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해외 나들이

진시황제 지하대군단(하)

김창집 2007. 12. 19. 00:19

 -- 중국의 천년고도 시안 답사기 (8)

 * 병마용갱에서 나온 여러 가지 유물을 전시해놓은 병마용박물관

 

♣ 1호 갱이 제일 크고 온전하게 남아


 제1호 갱은 1974년에 발굴된 갱(坑)으로 거대한 돔으로 덮여 있다. 세 곳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크며, 동서 길이가 약 230m, 남북으로 약 62m로 총 면적이 12㎢ 정도이다. 1호 갱은 동서쪽을 향한 긴 모양으로 장군과 병사가 배열되어 있고, 2호 갱은 면적이 약 6천㎡이며, 보병과 기병으로 구성되어 있다. 현재 2호 갱은 발굴이 되고 있는 상태에서 전시되어 있다.

 

 제3호 갱은 면적이 520㎡으로 凹모양이며, 병마용들은 양쪽으로 늘어서 있다. 역시 현재까지도 발굴 작업이 진 행중이다. 학자들은 발견된 3개의 갱외에도 진시황릉 근처에 아직 발굴되지 않은 더 많은 병마용갱이 묻혀 있을 거라고 보고 있다. 예부터 대칭형을 선호했던 중국의 전통을 감안하면 반대편에 또 다른 병마용갱이 있는 가능성이 추측되어 현재 활발한 탐색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2호갱은 궁노병과 전차부대로 1호갱 전시관의 기초공사가 시작되고 얼마 되지 않아 발견되었다. 처음에는 두 용갱이 연결되어 있지 않을까 했지만 각각 분리된 형태임이 증명되었다. 2호 용갱은 L자의 형태로 길이 96m, 너비는 84m, 깊이는 5m로 면적은 1호 갱의 절반 수준이다. 발굴도 거의 진행되지 않고 있었다. 발굴하지 못한, 비닐로 덮어놓은 부분의 병마용에는 색이 조금 남아 있다고 한다.

 

 

 

 * 병마용갱에 전시되어 있는 병마용들을 가까이 당겨 찍은 것

 

 퇴색을 우려해서인지 조명도 어두워 약간 으스스한 느낌도 든다. 갑자기 병마용 들이 그때 죽은 장인의 혼령같이 느껴져 섬뜩하다. 보병이 대부분인 1호갱과 달리 2호갱은 궁노병, 경차병, 차병, 기병 등 네 부분의 서로 다른 병과로 이루어져 있다. 전시관의 가장자리에는 대체로  온전한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병마용을 유리관에 넣어 따로 전시하고 있었다.

 

 그런 반면 3호갱은 지휘부의 군영으로 1호갱에서 25m 떨어진 지점에서 발굴되었다. 凹모양으로 면적은 겨우 300㎡지만 68명의 지휘관이 있는 지휘부의 군영이었다. 용병들의 배열과 말의 배치, 무엇보다도  전쟁 전에 점을 치는 사슴뿔의 조각이 발굴됨에 따라 이곳이 고대 군진의 지휘부라는 것이 밝혀졌다. 장군용들은 머리가 없는 것이 대부분이다. 조각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파괴되었기 때문이다.

 

 1호 갱의 뒷면에는 아직 다 완성되지 못한 병사들이 줄 지어 패잔병처럼 서있다. 목이 없는 것을 비롯해서 팔다리가 없는 것, 손발이 없는 것, 상체만 남아 있는 것 등 전방에서 후손된 것인 듯 매몰 도중이나 발굴시 많이 부서져 그 잔해를 수습하지 못한 것 같다. 살아 있는 것이나 만들어 놓은 것이나 전쟁은 그렇게 상흔을 남기고 마는 것이리라.  

 

 

 

 * 각기 다른 모습을 하고 있는 병마용들

 

♣ 실물과 닮은 섬세한 병사들의 모습


 당시 병사들의 모습은 대부분 신장 175∼195㎝의 건장한 남성의 모습으로 제작되었을 뿐만 아니라 표정까지 다 다른 사람의 골격이다. 그것으로 보아 다양한 민족으로 구성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8,000명이나 되는 군사들의 얼굴이 너무나 생생하고 저마다 다른 것으로 보아, 이 인형들은 실제로 진시황이 거느렸던 사람들을 한 사람씩 그대로 본떠 만든 것으로 보인다.

 

 이는 진나라의 엄청난 영토를 그대로 반영한 것으로 생각된다. 얼굴이 둥글고 턱이 뾰족한 형은 지금의 스촨성(四川省) 출신이고, 통통한 얼굴형은 산시성(陝西省) 남부 출신, 그리고 튀어나온 광대뼈와 큰 체형의 병마용은 간쑤성(甘肅省) 동부 출신이다. 금방이라도 화살통(箭筒)에서 화살을 빼내 시위를 당길 듯한 병사, 오른발을 모로 하고 서서 활 쏘는 자세를 취한 병사, 몸을 살짝 굽히고 두 손을 내밀어 고삐를 잡은 전차병….병사들은 계급과 주특기에 따라 그 자세까지도 다양하다.

 

 그들은 모두 진짜 칼, 창, 쇠뇌를 지니고 있다. 발굴자들을 기쁘게 한 것은 이 같은 쇠붙이 무기들이 2000년이 넘도록 썩지 않고 남아 있다는 사실이었다. 잘 조사해 보니 화살촉과 칼 등에는 구리, 주석, 마그네슘, 니켈, 코발트 같은 성분들이 열세 가지나 섞여 있었다. 특히 진시황의 것으로 추측되는 도금한 청동검은, 발굴 팀이 실험해 보았더니 종이뭉치를 단번에 자를 정도였다. 놀랍게도 그 칼의 표면은 녹슬지 않도록 크롬 화합물로 산화 처리되어 있다.

 

 또 병사들은 두 가지 옷차림을 하고 있다. 전포(戰袍)만 입은 병사와, 전포 위에 갑옷을 걸친 병사, 갑옷은 거의 웃통과 어깨만 가린 차림이었는데, 장교들 것이 더 화려했다. 사병은 상투를 오른쪽으로 틀었고, 장교는 가운데에 상투를 틀고 괭이 모양의 모자를 썼다. 그리고 이 도기 병마들에는 하나하나에 그것을 빚어 구운 도공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그 빼어난 솜씨로나 2천 년 전 전투대형과 무기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 땅굴은 그 자체가 거대한 군사 박물관이라 할 수 있다.

 

 

* 병마용들은 하나같이 정성을 들여 실물 크기로 만들었다.

 

♧ 입체적으로 조형한 고대 병서(兵書)


 진나라 병마용갱은 진왕조의 강대한 군사력을 사실적으로 재현했을 뿐만 아니라 그 편대 조합 또한 생동감 있고 직관적인 군진도감으로서 중국 고대의 병기 설치, 병기 편대 및 전략, 전술 사상을 보여주고 있어 이를 연구하는데 필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안행지진이 위력을 발휘한 데는, 방진에 배치된 궁노병의 활약과, 방진과 호응하는 기병 군진의 협공이 절대적이었다.

 

 궁노병이란 궁(활)과 노(쇠뇌)를 쓰는 병사이다. 활보다 멀리 쏠 수 있는 쇠뇌(석궁)는 전국시대부터 쓰였는데 ‘무려 600보 밖을 쏠 수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게다가 쇠뇌의 촉은 아주 크고 청동으로 만들어져 살상력이 강했다. 쇠뇌로 군대를 무장시킨 나라는 중국이 세계에서 처음이다. 서양에는 중세까지도 쇠뇌 같은 강력한 살상무기가 없었다.

 

 진나라 보병 방진에서는 쇠뇌 입사수(서서쏴 자세의 병사)와 활 궤사수(쪼그려쏴 자세의 병사)가 교대로 일어섰다 앉았다 하며 활과 쇠뇌를 쏘았다. 그렇게 적의 진격을 막고 대열을 흐트러뜨림으로써 보병으로 하여금 백병전을 수월하게 펼치도록 기선을 제압했다. 진시황은 또 기원전 3세기부터 전술에 응용된 기병을 독립 병과로 두어 보병과 전차를 능가하는 주력 군단으로 만들었다.

 

 병마용갱의 말에는 안장이 조각되어 있다. 학자들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일찍 진나라 군마에 안장이 쓰였다는 사실은, 기병이 양손을 자유롭게 써서 전투능력이 뛰어났음을 뜻한다. 또 2호 용갱의 기병 군진은 전체 대형의 왼쪽에 있어 기병이 신속한 측면 돌파에 활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전국시대 후기부터 전쟁 규모가 커지고 전투 횟수가 늘어나자 지휘관은 군진 맨 앞에서 뒤쪽으로 옮겨갔다. 전체 군진의 북서쪽에 자리 잡은 3호 용갱이 지휘부라는 사실은, 지휘관이 작전을 면밀히 짜거나 적진을 한눈에 파악하려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전체를 보면, 진나라의 군사 전술이 어떠했나를 짐작할 수 있다.

 

 

 

 * 병마용갱의 군복을 제대로 입은 병사(상)와 말(중)과 병사와 말(하)

 

 진시황 병마용 박물관


 진시황 병마용갱을 차례로 답사한 일행은 갱 밖으로 나와 박물관으로 갔다. 진시황릉 주변에서 출토된 유물을 한데 모아놓은 진시황 병마용 박물관은 진시황을 호위하는 병마용과 진시황이 생전에 사용했을 것으로 추측되는 동마차 등이 전시되어 있다. 병마용은 중국 역사상 처음으로 중국을 통일한 진시황제가 자신의 무덤을 만드는 동시에 무덤을 지킬 호위대로 사용하기 위해 만들어 묻은 것이다.

 

 문물전시관에는 진시황릉 주변에서 출토된 2대의 마차가 전시되어 있다. 진시황이 타던 것을 약 2분의1의 크기로 모형화한 것인데, 진짜와 조금도 다름없을 정도로 정교하게 만들어놓았다. 출토된 순서에 따라 1호와 2호로 구분한다. 무게가 무려 1톤이 넘는 이 마차는 진나라의 채색화 기예와 청동을 다루는 솜씨가 얼마나 뛰어났는지 짐작케 한다. 그밖에 당시에 사용되던 무기가 함께 전시되어 있다.

 

 2호 갱 입구 근처에는 작은 사진관이 있는데, 병마용 모형이 여러 개 만들어 모델로 세워놓았고, 마차도 모형으로 만들어 놓았다. 10위안만 내면 이 모델과 기념사진을 찍을 수 있다. 원래는 한 컷만 찍을 수 있다고 하지만, 차례가 될 때까지는 모델만 찍다가 자신이 차례가 되어 모델과 함께 찍은 후는 다음 사람을 위해 나와야 한다.

 

 3호 갱내에 있는 기념품점에서는 모형으로 제작된 여러 가지 병마용을 팔고 있어 사올 수 있으나 너무 비싸고 주변 관광지에는 조악하지만 여러 가지 병마용을 살 수 있다. 보고 싶어 하던 것을 2시간 반에 걸쳐 온 갱내를 쉬지 않고 돌아다니며 본 일행은 나무 그늘 의자가 놓인 곳에 앉아 쉬었다. 2200여 년 전에 만든 것이라고는 도저히 믿기 어려운 규모와 솜씨가 한 마디로 정리하여 소감을 말하기 힘든 듯 아무도 언급하지 않았다.

 

 

 

* 출토 중 색이 분명히 남은 병사용(상), 복원한 마차(중), 박물관의 세계문화유산 표기(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