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을 벌판에 서서
억새가 토해내는 소리를 듣는다. 바람에 의지하여 온몸으로 사유(思惟)하는 독백(獨白)을 엿듣는다. 너의 몸짓은 너무도 큰 포물선이어서 언제나 옆에 선 우리를 주눅들게 했다. 기우는 태양도 마다 않고 안으로 새기는 그 사연이야 무엇이든 간에 보는 사람을 숙연하게 한다.
지난여름 8월은 너무 더웠고, 9월은 비와 태풍으로 얼룩졌었다. 그 숱한 고통을 인내(忍耐)로서 극복하고 오늘 저 가을의 찬란한 태양 아래서 철인(哲人)인 양 벌거벗고 고독을 즐기는 너를 보고 있노라면, 세월을 숨기기 위해 허연 머리를 감추려는 인간 군상들이 한없이 불쌍해지기도 하고, 위로하고 싶어지고….
마음을 비우면 어떤 경지에 이르게 되는지? 그 마음을 비운다는 것 어디까지가 가능한 건지 모를 일이다. 꼿꼿이 서있는 척하지만 속은 그렇지 못하고 허둥대는 인간들보다 바람에 몸을 맡기고 춤을 추듯 그에 따라 움직이는, 하지만 그럴수록 뿌리는 더욱 굳건해지는 중이다.
♧ 아∼ 으악새 슬피 우니
‘으악새’가 새인 줄 다들 짐작하고 있었지만 ‘억새’의 경상도 방언이라고 근래 와서 밝혀놓은 것은 차라리 사치다. 사실 여부를 떠나서 갈대도 아니고 서걱이는 잎새에 바람이 스치며 내는 소리를 ‘숨죽여 우는 것’으로 유추해 낸 낭만이 조금은 빛이 바랜다.
외떡잎식물 벼목 벼과의 여러해살이풀인 억새는 지금에 와서 대접받고 있지만 사실 과거에는 환영받지 못하는 애물단지였다. 애써 개간하여 농사를 지어놓은 중산간 밭에 이 질긴 억새가 곡식 사이에 끼어들면 단단히 박힌 뿌리를 해체하느라 한참동안 땀을 흘려야 했다. 그리고 무덤 봉분 위에 자라난 억새는 어떻고.
제주에서 ‘세’라고 부르는 초가지붕을 덮는 ‘띠’밭에 이 억새가 들어서기 시작하면 띠밭은 즉시 황폐해져버린다. 꼴밭도 마찬가지다. 지금 제주 땅 그 어디 황무지건, 돌밭이건, 바닷가건 가리지 않고 그 왕성한 생명력으로 세력을 떨치고 있지만 억새에게도 천적(天敵)은 있다. 그늘이다. 그늘을 싫어하는 억새는 자신보다 더 큰 나무속에 있을 때라야 스스로 침잠(沈潛)하게 되는 것이다.
♧ 가을 억새 - 정일근
때로는 이별하면서 살고 싶은 것이다.
가스등 켜진 추억의 플랫폼에서
마지막 상행성 열차로 고개를 떠나보내며
눈물 젖은 손수건을 흔들거나
어둠이 묻어나는 유리창에 이마를 대고
터벅터벅 긴 골목길 돌아가는
그대의 뒷모습을 다시 보고 싶은 것이다.
사랑 없는 시대의 이별이란
코끝이 찡해오는 작별의 악수도 없이
작별의 축축한 별사도 없이
주머니에 손을 넣고 총총총
제 갈 길로 바쁘게 돌아서는 사람들
사랑 없는 수많은 만남과 이별 속에서
이제 누가 이별을 위해 눈물을 흘려주겠는가
이별 뒤의 뜨거운 재회를 기다리겠는가
하산 길 돌아보면 별이 뜨는 가을 능선에
잘 가라 잘 가라 손 흔들고 섰는 억새
때로는 억새처럼 손 흔들며 살고 싶은 것이다.
가을 저녁 그대가 흔드는 작별의 흰 손수건에
내 생애 가장 깨끗한 눈물 적시고 싶은 것이다
♧ 가을 억새밭 - 윤홍조
저토록 아름다운 물결을 보았는가 굽이치며 흘러가는 물줄기를 보았는가
굽이굽이 산자란 굴헝을 넘어 유유자적 길 떠나는 뒷모습
내를 이루어 흘러가는 물줄기를 보았는가
분분한 세상 소리 소문 없이 바람의 발길 따라 몸을 사루는
속 살결 부드러운 물줄기를 보았는가
이부자락 펼친 듯 세상을 감싸며 넘실거려 흘러가는 비단필의 물결
몸짓 황홀한 물줄기를 보았는가
수많은 발길 환호하며 달려와 호소해 갈구하는 사랑 둬 두고
기뻐 흘러가는 물줄기를 보았는가
저 가을 억새밭을 보았는가.
♧ 억새 - 이근배
내가 사랑하는 거 죄다
아파하는 것 죄다
슬퍼하는 것 죄다
바람인 것 죄다
강물인 것 죄다
노을인 것 죄다
내가 버리지 못하는 것 죄다
죄다 죄다 죄다
너는 버리고 있구나
흰머리 물들일 줄도 모르고
빈 하늘만 이고 서 있구나
돌아가는 길
내다보고 있구나.
♧ 하늘 억새 - 박종영
산을 오르다 보면 억새는
언제나 산을 향해 머리를 푼다
은빛 웃음으로 조아리는
한 움큼 이별의 말씀,
산 위로, 산 위로만 올려보내는 춤사위
풍경 한 폭 멈춰선 산허리 어디쯤,
큰 고요가 서러워서
저토록 머리 풀고 이별을 손 흔드는 것인가?
산굽이 돌아 바라만 봐도 오싹해지는
저, 초록 물빛 선선한 바람따라
동동하게 여문 가을 들녘,
무더위 밀어내고 일어선 황토길에
보송보송 목화송이 하르르 하얀 웃음 흩날리고,
덩달아 나도 하얗게 흔들리고.
♧ 억새 - 권도중
지나올수록 할 말이 많고
살아갈수록 부대낌이 많은
이 언덕 오르기엔 숨차지만
저 언덕보다는 절실한 곳
가득한 가을로 오라
억새처럼 흔들리며
♧ 억새 숲에서 - 예당 조선윤
아름다움으로 가는 시간
사랑이 머무는 하늘가에
억새 숲을 걷노라니
가는 계절이 아쉬워
찬기운이 묻어나는 하늘 향해
흔드는 야윈 손이 애처롭다
가만히 노저어 가는 마음
스쳐 밀려오는 그리움
행여 맑은 소리 밟으며 올 것 같아
아늑한 노을빛 은빛 억새
푸른 창공 향하여
나는 고운 햇살 그리움으로
손짓하는 파도가 된다
아름다운 사랑도 언젠가는
때가 되면 저무는것을
괜스레 눈물이 핑 도는것은
세월이 가고 있음인가
가을은 조용히 흔들린다
억새도, 내 마음도 흔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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