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름처럼 보이는 진시황릉에 오르는 사람들
△ 오름만큼 큰 진시황제릉(秦始皇陵, 친스황링)
화청지에서 나와 차를 타고 조금 동쪽으로 이동하자 작은 오름 같은 것이 하나 보였다. 가이드가 말하길 그것이 바로 진시황릉이란다. 버스에서 내려 걸어가는 길에는 복숭아, 석류 등을 팔고 있는 아줌마들과 가판에 여러 가지 조잡한 기념품을 늘어놓고 길옆을 점령한 아저씨들을 헤치고 1987년 유네스코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는 글을 써놓은 벽채를 지나 능 입구로 들어갔다.
그 때가 마침 토요일 12시여서 그리 크지 않은 마당과 무대에서는 대대적인 민속 공연을 벌이고 있었다. 그리 길지 않은 행사가 끝나자 사방에서 이들을 촬영하던 관광객들과 한데 얼려 기념사진을 찍었고, 스스럼없이 포즈를 취해 주었다. 날씨가 더웠는데도 무겁고 둔중한 옷들을 입고 고생하는 걸 생각해서 얼른 촬영을 끝내고, 곧게 뻗은 계단을 따라 오름에 오르는 기분으로 천천히 걸어 올라갔다.
양쪽에 모두 나무를 심어 공원 분위기를 연출했는데 주로 향나무 종류 같았고, 때맞춰 석류가 주렁주렁 달린 채 익어가고 있었다. 이곳이 바로 중국을 통일하고 만리장성 건설에 착수한 진(秦)나라 최초의 군주 시황제(始皇帝)가 묻힌 곳이다. 이 황릉은 진시황제가 즉위할 때부터 시작해서 37년에 걸쳐 만들어졌으며, 주변 둘레 25km, 높이 79m, 동서 지름 475m, 남북 384m에 이르는 엄청난 규모다.
능의 지하에는 화려한 궁전과 부장품이 있다는 사실이 자외선 조사와 2003년에 실시된 로봇 탐사 결과로 밝혀졌다. 베이징(北京) 가까이에 있는 명대13능 중 개방된 황릉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지하에 궁전을 꾸며 저승에서도 황제로 영생하려 했던 것 같다. 그래서 그곳에는 살았을 때 소용되던 여러 가지 부장품을 묻어놓았던 것이다.
* 민속행사를 벌이고 있는 사람들과 사진을 찍는 관광객들
△ 아직 발굴 되지 않은 지하궁전
지하유품과 관련된 사실은 역사가 사마천(司馬遷)이 쓴 사기(史記)에 처음 나온다. 그의 저술에 보면, 황제의 능을 건축하기 위해서 온 장안에서 징집당한 장인이 70만 명에 이르며 온갖 보물과 금붙이가 사용되었다고 썼다. 또한 황제의 관 둘레는 구리로 테를 쳤고, 황제의 관 둘레로 진입하는 사람은 수많은 화살 세례를 면치 못하도록 설계되었다고 한다.
관(棺) 주위로 수은(水銀)으로 만든 하천과 호수를 만들어 화려함을 더했고, 인어의 기름으로 만든 초가 황제의 영생을 지키며 타고 있다고 한다. 이러한 설명은 2003년 로봇 탐사 결과로 얻은 사진을 통해 사실로 입증되었다. 수은으로 만든 하천과 호수가 있으며, 고래 기름을 사용해 불을 밝힌 흔적도 사진 자료를 통해 볼 수 있었다고 한다.
이로써 당시의 건축 기술은 상당한 수준이었음이 입증된 셈이다. 그러나 중국 당국은 진시황릉 발굴조사에 신중한 입장을 보이고 있다. 더 이상의 발굴은 진행시키지 않고 있으며, 오히려 도굴 방지를 위해 자동 발사되는 화살을 설치했다고 전한다. 여행자가 볼 수 있는 것은 진시황릉의 꼭대기까지 79m 계단을 올라 주변의 경치를 감상하는 기회를 가질 뿐이다. 제주의 오름 중 성산읍 독자봉의 비고가 79m이므로 그 높이와 몸집이 비슷하다.
무덤 정상에 오른 우리는 사진도 찍고 주변 경치도 감상했다. 우리가 다음에 갈 병마용갱은 이곳에서 동쪽으로 1.5km 떨어져 있다. 능(陵)을 조성할 시기에는 이곳이 진나라와 적대 관계에 있던 6국, 즉 한(漢)․위(渭)․조(趙)․연(燕)․제(齊)․초(楚)나라가 자리하고 있던 방향으로 이는 진시황이 죽은 뒤에도 그쪽으로부터 복수하러 오는 적으로부터 황제를 지킨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예부터 대칭을 좋아 했던 중국의 전통을 감안하면 반대편에도 병마용갱이 있지 않을까 추측한다.
* 진시황릉 위로 오르는 계단
△ 진시황, 그는 누구인가
진(秦)나라의 시황제는 기원전 259년에 나서 210년에 죽었고, 기원전 246년에 즉위해 221년에 중앙집권적 제국으로서의 중국을 최초로 통일해 제국(帝國)을 건설한 인물이다. 장양왕 영자초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당시 세도가였던 조나라의 상인 출신의 승상 여불위 아들이라는 설도 있다. 성은 영이고 이름은 정(政)이다. 대규모의 문화탄압사건인 분서갱유(焚書坑儒) 사건을 일으켜 수 양제와 더불어 중국 역사상 최대의 폭군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그러나 도량형을 통일하였고 전국시대 국가들의 장성을 이어 만리장성을 완성하였다. 분열된 중국을 통일하고 황제 제도와 군현제를 열어, 이후 2천년 중국 왕조들의 기본틀을 만들었다. 전근대의 중국에서는 특히 유학 관료들에 의하여 폭군이라는 비판을 계속 받았으나, 병마용 발굴 이후부터 시황제의 진취성과 개척성에 초점을 맞추어 재평가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
그는 기원전 259년에 조나라에 인질로 잡혀온 진나라 왕손 영자초와 그 부인 조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원래 조씨는 조나라 수도 한단의 기생으로, 조나라의 거상 여불위가 데리고 있었다. 여불위는 조씨를 영자초에게 바쳤고, 영자초는 조씨를 아내로 삼았다. 이 과정에서 원래 조씨는 여불위의 아들을 임신하고 있었으나, 여불위가 이를 숨기고 정치적 목적에서 영자초에게 바쳤다는 설이 있다.
어쨌건, 영정은 영자초의 아들로 태어나, 줄곧 조나라에서 자라다가 기원전 250년, 영정의 증조부인 소양왕 영직이 동주를 멸망시킨 뒤 얼마 없어 사망하였고, 그 아들인 효문왕 영주가 즉위했다. 이에 영자초는 처자와 여불위를 데리고 진나라로 돌아와 태자에 책봉되었으나, 효문왕은 3일 뒤에 사망하고, 태자 영자초가 즉위하니, 이가 장양왕이다. 그는 곧 태자에 책봉되었지만, 3년 뒤에 아버지 장양왕이 훙서(薨逝)하자, 13세의 어린 나이로 진나라 제31대 왕에 즉위하게 되었다.
* 진시황릉에서 아래로 내려가는 길
△ 진시황의 중국 통일과 폭정
영정은 BC. 230년부터 많은 군사를 동원하여 중국 통일 사업을 시작하였다 먼저, 가장 세력이 약했던 한나라를 멸망시켰고, BC. 228년에는 조나라까지 빼앗았다. 그 당시 연나라의 태자 희단은 자객 형가를 시켜 영정을 죽이려 했으나 실패하였다. BC. 225년에는 위나라, BC. 223년에는 초나라, BC. 222년에는 연나라, 그리고 BC. 221년에 마지막 남은 제나라까지 멸망시켜 영정의 나이 39세에 전 중국 땅을 통일하였다.
그러자 그는 ‘왕(王)’이라는 칭호가 자신에겐 맞지 않는다며, 새로운 칭호를 원하여 삼황오제에서 '황'과 '제'를 따서 황제(皇帝)라 칭하였고, 자신은 처음이니 시황제(始皇帝)로 부르라 명했다. 그는 자신으로부터 뒤를 잇는 황제들이 2세, 3세 등 만세까지 진(秦) 제국이 지속되기를 바랐다. 시황제는 전국을 36개 군으로 나누어 군현제로 다스렸다.
모든 일은 자신이 직접 챙겼으며, 도량형과 화폐, 문자 등을 통일하여 제국을 효율적으로 다스리려 하였고, 도로 역시 정비하여 각지의 교통체계를 강화하였다. 그는 남쪽으로도 군사를 파견하여 4개 군을 증설시켰으며, 북방의 흉노족이 위협하자, 대장군 몽염을 변방으로 보내어, 그들을 정벌하여 내몽고의 땅 일부도 편입시켰다.
* 진시황릉 여러 곳에 가로로 난 길
BC. 213년 연회(宴會)에서 박사 순우월이 봉건제와 군현제를 놓고 복사 주청신과 언쟁을 벌였다. 순우월이 봉건제로 부활해야 한다고 주장하자,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승상 이사는 30일 내에 진나라의 역사와 의술, 농경 등에 관한 책 이외의 모든 책들을 태워버리라 주청올렸고, 시황제는 이를 받아들여 실행시켰는데, 이것이 바로 분서(焚書)이다.
이듬해인 BC. 212년, 시황제는 방사 후생과 노생에게 불로장생의 약을 가지고 오라 명하였으나, 그들이 시황제를 비판하며, 도망쳐 버리고 화가 난 시황제에게 조정 내에 수상한 학자가 일하고 있다는 정보가 들어왔다. 학자들이 자기가 아니라며 잡아떼자 전부 잡아들였는데 460여명이나 되었다. 그들을 구덩이에 넣고 생매장시켰으니, 이것이 바로 갱유(坑儒)이다.
이에 분개한 황태자 부소가 시황제에게 간언했으나, 부소는 오히려 시황제의 분노를 사 대장군 몽염이 있는 국경 근교로 쫓겨났다. 시황제는 북방에 흉노의 침입을 염려하여 서쪽으로 임도로부터 동쪽으로 요동까지 그 유명한 만리장성을 쌓도록 명했다. 이 만리장성에 동원된 인부가 150만여 명이나 되었고, 그 중에서 죽은 자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시황제는 함양 근교에 아방궁을 쌓도록 하였고, 70만 명의 인부를 동원, 함양 근교의 여산 전체에 자신의 능묘를 건설했다. 이렇게 대토목공사를 벌이는 동안, 재정은 엉망이 되고 말았다. 또, 법을 매우 엄히 하여 백성들이 무기를 가지고 있지 못하게 하였으며, 한 사람이 죄에 연루되면 그 친족을 몰살시켰고, 한 집이 법을 어기면 그 마을의 모든 가구들도 그에 똑같은 형벌을 받도록 하였다. 그래서, 관청 주변에는 항상 죄인들의 가득했다.
* 진시황제와 후대들의 세계표
△ 불로장생의 꿈과 진시황의 최후
그러고 나니까 시황제는 힘이 달렸다. 이제는 무병장수 불로장생만이 살길이었다. 전국의 명산에 방사들을 보내 불로장생의 약을 얻으려 하였으나 허사였다. 그 중 서복(徐福)이라는 자가 시황제에게 영주산에 그 약이 있다고 해서 동남동녀 3천을 거느리고 나섰으나 결국 찾지 못해 돌아오면 죽을 것 같아 왜(倭)로 건너가 돌아오지 않았다.
시황제는 재위 기간 중 무려 다섯 차례 전국을 순행하였다. 그 때를 이용해 원한에 찬 많은 협객들이 그를 죽이려 하였다. 그러자 시황제는 순행 시, 언제나 5개의 수레를 군사들이 호위토록 하고, 자신은 그 수레 중 하나에 탔다. 자신을 죽이려 드는 협객들을 얼마나 두려워했는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리고 시황제는 길가에 자신의 송덕비를 세워 자신의 공적을 과시하기도 했다. 한번은 시황제가 금릉(金陵)에 왔을 때, 왕기가 일어났다. 이에 분개한 시황제는 근처에 소나무를 빽빽이 세워 왕기의 기운을 막으려 했다. 그래서 금릉은 삼국 시대까지 말릉으로 불리었다. 이렇게 시황제는 중국 대륙을 돌아다니며 자신이 성공한 군주임을 천하에 과시하였다.
* 진시황제릉에 조성된 화단
시황제는 BC. 210년에 마지막 순행을 하였다. 여기에는 승상 이사와 중거부령인 환관 조고 그리고 자신의 26번째 아들이자 막내아들인 호해가 자신을 뒤따랐다. 시황제가 돌아오는 도중 평원진에서 유성이 떨어졌는데, 이는 ‘시황제가 죽고 천하가 갈질 징조’라 해서 이에 충격을 받고 쓰러졌다.
사구 지방에 이르자, 병이 매우 위독해져 유언장을 조고에게 쓰라 하고, 그 내용은 옥새를 적장자인 황태자 부소에게 전달케 하고, 부소에게 함양에서 자신의 장례를 주관하라 명하였다. BC. 210년 9월 10일, 시황제는 50세의 나이로 붕어하고 말았다. 그의 시신은 자신이 만든 지하궁전인 여산에 묻혔다.
그러나 이사와 조고, 호해는 시황제의 죽음을 숨겼으며 시황제의 시신이 있는 수레 옆에 절인 생선을 같이 운반하여 시신 썩는 냄새가 들키지 �도록 했다. 조고는 시황제의 유서를 조작, 황태자 부소와 몽염에게 자결을 명하였고 부소는 자결하였으나 몽염은 이 명에 대해 의심을 품어 자결하지 않았다. 그러나 군사들에게 체포당해 압송된 후 처형당했다. 얼마 뒤, 시황제의 26남 호해는 황제에 올랐으니 그가 진(秦)의 2세 황제이다.
* 병마용갱 앞에 서 있는 진시황제 석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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