焚書坑儒)할 때는 460명의 학자를 생매장하기도 했지만 자신과 같이 피를 흘리며 싸웠고 자신을 지켜주던 병사와 말은 그대로 묻을 수 없어 그들과 꼭 같은 크기로 만든 토용(土俑)을 대신 묻어 놓은 것이다. 실제로 제나라 국토였던 저 산둥성의 치박 같은 곳에 가보면 수많은 말을 죽 세워놓고 그대로 묻어 놓은 곳을 발굴한 현장이 두 군데나 있다.     

 

 

  * 제1호 병마용갱 속에 복원 재생해 놓은 병마용들의 모습(2)

 

♧ 처음 농부가 발견, 발굴 팀도 잘 몰라


 1974년 3월 29일, 산시성 린퉁현에서는 봄 가뭄에 대비해 우물을 파고 있었다. 4m 정도 파 들어갔을 때 농부의 곡괭이에 딱딱한 것이 부딪쳐 돌인가 하여 파내어보니 커다란 사람 모양의 조각상이었다. 다시 조심스럽게 파내려가니 부서진 도용(陶俑) 조각과 청동 화살·창·쇠뇌(석궁)의 촉 등이었다. 파고 또 파도 끝없이 나타나자 소문이 퍼졌고 때마침 고향을 찾은 신화사 통신 기자 린안인의 눈에 띄어, ‘인민일보’를 통해 마오쩌둥에게도 보고 되었다.

 

 드디어 위안중은 1974년 7월 15일에 산시성 고고학 발굴팀을 이끌고 용갱(俑坑, 도용이 묻힌 땅굴)을 발굴하기 시작했다. 지하군단 군사들은 4.6∼6m 깊이의 땅속에서 벽돌 바닥 위에 줄지어 서있었다. 병사들만 서있는 보병 대열, 전차와 병사가 함께한 기병 대열이 규칙적으로 섞여 있었다. 말 4마리가 끄는 전차에는 병사가 3∼4명씩 타고 있고, 그 뒤에는 보병이 12명씩 서있었다.

 

 1주일이 지나도록 발굴팀은 이 용갱이 어느 시대, 어느 유적인지 알 수 없었다.이곳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진시황릉이 있어 그와 관련된 유물일 것이라는 짐작은 했지만 도무지 그 근거가 될만한 것이 나오지 않았다. 발굴을 시작한지 2주째로 접어들던 날 마침내 확실한 증거물이 나왔다. ‘여불위가 승상이 되고 나서 3년째에 만들었다’는 글이 새겨진 구리 극(戟)이 발견된 것이다.

 

 여불위는 진시황의 아버지로 전해진다. 발굴 팀은 그 규모가 어느 정도인지 도저히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한 백발노인이 홀연히 나타나 가르쳐 준 대로 우물 파던 곳에서 서쪽으로 200m 떨어진 곳을 파도록 했다. 노인이 가르쳐 준 곳을 팠더니 바로 용갱의 가장자리였다. 그 규모를 대충 짐작한 발굴 팀은 기록을 뒤지는 한 편 인원을 늘려 작업을 계속한 끝에 1975년 7월21일 신화사 통신이 마침내 ‘진시황릉 병마용갱’ 발굴 소식을 보도하기에 이르렀다.

 

 

  * 제1호 병마용갱 속에 복원 재생해 놓은 병마용들의 모습(3)


♧ 병마용 발굴 현장에 그대로 복원 전시


 진시황제 병마용은 유적이 묻혀 있던 곳의 주위를 둘러 하나의 공원처럼 조성해 놓았고, 정문 안에 들어서면 오른쪽에 박물관, 바로 맞은 편 발굴현장 용갱에 그대로 커다란 지붕을 얹어 발굴 복원한 용갱들을 본래 있던 그 자리에 정렬 대형 그대로 전시되었다. 숨죽이며 들어서서 조금 어두운 조명에 적응이 되었을 때, 눈앞에 벌어진 광경에 도저히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갱 별로 4열 종대, 또는 3열 횡대로 늘어선 늠름한 당대 최강 진나라 병사들, 그 규모와 정교함에 세계 제8대 불가사이라고 할만도 했다. 미리 예습을 하고 갔기 때문에 설명을 뒷전으로 하고 사방을 돌아다니며 사진 촬영을 하느라 땀이 쏟아졌다. 수많은 관광객들 어깨 너머로 눈치 보며 촬영하랴 일행을 놓치지 않으려고 신경을 쓰다보니 카메라의 한계도 있고 신통한 사진이 없다.  

 

 병마용은 발굴된 순서대로 제1호 갱으로부터 이름을 매기기 시작하여 제7호 갱까지 발굴되었다 한다. 그러나 개방된 곳은 한데 몰려 있는 제1호~제3호 갱까지이다. 3개의 갱에서는 700여개의 실물 크기의 도용(陶俑)과 100개가 넘는 전차, 40여필의 말, 10만여 개의 병기가 발굴되었다고 한다. 병기들 대부분은 실제무기여서 창고에 보관해놓고 일반인들에게는 공개되지 않고 있다.  

 

 대충 그 내용을 살펴보면, 1호 갱에는 주로 보병 중심의 우군(右軍)이 배치되었고, 2호 갱에는 전차 중심의 기마군이 좌군(左軍), 3호 갱에는 지휘관들을 위한 군사령부가 배치되었다. 4호 갱도 존재하지만 혼란스러웠던 진나라 말기에 만들어져 완성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규모는 1호 갱의 우군이 가장 크고, 다음이 2호 갱의 좌군이 해당된다. 지휘관이 있는 3호 갱의 군사령부는 규모가 작다.  

 

 

 

 

  * 제2~3호 병마용갱 속에 복원 재생해 놓은 병마용들의 모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