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디카 일기

단풍잎의 빛나는 마음

김창집 2011. 10. 24. 07:52

 

 

단풍을 만나러 한라산 기슭에 다녀왔다.

태풍 때문에 상처 난 나뭇잎은 예전처럼

곱지 못했지만, 상처를 안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 웃을 수 있다는 게 대견스럽다.

 

곳곳에 박혀 붉게 물든 단풍만이 아니라

노랗게 물든 고로쇠나무나, 비목나무,

분단나무 잎도 곱기는 마찬가지다. 스스로

비우고 싶은 마음의 발로라고나 할까?

 

  

 

♧ 가을 단풍 - 권순자

 

몸을 뚫고 들어오는 저 붉은 바람

전신에 신열(身熱)이 오르고

여름내 시퍼렇게 피어오르던,

희망이 쑥쑥 자라던 몸속, 이제

못다 이룬 꿈들 뜨겁게 달아오르며 저들끼리 부대낀다

 

높은 휘파람 소리가 휘돌면서

뼈마디 두둑두둑 부딪치는 소리로

긴 밤 내내 몸살을 앓고 있는 가을 나무들

 

목이 부어오르고 쿨럭이는 가슴,

속에서 바람이 저들끼리 부서지면서

싸늘한 불꽃이 일고 있는 것이다

 

탱천한 분노에 얼룩진 눈물처럼 타오르는 불

신열이 사방팔방으로 전염되고 기침하는 나무들

밤새 부어오른 목 끝내 잠기며

탱탱해진 언어들 몸속에서 요동친다

 

간절한 눈빛 얹어, 햇살 전선을 타고 뿌려대는 절규,

잎 흔들며 나무들 붉은 구화를 하며

오랫동안 고이 품어온 소망 하나씩을

가을바람에 피워내고 있는 것이다

 

  

 

♧ 단풍잎 편지 - 박종영

 

어느덧 초록 숲이

생명의 자유를 바람에 맡긴다

행운을 기다리는 마음 위로

낙엽이 이별을 톡톡 건드리며

가을 숲을 불태우고 있었다

하늘같은 그리움을 받고 싶다던

옥이 마음이 짠하고 혼탁한 세월,

짧은 그리움이라도 가슴에 담았으면

속이고 가는 세월 원망은 않았을 것을,

산길을 걷다가 오래 간직한 얼굴이 생각나

살며시 꺼내 듣는다,

낭랑한 목소리 어느새

숨어 안기는 그대 관능의 웃음소리,

오늘은 갈색 화병에 들국 동그란 입술 꽂아두고

누구에게 단풍잎 편지를 곱게 띄울까?

발가벗은 나무들이 웅성거리는 가을 산,

붉은 잎마다 흥겨움이 옹골지다

    

 

  

 

♧ 단풍, 물들다 - 박재동

 

못나게 살아온 나의 삶이 미워질 때

 

단풍을 바라보았습니다

 

이제 가을이 되어

 

단풍이 붉게 물들 것을 생각하노라면

 

나의 몸도 그렇게 당신으로 물들어갈 것을,

 

아아~

 

나는 알지 못하였습니다

 

  

 

♧ 단풍나무 - 정진명

 

님 찾아 물길 3만리를 달려온 허황옥은

처음 내린 가락국의 바닷가 언덕에서

도착 선물로 바지를 벗어주었다는데,

 

늦가을 비가 밤새 뿌리고 간 아침,

겨울의 뜨락으로 내려선 단풍나무는

치마를 벗어 바닥에 곱게 깔아놓았다.

 

알록달록 수놓은 황후의 비단치마를

한 동안 황홀한 마음으로 매만지다가

아득한 남쪽 하늘을 돌아다본다.

 

제왕이 아닌 내게 남은 일이란,

치마를 다시 입혀주러 임자가 올 때까지

담벼락에 기댄 빗자루를 깨우지 않는 것뿐.

 

 

 

  

 

♧ 단풍잎 - 박인걸

 

나뭇잎의 황혼은

꽃잎 보다 아름답다.

살아 온 履歷이력이

색깔로 드러난다.

 

짧은 생을 살았어도

불처럼 뜨겁게

사랑을 퍼붓더니

핏빛 보다 더 붉다.

 

사랑하는 삶은

최후 한 방울 진액까지

아낌없이 짜내어

주는 것이리.

 

움켜잡으며 살아온

꺼무칙칙한 잎들 사이에

홀로 황홀한 단풍이

한없이 부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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