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해외 나들이

양귀비와 현종의 로맨스와 화청지

김창집 2007. 10. 30. 00:00

-- 중국의 천년고도 시안 답사기 (5)

 

   * 동서양을 막론한 많은 관광객의 들끓고 있는 화청지 입구

 

△ 양귀비와 현종의 사랑터, 화청지

 

 둘째 날 두 번째 답사지는 중국에서 현존하는 최대 규모의 당나라 왕실 원림인 화청지(華淸池 : 화칭츠)였다. 고대부터 수려한 풍경과 질 좋은 지하 온천수 때문에 역대 제왕들의 관심을 받아왔던 장소이다. 화청지의 역사는 매우 오래되었는데, 일찍이 서주(西周) 때, 주나라 유왕(幽王)이 이곳에 여궁(驪宮)을 지었으며, 후에 진시황과 한 무제도 이곳에 행궁(行宮)을 건립하였다.

 

 특히, 당나라 현종(玄宗)은 60만㎡의 넓은 면적에 화려한 궁전누각인 ‘화청궁(華淸宮)을 지어 이곳에서 중국 4대 미인의 하나인 양귀비와 사랑하며 생활한 곳으로도 유명하다. 그 때문에 이곳을 돌아본 당나라 시인들이 쓴 당시(唐詩)가 많아 더욱 유명하게 되었으며, 이 화청지에 대한 묘사라든가 양귀비(楊貴妃)의 미모를 다룬 시가 많다.

 

   * 화청지에 들어가기에 앞서 한데 모으고 있다.


 화청지 동쪽 구역에는 정말약(郭沫若)이 쓴 "화청지" 금자편액이 걸려있으며, 구역 내에는 하화각, 비하각, 오간정(1936년 서안사변 당시 장개석이 머물던 곳) 등의 건축물이 있다. 그 중 온천석벽에 있는 ‘온천송비(溫泉頌碑)’는 중국 비석예술 중에서도 우수한 예술품으로 인정받고 있다. 중앙구역에는 당 화청궁 어탕유적박물관이 있으며 연화탕, 해당탕, 태자탕, 상식탕, 성진탕 등의 당나라 때 현종과 양귀비가 온천을 즐기던 탕과 문물 진열실이 있다.


 화청지 온천의 수질은 매우 깨끗하며, 수온은 항상 43℃를 유지한다. 다량의 화학물질을 포함하고 있어서 관절염, 신경통 등에 효과가 있다. 또한 매일 육각정 무대 앞에서는 당나라시기를 재현한 공연이 열린다. 마침 토요일이어서 그런지 화청지 안에는 많은 인파가 몰려 그 옛날 두 남녀가 누렸던 호화스런 사랑의 자취를 더듬노라 여념이 없다.


  * 오래된 곳이어서 나무도 우거졌고, 앞에 산이 병풍처럼 둘러처져 있다. 

 

△ 백거이(白居易)의 ‘장한가(長恨歌)’ 중에서


後宮佳麗三千人(후궁가려삼천인)  빼어난 후궁에 미녀 삼천이 있었지만

三千寵愛在一身(삼천총애재일신)  삼천 명의 총애를 한 몸에 받았다네.

金屋粧成嬌侍夜(금옥장성교시야)  황금 궁전에서 몸단장하고 기다리는 밤

玉樓宴罷醉和春(옥루연파취화춘)  옥루 잔치 끝나면 피어나는 봄

姉妹弟兄皆列士(자매제형개열사)  자매와 형제 모두 제후의 서열로 서며

可憐光彩生門戶(가련광채생문호)  그들 가문에도 찬란한 광채가 내린다

遂令天下父母心(수령천하부모심)  이로써 세상의 모든 부모 마음이

不重生男重生女(부중생남중생녀)  아들보다 딸 낳기를 더 소망했다네.


 이처럼 양귀비 하나로 식구들 모두 제후의 서열에 올라 떵떵거리며 살았다는 이유로 하여 많은 사람들이 양귀비 같은 딸 낳기를 소망했다는 시구(詩句)는 우리나라 고전소설의 대표적 작품인 ‘춘향전(春香傳)’에도 인용된다. 암행어사 출도가 끝나고 동헌에 앉은 이몽룡이 춘향이를 구출하자 춘향의 어머니인 월매가 나서서 춤을 추면서 딸을 잘 낳았다고 으스대는 대사 속에 나온다.

 

   * 박물관 

  

△ 현종, 그는 어떤 사람인가


 현종(玄宗)은 중국 당나라 제6대 황제로 712년부터 756년까지 무려 45년간 재위했다. 본명은 이융기(李隆基), 시호는 명황(明皇), 무황(武皇)으로 불리며 치세(治世) 중 당나라에 최대의 번영과 영화를 가져왔다는 평가를 받는 분이다. 현종은 요즘 한참 인기를 끌고 있는 사극 ‘대조영(大祚榮)’에 등장하는 측천무후(則天武后)의 아들인 예종(睿宗)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났던 시기에 제국의 실권은 전적으로 측천무후의 손에 있었고 예종(睿宗)은 명목상의 황제에 지나지 않았다. 687년에 주공(周公)으로 책봉된 현종은 그녀가 제위를 찬탈한(690) 뒤인 693년 영주공(靈州公)으로 책봉되었다. 무후의 치세 말년에 현종은 궁중의 의전(儀典) 담당직에 임명되었고 이로 인해 궁중내의 금위군(禁衛軍)에 영향력을 가지게 되었다.

 

   * 우왕전 앞의 동상

  

 705년 측천무후의 죽음으로 궁중에 복잡한 권력승계 투쟁이 벌어지는 과정에서 현종의 아버지인 예종이 710년 황제로 재 등극하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현종은 공로를 인정받아 황태자로 책봉되었다. 712년 예종은 현종에게 제위를 계승했으나 야심만만한 태평공주(太平公主:예종의 누이)의 권유를 받아들여 태상황(太上皇)이 되었다.


 이 직위는 일종의 섭정(攝政)으로서 고관직의 임명권을 가지고 있었으며 고관직은 태평공주의 지지자들이 모두 차지했다. 713년 현종이 태평공주와의 권력투쟁에서 이기게 되자 공주는 자결했다. 현종은 황권을 완전 장악하게 되었고 예종은 은퇴했다. 현종의 치세는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그는 우선 관료조직을 대폭 개혁했고, 세력 있는 집단들을 잘 이용함으로써 균형을 이루면서 탄탄대로의 길을 걷는다.

 

  * 엣 온천탕

 

△ 현종의 정치적 업적


 현종이 황제로 있을 때 앞서 성행했던 매관매직을 금지시켰고, 효율적인 관료제도의 운영으로 국가재정을 회복시켰다. 더욱이 측천무후가 뤄양에 거처하는 동안 황폐해졌던 대운하를 개수(改修)하여 가동시킴으로써 이 운하에 의존하던 수도 장안(長安)은 제대로 돌아가게 하는 한편, 티베트족, 돌궐족, 거란족에 대한 원정도 성공적으로 수행하였다.


 행정부 내에 광범위한 개혁이 시행된 것은 720년부터인데, 중앙정부 기구가 개편되어 몇몇 고관들에 권력이 집중되게 되었다. 호구 조사도 효율적으로 실시되어 납세인구가 장부상에 제대로 등재됨으로써 세수(稅收)가 크게 증가했다. 화폐 주조나 운송시설도 효율적으로 개선되어, 황제는 더 이상 기근을 피하기 위해 주기적으로 장안과 뤄양 사이를 왕래하며 거처를 옮길 필요가 없어졌다.

 

     * 연화탕


 치세 후반에는 재정 전문 귀족관료들의 정치적 영향력이 점점 커져 737년 이후에는 귀족계급을 대표하는 이임보(李林甫)가 사실상의 실권자가 되었고, 귀족계급들은 권력기반을 확고하게 잡았다. 그러나 740년 이후 현종은 정사를 돌보지 않아 실제적 관리능력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때까지 행정적 효율성을 더욱 크게 하기 위해 시행되었던 개혁조치들은 점점 더 정치적 균형을 파괴하는 경향을 띠게 되었다.


 대신들은 정부의 수반으로서 전례 없는 권력과 권위를 공식적으로 얻어 재정전문 관료들도 궁중의 호사스런 행사나 황제의 사사로운 낭비를 재정적으로 지원하기 위해 백성들을 더욱 착취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현종은 현실세계로부터 멀어지기 시작했는데, 예술 애호가였던 그는 궁중 아악원(雅樂院)을 설치했고 시인, 화가, 작가들을 후원했다. 심지어는 도교(道敎) 연구에 심취하여 당 황실의 시조가 도교의 창시자였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 저 멋진 작은 집은 목욕하고 나와 머리 말리는 곳이라던가

 

△ 현종과 안녹산(安祿山)의 난


 그런 틈을 타서 737년 이후에는 북쪽의 변경지역을 지키기 위해 설치된 대규모의 지역군 사령부 진(鎭)들이 군사 부문 이외의 다른 분야에서도 폭넓은 권력을 행사하기 시작했고, 또 지역 정부의 기능을 갖게 되었다. 740년대 후반에는 일부 절도사들이 엄청난 권력을 얻게 되었고 궁중 내의 정치에 관여하게 되었다. 이들 중 이임보의 후원을 받고 있던 안녹산(安祿山)은 동북지역에 18만의 군대를 거느리게 되었다.


 한편, 현종은 무혜비(武惠妃)와 양귀비에게 빠져 헤매게 되었다. 무혜비는 이임보를 출세하도록 후견인 역할을 했고, 자신의 맏아들을 황태자로 만들기 위해 힘썼다. 치세 말기에 현종은 양귀비에게 완전히 미혹(迷惑)되어 친인척들을 무더기로 요직에 등용시켰다. 이들 중 양귀비의 6촌 오빠인 양국충(楊國忠)은 급부상하여 그 권세가 이임보와 겨룰 정도가 되었고, 이임보가 죽자 재상이 되었다.

 

   * 온천 원수가 콸콸 쏟아져 나오는 우물


 그런 권력다툼으로 양국충과 안녹산 사이에는 커다란 갈등이 형성되었다. 후원자 이임보가 죽고 양국충이 적대감정을 드러내자, 안녹산은 755년 말 기병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동북 여러 성(省)들을 침공했고 756년 여름에는 장안을 향해 진격했다. 현종은 궁중 대신 몇 명과 양귀비, 소규모의 군대를 이끌고 양국충 가문의 세력 기반인 쓰촨(四川)으로 피난 갔다.


 피난 일행이 마외(馬嵬)에 도착하자 수행군대가 반란을 일으켜 양국충을 살해했고, 현종은 반란군의 강요에 못 이겨 양귀비를 처형시켰다. 그러자 장안의 서쪽인 링우(靈武)에 따로 피신했던 황태자가 황위에 등극하니 이가 바로 숙종이다. 황태자의 등극 소식을 얼마 뒤에 들은 현종은 그에 동의하고 숙종을 위해 공식적으로 양위했다. 현종은 은퇴하여 762년에 죽었다.

 

   * 저 남자 양귀비 다리 만지고 집에 가서 어떡하려구

 

△ 절세미인으로 알려진 양귀비


 중국을 대표하는 미녀로 알려진 양귀비(楊貴妃, 719~756)는 중국 당나라 때 현종의 귀비(貴妃)로, 사실은 현종의 19번째 아들인 수왕(壽王)의 비였다. 무혜대비가 죽어 황후자리가 비어 있을 때, 현종은 화청지에서 그녀를 만났는데 그의 빼어난 미모에 반하고 말았다. 그러나 그녀가 며느리라는 것 때문에 왕비로 맞고 싶었으나 세인(世人)의 눈이 두려웠다.


 그래서 편법을 쓰게 되는데, 우선 그녀를 수왕의 집안에서 탈출하게 하여 여도사(女道士)로 만들어 절에 머물게 하면서 사람들의 눈을 피해 밀회를 즐겼다. 그러다가 세인들의 잊어버릴 만한 시간이 흐르자 정식으로 귀비(貴妃)가 되어 황궁으로 들어갔다. 그 때 그녀의 나이는 27세였고, 현종의 나이는 35세가 많은 62세였다. 그 때부터 현종의 사랑을 받은 양귀비 일가는 일약 출세 가도를 달렸다.

 

      * 현대 명필들의 글씨를 돌에 새겨놓은 곳

 

 현종이 그녀에게 빠져 국정을 돌보지 않자 잇달아 반란이 일어났고, 그로 인해 당조의 세력이 크게 약화되었다. 그녀는 중국 역사상 절세의 미인으로 통했지만 일설에 79kg이나 되는 풍만한 체구의 여인이었다. 얼마 후 그녀의 두 자매도 현종의 비로 맞아들여졌고, 사촌오빠인 양국충(楊國忠)은 재상이 되었다. 돌궐족 출신의 젊은 장군 안녹산(安祿山)은 양귀비의 득세를 등에 업고 엄청난 권세를 누렸다.


 그녀는 안녹산을 양자로 맞아들였는데 실제로는 연인 사이였다는 소문도 있다. 이처럼 든든한 배경을 지닌 안녹산은 20만 대군의 통수권을 쥐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양국충의 권세를 질투하여 황제를 배반하고 대규모 반란을 일으켰다. 756년 반란으로 인해 수도가 점령당하자 현종과 황실은 피신해야만 했다. 도망 중에 황제의 친위병들은 황실의 몰락이 양씨 일가 때문이라고 여겨 양귀비와 양국충을 처형했다.

 

      * 양귀비 상 앞에서 포즈를 잡은 소녀

 

△ 시안사건의 현장인 화청지


 시안 사건(西安事件)은 1936년 12월, 중국 국민정부의 대원수 장제스(蔣介石)가 자신의 부하 장쉐량(張學良)에 의해 시안에서 연금된 사건을 말한다. 장쉐량은 중국 북서지방의 시안에 주둔하고 있던 동북군(東北軍, 만주군)의 지휘관이었는데, 장제스가 중국 북부를 침략한 일본군에 대항해 항일전을 전력으로 수행하지 않고 반공(反共) 내전을 지속할 방침을 세우자, 이에 반대하여 장제스를 연금했다.


 당시 중국은 일본의 침략을 저지하기 위한 항일 투쟁과 공산당과 국민당의 대립으로 인한 내전 종식이 문제로 대두될 때였다. 이 두 가지 사안 중 우선해야 할 일은 항일 투쟁이라는 것이 당시의 여론이었다. 그러나 국민당 장제스만은 공산당을 토벌해 내전 종식을 이루고 나서 항일 투쟁을 해도 늦지 않다고 주장하여 국민당 내부에서도 반발을 샀다.  

 

   * 대중탕도 아니고 이렇게 컸다면 


 그래서 장제스는 새로운 반공작전을 독려하기 위해 장쉐량의 사령부를 방문했다가 그의 군대에 의해 체포된다. 그 후 2주의 감금 끝에 석방되어 제2차 국공합작(國共合作)이 이루어지면서 이 사건이 끝난다. 장쉐량의 부대는 일본군의 점령하에 있는 자신들의 고향 만주땅을 수복하려는 일념에서 장제스를 감금하고 국민당과 공산당 간의 내전정지, 항일을 위한 거국적인 통일전선 수립, 국민정부의 개각을 요구했다.


 공산당은 장쉐량 부대의 요구조건에 전적으로 동조했으며, 저우언라이(周恩來)가 대표로 협상과정에 참여했다. 1936년 12월 25일 장제스는 이 제안에 대해 구두(口頭)로 승락한 후 석방되었다. 그 일로 장제스는 공산당과 제2차 국공합작을 하기는 했지만, 장쉐량을 체포하여 항일전 기간 내내 연금 상태에 두었다. 장쉐량은 1949년 타이완으로 끌려간 뒤에도 오랫동안 가택연금 상태에 있었다.

 

  * 사진 찍고 쉬는 육각정


♬ 눈물의 보슬비 - 등려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