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온이 많이 내려간 강원도에선 눈이 많이 내렸다는데
아직 10도 정도밖에 안 되는 제주의 중산간과 해변엔
비만 내린다. 우보악의 그 아름다운 능선에 섰을 때,
시샘하듯 내리는 비, 조금만 더 기온이 내려갔더라면
눈으로 내렸을 그 겨울비가 소주를 꺼내 마시게 했다.
내가 오름에 심취되어 있을 때부터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바람이 부나’ 개의치 않고 산에 오르는 버릇이 생겼기로
웬만한 비에 흔들리지 않는다. 어쩌면 추운 겨울 더 산뜻한
빛을 띠는 이끼나 촉촉한 습기를 머금고 싱싱하게 자라는
이 버섯과 같은 습성을 닮아 가는지도 모를 일이다.
♧ 숲의 그늘에서 자리는 버섯 - 김용범
숲의 힘은 그늘에 있다. 버섯들이 은밀하게 자라나는 내 숲의 그늘. 버섯의 포자들이 음험하게 파고 들어와 자리를 잡고 있다. 버섯은 어둠의 힘으로 자란다. 어둠이 싹을 먹으며 시나브로 제 몸을 키우며 독기를 만들고 있다. 숲은 하늘을 가리고 가려진 하늘은 그늘을 만든다. 모종의 음모처럼 그늘에서 버섯의 힘은 길러지고 있다.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지 않는 곳마다 그늘이 있다. 그늘마다 독기를 품은 버섯이 자란다. 겉모양이 유순한 버섯일수록 반드시 맹독 있다.
♧ 버섯 - 김기홍
밤이 되면 피었다.
아무렇게나 살 수 없는 몸
욕망도 소망도 버리고
가까스로 숨 쉬는 이 그늘
키 큰 것들 햇살 다 차지하고
억센 것들 바람 다 차지하고
질긴 생명 버릴 수 없어
밀려온 곳 울 밑이나 퇴비 속
잎은 피워 무엇하랴
꽃은 피워 무엇하랴
귀는 틔워 무엇하랴
꽃 숲에서도 꽃이 될 수 없고
풀밭에서도 풀이 될 수 없는
우리 홀씨로 남아
침묵의 소리로 이 세상 보나니
햇살이나 막아다오.
바람이나 막아다오.
그대 감상 한 자락 흔들릴 때
슬픔만 모아 삭혀 피어나리니
썩은 몸 속 향기 지녀 피어나리니
누가 음지의 독버섯이라 이름하느냐
♧ 독, 버섯을 보다 - 김종제
내 몸의 숲이 썩어야
화려한 버섯을 볼 수 있는 것이다
내 몸의 나무가
괴질로 문드러져야
매서운 독을 품을 수 있는 것이다
날카로운 톱에
몸통이 반듯하게 잘려나가고
번쩍이는 도끼에
허리가 우지끈 동강이 나고
내 존재가
순식간에 사라져야지
덮고 있는 흙의 이불을 걷어내고
우뚝 일어설 수 있는 것이다
사패산, 누가 부러뜨렸는지
검게 썩어 나뒹구는 살갗에
독을 품은 버섯이
숨어서 나를 노려보고 있다
눈빛조차 칼날이다
수없이 베인
가슴속의 상처들이
후두둑 낙엽으로 밟힌다
먼저 떨어진
저것들도 내 몸처럼 썩었다
내가 밤새 품고 있었으니
한(恨)이다
아침 일찍 사패산에 들어 있었으니
내가 독(毒)이다
네 번을 패하고
절정의 바위 위로 올라섰으니
독버섯 같은 놈이다
♧ 독버섯은 더욱 반짝이고 - 임영준
처음엔 모두 꺼림칙했지만
보고도 못 본 척 지나쳤다
윤기가 잘잘 흐르는 독버섯들이
서서히 번져갈 때
곳곳에 현수막이 걸렸고
팻말이 꽂히기도 했지만
사람들은 거리끼지 않고
따먹거나 싸가고 있었다
개중에는 씨앗을 채취해
양식을 한다고도 하고
산삼을 찾는다고 나섰다가
아예 독버섯으로 바꾸었다는
자들도 생겨났다
독을 중화하는 재주들이 생기고
식용보다는 독버섯을
선호하게 되었을 때
멸종하리라 예견되었지만
반짝이는 독버섯은
당당히 영역을 넓혀
결국 그 산을
점령해 버리고 말았다
♧ 나를 유혹한 망태버섯 - 김귀녀
아무도 없는
나무둥치 밑에서
얼금얼금한 망사 옷 샛노랗게 차려입고
너 만의 꿈을 펼치는구나
어느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양재사의 꿈을 꾸는 것일까
날씬한 허리 그물 안에 감추고
졸참나무 숲속 풀잎위에 재단을 하네
시골아낙의 옷을 만들고 있을까
잎들이 바르르 떨리고
바람은 한 땀 한 땀 수를 놓고 있네
손으로 전해오는 땅속의 말들
가슴 속에 전하며
그늘 속에서 흔들리네
밤새 기다려도
끝내 오지 않던 너를 수놓던
그 밤에도
바람 불었네
돌아서는 길목엔
늘 발자국만 서성이고
♧ 버섯 F - 김경희
그것은
상식적인 식용이 아닙니다
송이나 표고 느타리도 아닌
식물과 동물의
변이된 이후 같습니다
섬뜩하게 말 없는
섬광 직전의
대기된 화려한 이마아쥬,
666바코드 무늬에 꽂핀
익명의 보고서 같습니다.
탐욕의
멈출 수 없는 바퀴
문명, 그 우후에 돋은
어이없을 핵우산 같습니다.
발효된 경고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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