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종일 비도 아니오고 바람도 덜하더니
밤이 되면서 비를 몰고 와 한껏 휘날린다.
여름내 못 살게 굴었던 열대야와
적조로 병들었던 남해바다를 한껏 휘저어
푸른 하늘과 바다로 돌려보내려무나.
그간 힘들어 했을 어민의 바다에
맑고 푸른빛을 찾아주라.
일요일, 수월봉과 당산봉에서 바라본
하늘과 바다.
♧ 태풍 - 권오범
바다가 열 받아 낳은 외눈박이
영양가 많은 어미 체온 먹고 거리낌 없이 자라
어미 뱃가죽 출렁이게 짓밟고 회오리치는
불효막심한 것
비구름 끌어안고 성숙해지면
힘 주체 못해 몸부림치다
뭍에 올라
파괴본능 드러내놓고 천방지축
종요로운 다리 잘라 팽개치고
산허리, 냇둑, 길 예저기 베어 먹은 지난 상처
아물지 못해 벌겋게 덧났건만
다시 넘보는 피도 눈물도 없는 몹쓸 것
온난화와 정분나
다산 소문 파다한 바다
심심하면 쑥대밭 만들러 올 고집불통 등쌀을
억겁의 붙박이 바위인들 어떻게 버티랴
♧ 태풍 - 이지영
너를 잊는 건 태풍 탓만은 아니다.
빗줄기가 땅을 후들겨치고
비수로 내려 꽂아도
꿈쩍 않던 너에 대한 믿음
끝내 태풍으로 와
질긴 내 인고의 타래를 푼다
열번에 열번의 실망이 체념되어
제한 수위를 넘다가 만수위로 차올라
바다도 삼킬 것 같은 저 싯뻘건 동맥 핏줄
번쩍번쩍나래치며 폭우로 퍼붓는다
피할 수 없는 물줄기 따라
떠내려간다 떠내려간다
고통과 형벌, 더러운 것들
가라, 멀리가라
가까운 사람 먼 사람 다 쓸어가라
강물로 떠내려와 깊은 늪속에 빠져
천줄기 만줄기 구슬 눈물 쏟다가
불현듯 너 그리워 옷자락 붙들고 다시 기어오르고 싶은
불치의 병
누군가의 마음 창가에 무지개 띄우며
순수의 둥글음으로 살기를 원했었다
그렇게 애쓰다 애쓰다 떠내려 가는
내 작은 목소리의 끝은 무인도
내, 너를 잊는 건 태풍 탓만은 아니다.
♧ 태풍 - 홍일표
독수리, 독수리떼다 너무 무거워 날지 못하는 고만고만한 삶의 덩어리들 머리채 휘어잡아 날려버린다 뒤집어버린다 지상에 게딱지처럼 달라붙어 전후좌우 가지런히 정돈된 질서가 마뜩찮은지 어지러이 흐트려 놓는다 난동이다 야생의 거친 짐승이다 한 번도 젖어본 적 없는 유리창의 차가운 가슴을 부수고, 자리 한 번 옮길 줄 모르는 소나무의 외고집을 뿌리째 뽑아던진다 항아리의 숨통을 막고 있는, 무거운 모자 뚜껑이 날아가고, 허명으로 번쩍이던 거리의 간판도 한순간 떨어져 부서진다 수천 리 질주하던 바람이 자진하여 쓰러진 지상의 한켠, 하늘에 새로 돋은 별들이 파란 눈을 반짝이며 폐허의 한 귀퉁이를 조용히 응시하고 있다
♧ 태풍의 눈 - 이지엽
얼마나 외로우면 저렇게 몸부림치며 휘몰아치는 것일까요
북 태평양 그 먼 바다에서 아주 은밀히 태어나
고온다습한 공기를 끌어모으고
적운을 만들고 더 빠른 속도로 나선형 돌개로 변해
가로막는 모두를 날려보내고 오로지 뭍을 향해 돌진하는
저 고독한 사내의 그리움 덩어리
그 슬픈 눈, 유혹하지 마세요
지름이 10킬로미터나 되는 커다란 눈
불타는 적도의, 붉은 저 사랑의 눈!
아니 푸르고푸르고루르고 깊은 눈!
한 번 잡아당기면 결코 거부할 수 없는 야성이 그에게는 있답니다
♧ 태풍 - 나희덕
바람아, 나를 마셔라.
단숨에 비워내거라.
내 가슴속 모든 흐느낌을 가져다
저 나부끼는 것들에게 주리라,
울 수 있는 것들은 울고
꺾일 수 있는 것들은 꺾이도록.
그럴 수도 없는 내 마음은
가벼워지고 또 가벼워져서
신음도 없이 지푸라기처럼 날아오르리.
바람아, 풀잎 하나에나 기대어 부르는
나의 노래조차 쓸어가버려라.
울컥울컥 내 설움 데려가거라.
그러면 살아가리라.
네 미친 울음 끝
가장 고요한 눈동자 속에 태어나.
♧ 태풍 - 김상용
죽음의 밤을 어질르고
문을 두드려 너는 나를 깨웠다.
어지러운 명마(兵馬)의 구치(驅馳)
창검의 맞부딪힘,
폭발, 돌격!
아아 저 포효(泡哮)와 섬광!
교란(攪亂)과 혼돈의 주재(主宰)여
꺾이고 부서지고,
날리고 몰려와
안일을 항락하는 질서는 깨진다.
새싹 자라날 터를 앗어
보수와 저애(저碍)의 추명(醜名) 자취하던
어느 뫼의 썩은 등걸을
꺾고 온 길이냐.
풀 뿌리, 나뭇잎, 뭇 오예(汚穢)로 덮인
어느 항만을 비질하여
질식에 숨지려는 물결을
일깨우고 온 길이냐.
어느 진흙 쌓인 구렁에
소낙비 쏟아 부어
중압(重壓)에 울던 단 샘물
웃겨 주고 온 길이냐.
파괴의 폭군!
그러나 세척과 갱신의 역군(役軍)아,
세차게 팔을 둘러
허섭쓰레기의 퇴적(堆積)을 쓸어 가라.
상인(霜刃)으로 심장을 헤쳐
사특, 오만, 순준(巡逡) 에의 버리면
순직과 결백에 빛나는 넋이
구슬처럼 새 아침이 빛나기도 하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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