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디카 일기

태풍, 그 반란의 회오리

김창집 2012. 8. 28. 05:39

 

하루 종일 비도 아니오고 바람도 덜하더니

밤이 되면서 비를 몰고 와 한껏 휘날린다.

 

여름내 못 살게 굴었던 열대야와

적조로 병들었던 남해바다를 한껏 휘저어

푸른 하늘과 바다로 돌려보내려무나.

 

그간 힘들어 했을 어민의 바다에

맑고 푸른빛을 찾아주라.

 

일요일, 수월봉과 당산봉에서 바라본

하늘과 바다.  

 

 

♧ 태풍 - 권오범

 

바다가 열 받아 낳은 외눈박이

영양가 많은 어미 체온 먹고 거리낌 없이 자라

어미 뱃가죽 출렁이게 짓밟고 회오리치는

불효막심한 것

 

비구름 끌어안고 성숙해지면

힘 주체 못해 몸부림치다

뭍에 올라

파괴본능 드러내놓고 천방지축

 

종요로운 다리 잘라 팽개치고

산허리, 냇둑, 길 예저기 베어 먹은 지난 상처

아물지 못해 벌겋게 덧났건만

다시 넘보는 피도 눈물도 없는 몹쓸 것

 

온난화와 정분나

다산 소문 파다한 바다

심심하면 쑥대밭 만들러 올 고집불통 등쌀을

억겁의 붙박이 바위인들 어떻게 버티랴   

 

 

 태풍 - 이지영

 

너를 잊는 건 태풍 탓만은 아니다.

빗줄기가 땅을 후들겨치고

비수로 내려 꽂아도

꿈쩍 않던 너에 대한 믿음

끝내 태풍으로 와

질긴 내 인고의 타래를 푼다

열번에 열번의 실망이 체념되어

제한 수위를 넘다가 만수위로 차올라

바다도 삼킬 것 같은 저 싯뻘건 동맥 핏줄

번쩍번쩍나래치며 폭우로 퍼붓는다

피할 수 없는 물줄기 따라

떠내려간다 떠내려간다

 

 

고통과 형벌, 더러운 것들

가라, 멀리가라

가까운 사람 먼 사람 다 쓸어가라

강물로 떠내려와 깊은 늪속에 빠져

천줄기 만줄기 구슬 눈물 쏟다가

불현듯 너 그리워 옷자락 붙들고 다시 기어오르고 싶은

불치의 병

누군가의 마음 창가에 무지개 띄우며

순수의 둥글음으로 살기를 원했었다

그렇게 애쓰다 애쓰다 떠내려 가는

내 작은 목소리의 끝은 무인도

 

내, 너를 잊는 건 태풍 탓만은 아니다.   

 

 

♧ 태풍 - 홍일표

 

  독수리, 독수리떼다 너무 무거워 날지 못하는 고만고만한 삶의 덩어리들 머리채 휘어잡아 날려버린다 뒤집어버린다 지상에 게딱지처럼 달라붙어 전후좌우 가지런히 정돈된 질서가 마뜩찮은지 어지러이 흐트려 놓는다 난동이다 야생의 거친 짐승이다 한 번도 젖어본 적 없는 유리창의 차가운 가슴을 부수고, 자리 한 번 옮길 줄 모르는 소나무의 외고집을 뿌리째 뽑아던진다 항아리의 숨통을 막고 있는, 무거운 모자 뚜껑이 날아가고, 허명으로 번쩍이던 거리의 간판도 한순간 떨어져 부서진다 수천 리 질주하던 바람이 자진하여 쓰러진 지상의 한켠, 하늘에 새로 돋은 별들이 파란 눈을 반짝이며 폐허의 한 귀퉁이를 조용히 응시하고 있다   

 

 

♧ 태풍의 눈 - 이지엽

 

얼마나 외로우면 저렇게 몸부림치며 휘몰아치는 것일까요

북 태평양 그 먼 바다에서 아주 은밀히 태어나

고온다습한 공기를 끌어모으고

적운을 만들고 더 빠른 속도로 나선형 돌개로 변해

가로막는 모두를 날려보내고 오로지 뭍을 향해 돌진하는

저 고독한 사내의 그리움 덩어리

그 슬픈 눈, 유혹하지 마세요

 

지름이 10킬로미터나 되는 커다란 눈

불타는 적도의, 붉은 저 사랑의 눈!

아니 푸르고푸르고루르고 깊은 눈!

한 번 잡아당기면 결코 거부할 수 없는 야성이 그에게는 있답니다  

 

 

♧ 태풍 - 나희덕

 

바람아, 나를 마셔라.

단숨에 비워내거라.

 

내 가슴속 모든 흐느낌을 가져다

저 나부끼는 것들에게 주리라,

울 수 있는 것들은 울고

꺾일 수 있는 것들은 꺾이도록.

 

그럴 수도 없는 내 마음은

가벼워지고 또 가벼워져서

신음도 없이 지푸라기처럼 날아오르리.

 

바람아, 풀잎 하나에나 기대어 부르는

나의 노래조차 쓸어가버려라.

울컥울컥 내 설움 데려가거라.

 

그러면 살아가리라.

네 미친 울음 끝

가장 고요한 눈동자 속에 태어나.   

 

 

♧ 태풍 - 김상용

 

죽음의 밤을 어질르고

문을 두드려 너는 나를 깨웠다.

 

어지러운 명마(兵馬)의 구치(驅馳)

창검의 맞부딪힘,

폭발, 돌격!

아아 저 포효(泡哮)와 섬광!

 

교란(攪亂)과 혼돈의 주재(主宰)여

꺾이고 부서지고,

날리고 몰려와

안일을 항락하는 질서는 깨진다.

 

새싹 자라날 터를 앗어

보수와 저애(저碍)의 추명(醜名) 자취하던

어느 뫼의 썩은 등걸을

꺾고 온 길이냐.

    

 

풀 뿌리, 나뭇잎, 뭇 오예(汚穢)로 덮인

어느 항만을 비질하여

질식에 숨지려는 물결을

일깨우고 온 길이냐.

 

어느 진흙 쌓인 구렁에

소낙비 쏟아 부어

중압(重壓)에 울던 단 샘물

웃겨 주고 온 길이냐.

 

파괴의 폭군!

그러나 세척과 갱신의 역군(役軍)아,

세차게 팔을 둘러

허섭쓰레기의 퇴적(堆積)을 쓸어 가라.

 

상인(霜刃)으로 심장을 헤쳐

사특, 오만, 순준(巡逡) 에의 버리면

순직과 결백에 빛나는 넋이

구슬처럼 새 아침이 빛나기도 하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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