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향토문화 기행

굴묵으로 보는 제주의 보온 문화

김창집 2008. 2. 2. 20:41

* 이 글은 JDC 제주국제자유도시 개발센터에서 발간하는『제주의 꿈』1, 2월 합병호에 나온 글입니다. 굴묵 사진은 찍을 기회가 없어 대신 한림공원에서 있는 초가집 사진을 싣습니다.

 

 

♧ 온돌과 굴묵의 차이


 바야흐로 유가(油價)가 배럴 당 100달러 선을 기록했다. 게다가 일찍 찾아온 한파는 그렇지 않아도 어려운 서민 가정에 난방비 부담으로 이어지고 있다. 갑자기 굴묵을 땐 따뜻한 안방의 이불을 덮어놓은 아랫목이 그리워지고…. 난방비 걱정 없이 겨울을 났던 선인들의 지혜가 절실해지는 계절이다.  

 

 온돌이나 굴묵은 방구들에 납작한 돌을 깔아놓은 다음, 밑에서 불을 때어 그 열로 돌을 뜨겁게 함으로써 보온하는 방식이다. 온돌은 보통 아궁이에서 밥을 짓거나 여물을 끓일 때 남은 열을 이용하는데, 연소를 잘 시켜 방고래로 열 이동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 굴뚝을 세우며, 굴묵은 땔감을 아궁이 속 방고래에 집어넣고 그냥 천천히 타게 하려고 굴뚝을 세우지 않는다.


♧ 경제적인 구조


 제주 초가 안방의 구조를 보면, 한쪽은 마루와 통하고 한 쪽은 난간으로 이어졌다. 굴묵은 이 방을 보온하기 위한 장치로, 난간 옆을 통해 오른쪽으로 들어가거나 형편에 따라 아궁이 쪽 외벽을 헐어 만들기도 한다. 방안에 높이 1m 정도 되는 벽장을 만들어, 그 아래쪽에 위치한 아궁이와 방고래, 난간에 이르는 곳을 굴묵이라 불렀다. 들어가는 곳에 땔감, 맞은편에 재를 모아 두는 식의 구조였다. 

 

 굴묵 어귀 천장에는 닭의 둥우리를 매단 집도 있고, 겨울철에는 축담에 닭을 옮겨 추위를 막고 서리를 방지했다. 그렇게 오랫동안 지속되던 것이 1960년대 새마을 운동이 일어나면서 많은 변화가 생겼다. 초가지붕을 걷어내고 슬레이트 지붕으로 개량되면서 대부분의 농촌에서는 땔감, 도시에서는 연탄을 사용하는 온돌로 바뀌게 된 것이다.


 

♧ 땔감은 주로 까끄라기


 자급자족을 하던 농경시대에는 수많은 부산물이 생겨났다. 곡식을 베어다 타작할 때 생기는 줄기나 껍질, 가축의 분뇨가 그것이다. 그 중 일부는 가축의 사료와 땔감으로 썼고, 가축의 분뇨는 썩혀서 거름으로 활용하였다. 그 중 굴묵의 주 땔감은 ‘고시락’(‘고’의 ‘ㅗ’는 아래아)이라고 불리는 보리 까끄라기였다. 당시는 논이 없어 보리를 주식으로 했기 때문에 그 양도 많았다. 보릿짚은 ‘눌(가리)’이라는 형태로 쌓아 두었다가 땔감으로 사용하거나 깃을 까는데 썼고, 까끄라기는 막에 보관해두었다가 겨울철 땔감으로 썼던 것이다. 소가 없는 집에서는 조 이삭에서 알을 털고 난 몸체인 ‘강메기’를 활용하기도 했다. 

 

 농가 마당에는 언제나 타작하고 남은 찌꺼기나 나르다 흘린 것들이 있게 마련이다. 이른 바 쓰레기로 분류되는데, 그것을 글겡이(갈퀴)로 긁고 빗자루로 쓸어 모아 한 뼘 이상의 것은 부엌으로 가 땔감으로, 그 다음의 것은 굴묵으로, 먼지에 가까운 것은 통시에 넣어 거름에 보탰다. 그러면 땔감으로 화석 연료를 쓰지 않아도 되고, 쓰레기까지 처리되었던 것이다. 


♧ 말똥을 섞으면 뜨끈뜨끈


 굴묵을 지들(땔) 때에는 아궁이를 닫아놓은 돌문을 열고, 방고래에서 재를 끌어낸 다음 차곡차곡 땔감을 채우고 밖에서 불을 때어 불이 충분히 붙기 시작한 걸 확인한 뒤 돌문을 닫으면 된다. 환자가 있을 때에는 나무로 급히 때기도 했고, 노약자가 있으면 말똥을 섞어 때었다. 말은 혹한기를 제외하고는 주로 오름이나 목장에 방목(放牧)을 했기 때문에 가을걷이가 끝난 뒤 목장지대에서 주워왔다.

 

 요즘 산에 가보면 대책 없이 썩어가는 나무가 즐비하다. 화석 연료의 남용으로 지구온난화라는 비상이 내려진 지금, 개인 주택이나 시골집에 굴묵을 되살리면 어떨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