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분꽃이 피기 시작한 게 7월쯤이니까 넉 달을
줄기차게 피어 왔다. 이제는 거의 야생이 돼버린
그 분홍빛 색이 가여워 한 번은 찍어 올리려 했는데
다른 꽃에 눈을 파는 바람에 씨가 맺혀 까맣게
변해서야 차례가 왔다. 그래 노란 분꽃이 남아 있는
조그만 골목 여관 앞에 것을 찾았더니, 아직은 해가
남아 있어서인지 조금은 힘이 없는 모습이다.
분꽃은 분꽃과의 한해살이풀로 높이 60cm 정도이고
줄기에는 마디가 뚜렷하며, 잎은 마주나고 끝이 뾰족한
달걀 모양이다. 여름부터 가을에 걸쳐 흰색, 빨간색,
노란색의 깔때기 모양의 꽃이 해 질 무렵부터 아침까지 핀다.
관상용이고 열대 아메리카가 원산지이다.
♧ 분꽃 - 김종제
해질녘이면
밖으로 우루루 몰려나와
손에 손에 든 촛불이
저녁에 핀다는 분꽃 같다
꽃들은 저마다
슬픈 전설을 지녀서
너른 광장에 핀 저 분꽃들
그 옛날부터
힘세다고 가볍게 짓밟은 순한 목숨이
무덤도 없이 헛되이 사라지지 않도록
제 몸을 태우면서
한 점 빛으로
새벽을 불러들이고 있는 것이다
저 꽃은 필시
단단한 담벼락을 무너뜨리겠다고
무리지어 피는 것이다
저 꽃은 분명
흐드러지게 올 새날을 보겠다고
기꺼이 피는 것이다
꽃 가까이 귀 들이밀면
닫힌 쇠문을 열어젖히려는 함성으로
먼 동이 터오고
갈라터진 입술을 적셔주겠다고
물 한 모금 같은 비가 내린다
뒤돌아서서 오랫동안 면벽하였으니
오늘은 밤으로 촛불을 들고나가
붉은 분꽃으로 활짝 피어나리라
♧ 분꽃 - 박인걸
짙은 화장
매혹의 입술
늦여름 햇살에
애타는 표정
은밀한 뒤뜰
진분홍 립스틱
발자국 소리에
곤두세운 귀
타고난 미모
터질 듯한 가슴
몇 밤을 지새워도
오지 않는 님아
기다림에 지쳐도
체념도 아쉬워
몸을 비틀며
지지 못하는 꽃이여.
♧ 노란 분꽃 - 목필균
분꽃이 피었다
아침 출근길에
노란 나팔소리가 난다
햇빛을 모으는 나팔소리
자음과 모음이 만들어 내는
무수한 의성어들
뚜뚜뜨---뚜뚜뜨---
유년의 뜨락에
곱게 접혀있던 향기까지
소리로 진동한다
바람처럼 쓸려간 소리들
분꽃이 필 때마다
환청으로 들린다
한 시절을 접던 가슴앓이들
뽀얀 속살 감추려고
그렇게 밖으로만 귀를 열다가
가슴에 까만 씨알을 박는다
♧ 분꽃 - 우제봉
여명을 연 햇살에
곱디곱게 맑은 웃음 한아름
가슴 넘치는 여인이여
밤새도록 이슬에 젖어
정갈하게 피어난 맵시를
눈여겨 보노니
싱싱한 파란 입술
활짝 연 치맛자락 나부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향내가
천리향처럼 번지어
온 천지를 덮고 있구나
네가 주는 한 잔 두 잔 술에
어느 새 흠뻑 취해버려
온갖 시름은 향기로 날려보내고
마냥 너의 품에 안기어
네가 따라 주는 꽃분홍빛 술잔으로
가을의 술독에 푹 빠져들고 싶구나.
♧ 분꽃이 피었다 - 장석남
분꽃이 피었다
내가 이 세상을
사랑한 바 없이
사랑을 받듯 전혀
심은 바 없는데 분꽃은 뜰에 나와서
저녁을 밝히고
나에게 이 저녁을 이해시키고
내가 이 세상에 오기 전의 이 세상을
보여주는 건지,
이 세상에 올 때부터 가지고 왔다고 생각되는
그 悲哀비에 보다도 화사히
분꽃은 피어서 꽃 속을 걸어나오는 이 있다
저물면서 오는 이 있다.
'디카 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어느 일몰의 시각에 (0) | 2011.10.21 |
---|---|
마가목 열매로 약술이나 (0) | 2011.10.20 |
가을 바다 (0) | 2011.10.18 |
한로에 보는 쥐꼬리망초 (0) | 2011.10.10 |
한글날에 보내는 야광나무 (0) | 2011.10.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