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일요일 성판악 코스로 사라오름에 오르며
바닥에 쌓인 눈과 나무 위에 소복하게 앉은 눈만
보고 가다가 1000m고지에서 1100m 고지로 바뀔
즈음, 갑자기 나무 색이 달라 올려다보니, 허공에
뻗은 가는 나뭇가지에도 눈이 온통 하얀 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상고대는 아니지만 가지 위에 낮은 기온과 습기와
소슬바람이 만나 순간적으로 채색해 놓은 그 모습이
가슴을 뛰게 한다. 처음 1100도로에서 상고대를 만났을
때, 산호 숲으로 묘사하면서 나름 색즉시공 공즉시색을
깨달은 적이 있는데, 언제 보아도 신기하다. 잠시 ‘햇빛만
조금이라도 비춰졌으면 쨍한 사진 나올 텐데.’하는 마음이
들었으나, 이 정도도 감지덕지 욕심을 버리기로 했다.
♧ 겨울나무는 눈을 먹고 산다 - 정군수
겨울나무에 눈이 쌓였다
지하도 음울한 울림을 타고
찬송가가 들려온다
내 주를 가까이 하기에는
십자가 짐 같은 고생이라
얼어터진 손등이 낯설지 않은
늙은 장님이
마이크를 잡고 찬송가를 부른다
거지는 일요일에 쉬지도 않나
성경가방을 든 사람들은
성당으로 교회당으로
바삐 지하도를 빠져나간다
십자가 첨탑에 눈이 쌓였다
겨울나무에도
축복처럼 눈이 쌓였다
겨울나무는 눈을 먹고 산다
♧ 겨울나무 얼음꽃 - 최해춘
세상 인연 털어버린
마른 가지에
눈 먼 바람 몰고 온
얼음 꽃송이
까칠한 어깨위에
둥지를 튼다.
칼바람 막고 서서
저 혼자도 힘겨워 헉헉 대는데
햇살에 반짝이는
얼음 꽃송이
스산한 산골짝에 축제를 연다.
시리게 담금질한
마른 몸뚱이
아픔으로 배어드는 축제에 앉아
상흔처럼 찍어가는
겨울 나이테.
햇살이 쓰다듬는
오후 한나절
눈물로 떨어지는 푸른 날의 꿈
방울방울 모두어
발끝에 묻고
아름아름 피어날 봄을 키운다.
♧ 겨울나무 - 도종환
잎새 다 떨구고 앙상해진 저 나무를 보고
누가 헛살았다 말하는가 열매 다 빼앗기고
냉랭한 바람 앞에 서 있는
나무를 보고 누가 잘못 살았다 하는가
저 헐벗은 나무들이 산을 지키고
숲을 이루어내지 않았는가
하찮은 언덕도 산맥의 큰 줄기도
그들이 젊은 날 다 바쳐 지켜오지 않았는가
빈 가지에 새 없는 둥지 하나 매달고 있어도
끝났다 끝났다고 함부로 말하지 말라
실패했다고 함부로 말하지 말라
이웃 산들이 하나씩 허물어지는 걸 보면서도
지킬 자리가 더 많다고 믿으며
물러서지 않고 버텨온 청춘
아프고 눈물겹게 지켜낸 한 시대를 빼놓고
♧ 겨울나무 - 장미숙
마른 잎사귀
뚝. 뚝.
떼어버리고
흰눈 속에 든다
가으내 토하지 못한 사랑
검게 멍든 가슴
어깨 누르던 위선 조각들
훌훌 벗어 던지고
하늘 물 목욕
구름으로 물기 거둔
알 몸
흰 눈 밟고 서있는 나무
겨울에는
진실한 사람 만났을 때처럼
허위의 옷을 싶다
♧ 겨울나무 - 최진연
손끝이 오므라드는 추위를
말없이 견디고 섰다.
때로는 이를 악물고
웅― 웅― 신음 소리도 내지만
세상이 뒤흔들면 흔들릴지라도
꺾이지 않는 선비처럼 서 있다.
꽃들이 허드러지게 핀
幻想환상의 뜰에서
舞蹈무도의 절정에 멈춰 선 신사.
보라, 저 침묵의 빙벽 속에
타오르는 불길
녹아 흐르는 겨울밤을.
어느 저녁에는
혼례 날의 신부처럼 오는
눈을 맞으면서
폭우와 폭염의 그 여름을
명상하기도 하지만,
맨주먹으로 홀로 서서
겨울 군단과 맞서 싸우는 용사.
봄은 그에게로
팔을 펴 들고 기다리는 품으로
어디만큼 오고 있는가.
내 정신이
한 그루 나무라면
팔짱조차 지르지 않는
겨울나무가 되리라.
내 시가 한 송이 꽃이라면
겨울나무 눈꽃으로 피어나리라.
♧ 겨울나무 아래에서 - 구재기
가난은
가슴에 머무르되 고이지 않는다
가난은 오직
홀로인 진리일 뿐
결코 이브의 죄가 아니다
그러나, 가난이여
세상은 네가
참됨을 말하여도 믿지를 않는구나
가난은
겨울숲 겨울에 머물러
내일의 보상을 꿈꾸지 않는다
위장된 축복을
끝내 기다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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