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 기관지에 쓸 원고를 어제 못 쓴 때문에
오늘은 꼭 탈고시켜 보내야 한다고 다짐하고
아침을 먹고 책상에 앉았다. 어떤 글이든
메시지가 들어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며
써 보내고 밥을 먹으니, 갑자기 모초등학교의
은행나무가 궁금해졌다.
학교 있을 때는 용담동 교정에서 옮겨 놓은
교사 뒤의 잎에 띠가 있는 커다란 은행나무와
옮겨 심은 지 얼마 안 되는 구내식당 옆의 몇 그루
은행나무를 옆에서 보며, 계절의 흐름을 느꼈었다.
화요일 따라비오름 다녀오고는 이틀 동안 꼼짝 안했기
때문에 운동 삼아 내려 내려갔는데, 그 사이에 운동장
동쪽 은행나무는 없어지고, 스탠드를 만들어 놓았다.
운동장과 교사로 이어지는 곳 대부분은 거의 시멘트로
싸발라지고, 아주아주 편하고 깨끗하게 변해 있었다.
아! 할 말이 없다.
♧ 감 - 권오범
야들야들한 피부 행여 짓눌려 다칠까봐
가문끼리 또래끼리 따로따로
박스쪼가리에 앉아 호객하다
나와 눈 맞은 골목
아, 요것들은 분명
가파른 보릿고개 언저리서 엄니한테
툭 하면 발치에 자숫물 벼락 맞던
붴문 밖 왼편짝
주렁주렁했던 그리움 덩어리들
목욕시키기조차 조심스럽게
지문에 전해지는 농익은 관능미를 보아
신세대보다는 황톳빛 실루엣에 빗발치는
흑백영화처럼 늙은 입에게 사랑 받을 팔자
좌불안석인 혀가 욕망을 주체할 수 없어
옷 벗겨 아랫도리에 걸친 채 알몸 헤집다 보니
경험상 어쩐지 거침없는 느낌
이즘은 게나예나 불임이 유행일까
♧ 가을이 오면 잘 익은 감처럼 - 정세일
가을이 오면 나무에 달려
껍질이 얇아진 감을 만져봅니다.
입안은 벌써 물렁거리는 단맛과 떫은맛이
하나 가득 오물거리며 있습니다
가을이 오면 먼저 마음이 감이 됩니다
감처럼 얼굴이 붉고
해처럼 얼굴이 붉어지면
손으로 대기만 해도
익지도 않았는데 나무에 달린 감을 만져보는 것은
그만큼 기다려온 날들이 손꼽아 길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낮은가지보다 휘어지는 높은가지로 올라가고 싶은 것은
높이 달려있는 붉은 감이 가을 햇살이 비끼는 곳에서
더욱 더 익어보이며 손짓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심어놓은 감나무는 올해도 풍성하게 달려있습니다
잎도 무성한 감나무같은 나 자신도 바라보면서 익고 있습니다
감나무밑에는 시원한 들마루를 꺼내어 놓았습니다
내가 익을때마다 감처럼 바라봐주시고
시원한 그늘아래서 부채로 나의 마음을 부쳐주십시오
당신이 있는 쉬시는 그곳에서 나는 감처럼 익고 있습니다.
♧ 감나무 - 목필균
세월의 행간을 읽으며
바람이 스쳐간다
단풍진 잎새 떨구고도
지워지지 않은 그리움이
앙금으로 내려앉았는지
오십 년 뿌리 내린
감나무 여기저기 옹이졌다
까치밥으로 남겨진
몇 알의 감처럼
누구에겐가
하루치 양식이 될 수 있다면
낡아진 육신쯤이야
무디어진 신경쯤이야
낙엽으로 떨구어져도 좋을
빈가지 흔들어
섬세하게 그물 친 하늘에
구름 만 걸려드는
11월 끝자락
♧ 꽃보다 붉은 감 - 소양 : 김길자
가깝지 않은 사이가
너무 가까운 사이보다
편하고 좋을 때가 있는 것처럼
잎새가 다 떨어진 나뭇가지에
노을꽃보다 더 붉게
눈발 휘감기는 영하의 날씨를 안고
허공에 피었다
바람보다 먼저 붉어진 감
그 앙상한 가지에
겨울도 아닌 것이
봄도 아닌 것이
시치미 뚝 떼고 꽃처럼 피어 있다.
♧ 가을 감나무에게 - 김형오
열매
다 털리고
푸르던 것 차근차근 내어주고
껍질끼리 까실까실 비비며
빨갛게 불거진 제 뿌리를 믿으며
실핏줄에도 출렁출렁 달리던
물길들은 언제나
벼랑을 만나면 되짚어오는 것인가
몸 빼기 바람빼기 다음
뱃속 껄렁한 글
씨마저 다 지우고
가지마다 저 까만 젖꼭지
어머니 우리 어머니
끝말 같던
처음 말까지 모두 모여
한번쯤 꼭 참말이 되는 때 있어
시린 하늘에 엎드려 대꾸도 없이
맘 놓고 벗어내는 허물
♧ 감나무 아래에서 - 김종제
감나무 아래에서
내 생의 노오란 감 잡았다
저 감 아직 떫어서
먹기에 이르니
그냥 앉아서 구경만 하는 것이다
새들도 몇 번 쪼아 먹은 뒤에 버려서
감들이 시신처럼 뒹굴고 있다
한 철 잘 놀았다고 떠나간 뒤라
생이 무소식이다
지난 폭우에도 가뭄에도
꿋꿋하게 잘 버티더니
새롭게 또 이별을 준비하고 있다
감나무 아래에서
감 한 알 얻으려고
언제나 나는 서성거릴 뿐이다
저절로 떨어진 감 하나 들고
먹지도 못하고 버리지도 못하고
그 둥글고 단단한 삶에
감명이 깊어서
오래 바라만 보고 있는 것이다
비가 올 것이라고 예감하더니
감들이 후두둑 떨어진다
감나무 아래에서
감감한 나를 알게 되어
그저 감사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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