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문학의 향기

우리詩 10월호와 억새

김창집 2011. 10. 13. 00:50

 

  생명과 자연과 시 ‘우리詩’ 10월호가 나왔다. 지난 8월에 있었던 ‘해변시인학교’ 화보를 시작으로 명사들의 애송시(박근 전 UN대사), 권두 에세이(이재부) ‘낙엽의 언어 - 마곡사에서’, 특집으로 2011년 ‘우리시회 해변학교를 가다’를 실었다. 이달의 우리詩 25인선은 임동윤 차영호 황미라 박영원 주경림 박정래 백영희 이성진 이병금 이시훈 김선호 이상호 장혜승 정하해 민문자 하재청 최윤경 최재경 박승류 박동남 우기수 김대봉 김명 장수철 김민호의 작품이 선정되었다.

 

  특별기획은 스위스의 여류작가 일마 라쿠자의 산문 2편(수집벽, 아틀라스), 특별연재(4)/ 하종오 시인 ‘모든 살아가는 것들의 향토사’, 신작소시집 이성웅 시인의 ‘나비의 꿈’외 4편, 이어 ‘2011년 우리시회 해변시인학교 특집’, 기획연재(6) 시로 쓰는 사계는 정호 시인의 ‘민둥산의 가을과 억새’, 영미시 산책(51) ‘한 가지 기술(엘리자베스 비숍)’을 백정국 교수의 번역으로 실었다.

 

  지금 제주는 가는 곳마다 억새가 피어 가을이 깊었음을 알리고 있다. 어떻게 찍어야 더 멋이 있는지 여러 가지 찍어둔 사진을 모아, 우리시 10월호 ‘25인선’ 중 우선 아름다운 시 8편을 골라 같이 싣는다.

 

  

 

♧ 흐르는 산 - 임동윤

 

내 마음의 산 하나 있다

다가서면 멀리 달아나는 산

만질 수도

냄새를 맡을 수도 없는 산

 

그 산으로 달려가면

내 속엔 늘 새로움이 하나

또 다른 마음이 하나

그 속의 크고 높다란 산

그리고 보이지 않는 숲과 계곡

 

그 속에서 나는 흔드렸다

흔들리면서 바람이 되었다

눈먼 별이 되어 반짝거렸다

반짝거리면서 허공을 달려갔다

 

다가설수록 더 멀리

달아나는 산, 강물 같은 산

만질 수도

냄새를 맡을 수도 없는

내 마음 속의 산이 하나 있다

 

  

 

♧ 노니* - 차영호

 

변비가 도졌다

안색까지 누렇다

니가 직방이라고 천거한 약

텁텁, 조석으로 한 숟갈씩 퍼 넣으니

살만큼은 틔었다

 

꼭꼭 틀어 막힌 똥구멍 툭 틔우듯

내 속내에 엉겨 응어리져 있는 것들

말랑말랑하게 어르고 반죽하여

밖으로 내던져줄

묘약

어디 없니?

 

노니……

 

노느니

염불이나 하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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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ONI, 동의보감에서는 해파극, 또는 파극천이라 함.

 

  

 

♧ 큰 나무 당신 - 황미라

-- 영혼의 정원

 

단박에 알아봤지요 빛나는 이름, 천리 밖에선들 모를까요

 

허리가 반쯤 휘어져 있어도, 비틀걸음이어도, 앙상한 옆구리 벌레가 알을 슬어도, 속을 파먹은 새끼들 먼 곳으로 날아가 띄엄띄엄 소식을 전해도, 괜찮타야 걱정 말어… 마침내 몸 다 허물어져 오줌똥 못 가려도, 기억의 꼬투리만 남아도, 반짝 정신이 들면 바쁜데 어터게 왔서…

이 세상 불꽃에 흰 뼛가루만 남아도, 니들 편하게 아무데나 뿌리려므나… 그러고도 남을

 

  

 

♧ 아라 홍연 - 백영희

 

67호 묘비에 봉인된 정표로

전생에서 건너 온

고려시대의 연 씨앗 2개

함안군 성산 연못의 품에

한 송이 꽃으로 안긴다

투명의 연분홍 빛

아라 홍연의 이름으로

다시 꿈을 꾸는 여자

공간을 넘어와 웃고 있다

뺨에 새겨진 홍조 붉게 딛고

흐르고 흘러 살아온

담벼락을 찾아

아라가야시대에 잡은 손 놓지 않았다

먼먼 공간을 찢어

분홍빛 맨살에 흰 이빨 사이로

칠백년 전의 못다 핀

사랑의 고백 말한다

 

  

 

♧ 희망의 끈 - 이성진

 

한번쯤 절망하지 않은 사람이 있는가

희망의 끈을 잡고?

머릿속에 좋은 상상을 하자

 

좌절하지 않기

쓰러지지 않기

울지 않기

 

끝은 시작이다

강줄기를 참고 견디다 보면

바다가 보이듯

 

끝까지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면

마지막 순간

다시 시작이 온다

 

  

 

♧ 매혹 - 이시훈

 

비가 그쳐도

강은 아직 젖어 있다

 

무심코 떠내려 오는

꽃잎이거나 나뭇잎이거나

가벼운 이것들이 흠뻑 젖어

물에 향기나 색을 더해주면 좋으련만

젖은 강에 살을 섞어도

그림자만 살짝 보여줄 뿐

 

잡을 수 없는 것

가질 수 없는 것들은

아프도록 어여쁘다

 

  

 

♧ 뒷모습 - 김선호

쓸쓸한 하루가 등뒤에서 왔다

그림자를 길게 늘어뜨렸다

감정의 절반을 감추고도

표정이 없다

당신과 내가 앉았던 풍경이 그러했다

등뒤에서 가만히 안아주면

받아주는 손 없어 허전했다

어둠이 서서히 밀려오는 지루함 속에서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육체의 표면만 읽을 뿐이다

그 너머엔 뭔가 있으리란 기대를 품고

살아가지만

아침이면 또 다른 뒷모습만 보이며

살아가는 우리들

시계의 뒷면처럼.

 

  

 

♧ 시무지기 폭포 - 이상호

 

직선처럼 한 줄의

획을 죽 긋고 나면

 

떨어지는 소리는

굵고 힘찬 단말마

 

안개가

자욱하게 깔린

저 밀월의 낮은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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