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토요일 4.3기행으로 찾아간 잃어버린 영남마을엔
이 흰 꽃잔디가 영혼을 위무하듯 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서귀포시 영남동은 영주산(瀛州山) 남쪽 마을이라는
마을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한라산 남쪽 밀림이 끝나는
지경에 고즈넉이 자리하고 있다.
16가호가 오순도순 모여 살던 영남리 주민들은
예부터 화전을 일궈 보리나 고구마를 재배했고,
숯을 굽고 사냥하며 살던 평화로운 마을인데
1948년 11월 18일 토벌대가 초토화 작전을 벌이며
마을에 난입해 닥치는 대로 총을 쏘아 주민들을 학살하고
불을 질렀다. 이런 토벌대의 만행에 해안마을로 내려갈
생각을 못하고, 마을 위 어점이악 주변의 밀림과 자연동굴에
몸을 숨기고 살다가 토벌대에게 90명 중 50여 명이 희생되었다.
꽃잔디는 지면패랭이라고도 하며, 아메리카 동부 원산인데,
건조한 모래땅에서 나는 여러해살이풀로 높이 10cm이다.
가지가 많이 갈라지고, 가지가 지면을 긴다.
잎은 마주나며, 길이 8~20㎜, 가장자리는 밋밋하고,
털이 있다. 꽃은 붉은색, 자홍색, 분홍색, 흰색 등이 있다.
꽃받침은 깊게 5갈래, 갈래는 피침형. 화관은 통 모양,
깊게 5갈래로 갈래는 끝이 오목해진다. 열매는 삭과이다.
♧ 꽃잔디 - 김윤현
몸이 저렇게 바늘처럼 가늘어서
그 자체로 이미 꽃 같은 삶이다
잎이 몸과 다르지 않고 보면
이미 그 자체로 생은 꽃이다
바람이 조금 세게라도 불면
큰 나무들은 온몸이 이리저리 흔들리다가
눈물처럼 잎을 뚝뚝 떨어뜨려 울지만
꽃잔디는 말도 없고 흔들림도 없다
한 송이 눈이 내려도 휠 것 같고
한 줄기 비가 내려도 꺾일 것 같지만
무엇에도 휘지도 않고 꺾이지 않는다
작아야 허물이 줄어든다는 것을 안다
그러고도 몸보다 훨씬 큰 꽃을 피운다
자신을 위해서는 작게 가지려 하고
남을 위해서는 크게 하려는 삶이다
꽃잔디는 꽃을 피우지 않아도 꽃이다
♧ 꽃잔디 - 정성수
바람이 불고 있었다. 언덕에서
부는 바람은 불꽃이었다.
꽃잔디는 불꽃에
하염없이 타고 있었다. 처음이자 마지막인양
불꽃은
이 가을이 다 가기 전에
한 번은 화려하게
죽어도 좋다는 듯 목숨이 다 하도록
봄바람이 되어
속절없이
속절없이 꽃잔디를 태우고 있었다.
깎아도 깎아도 자랄 것 같은
불두덩 위의 꽃잔디.
깎지 않은 부드러운 꽃잔디가 밤새 사랑스러웠다.
♧ 꽃잔디 - 심시인
교육원 가는 길에 꽃 잔디
한 놈은 피고 한놈은 지고
차암 오래도 피고 지네요
한 놈씩 피면
안 이쁜 것 지들도 알아
무리지어 피고 지니
통통 튀는 새내기 교육생들
가던길 멈추고
한참을 눈맞춤 하다 가네요
♧ 잔디는 언제나 청춘이다 - 정영자
연초록빛 새순은 아름답다.
차가운 겨울 속에 이쁘게 고마운 생명,
뜨거운 기다림으로
하늘을 향해 올리는 그의 환희,
싱그러운 생명이기에 더욱 감사하다.
마른 잔디 밑뿌리에
초록잎은 고개 내밀어
짓밟히고 짓밟혀도
잔디는 언제나 청춘이다.
한세월 돌아보면
살고 사랑하는 법,
길이 조금 보인다.
법이나 질서는 가장 기초적인 상식
상식을 찾아 걸어온 혼란의 시대,
지금은
막막한 사람들의 등불이 되고,
외로운 사람들의 힘이 되었기에
부르튼 지구에도 새 잎은 푸르다.
♧ 꽃잔디를 좋아하는 이유 - 곽정숙
내가
꽃 잔디를 좋아하는 이유는
네 스킨 냄새를 기억하기 때문이다
내가 보라색을 좋아하는 이유는
신비로운 모습 때문이다
내가 노래를 흥얼거리는 이유는
잊혀져가는 너를 부여잡고
불러대기 때문이다
♧ 꽃잔디 - 이영지
--새벽기도. 1119
땅에서
불이나자 소방차 달려오다
취하여
꽃불보고
취하여
정신 잃고
하루를 다 보내고도 불을 끄지 못하고
이틀을
다시와서
또 보다 하늘 멎고
달마저 오는 줄도 모르고
다시 와서
마음꽃 잔뜩 붙이고 땅 사람이
되는 날
몸에서
꽃이 일고
바람이 꽃이 되어
잔디를 이루면서
입에다 꽃을 물고
말하랴
꽃을 말하랴
꽃불이라
말하랴
♧ 환상의 정원 - 김영천
--무안군 몽탄면 사창리
미리부터 울컥 향기가 밀려오는 것이
해일 같아 놀랍더니
꽃잔디 우루루 피어 제들끼리 즐겁구나
귀화요초 속에 드문드문 수줍은 토박이 자생꽃들이
더러는 꽃 머물고
또는 활짝 피어 반긴다
매발톱, 골단초, 솜털꽃, 둥글레에 할미꽃까지
어느 하나 반갑지 않은 것이 없으나
담장 아래 수줍은 듯 봄맞이 꽃이 환하다
그 작은 가슴마다 순백의 美를 품어
몰래 그 웃음을 마주 웃는다
저리 곱던 것들, 그 향그러운 것들이
아직도 내 어느 언저리에 남아
날마다 저리 피고 지는가
♧ 27* - 박재열
농장에 꽃잔디가 피어 있다, 녹색 안감의 빨간 스커트,
꽃잔디의 발등을 밟는다, 꿈틀 놀라는 빨간 스커트, 그러나 얌전하고 요염하다, 건드리면 확 타오른다, 앙칼지다
나는 싱겁게 꽃잔디를 엉덩이로 짓누른다, 꽃잔디는 자주색 원피스를 뒤집는다, 요염한 꽃무늬 번진다,
내 몸이 빨갛게 물들다가 끝내 퍼래진다, 근육이 자루 속 쥐처럼 불끈거리며
엉덩이 밑 원피스에서 희고 빛나는 다리가 나온다, 미끈한 다리, 매혹의 다리, 나는 박수를 친다
꽃잔디가 길게 S자로 휘어지더니 엉덩이 밑을 빠져나간다,
나는 꽃잔디가 떠난 잔디를 말았다 편다, 내 영혼도 따라 말았다 편다, S자 자주색 관능이 뒤따라 기어간다, 길고 좁은 짐승이 못가에 흐드러지는 영산홍을 못 이겨 쉬 쉬 창처럼 스민다. 빨간 영혼, 하얀 영혼, 까만 영혼이, 깜짝 물러선다,
그러나 꽃잔디는 원피스 밑으로 계속 허연 매혹을 드러낸다, 유혹의 다리, 나는 유혹의 다리를 곁눈질한다, 이제 에덴은 준비되었다, 스미지 마라, 못물에 비친 꽃망울의 수술이 갈라진다, 갈라진 짐승도 에덴에서 자주색 원피스를 입는다, 물고기들이 대신 미끈한 비늘로 유혹하리라. 깜빡깜빡 공중에서 견고한 성이 마지막 방호벽을 무너뜨린다, 파란 원피스를 입은 요정이 내 몸의 아홉 입구를 열고 가루처럼 들락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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