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디카 일기

안도현 시인의 시와 누린내풀

김창집 2012. 8. 31. 00:21

 

제14호 태풍 덴빈은

제주에서는 아무래도 약했나 보다.

태풍이 지나가는 길목인 제주는

집도 튼튼하게 짓고

비닐하우스 하나만 해도

웬만한 바람에는 끄떡없이 짓다보니

작은 태풍은 바람도 아니다.

어제는 밤에 한 잔 하고 들어와

2층 동쪽에 면한 방문을 열어젖히고

자다 아침에 깨었는데,

빗물만 약간 안으로 들어왔을 뿐

바람은 사그러지고 없었으니 말이다.

 

누린내풀은 마편초과에 속한 여러해살이풀로

높이는 1m 정도이고, 잎은 마주나고 잎자루가 있으며

넓은 달걀형이다. 7~8월에 벽자색 꽃이 핀다.

전체에 짧은 털이 있고 불쾌한 냄새가 많이 나며,

줄기는 모나고 많이 갈라진다.

우리나라 중부 이남에 분포한다.  

 

 

♧ 그대에게 가는 길

 

그대가 한자락 강물로 내 마음을 적시는 동안 끝없이 우는 밤으로 날을

지새우던 나는 들판이었습니다

그리하여 밤마다 울지 않으려고 괴로워하는 별을 바라보았습니다

오래오래 별을 바라본 것은 반짝이는 것이 아름다워서가 아니라

어느 날 내가 별이 되고 싶어서가 아니라 헬 수 없는 우리들의 아득한

거리 때문이었습니다

그때부터 나는 지상의 여기저기에 크고 작은 길들을 내기 시작

하였습니다

해 뜨는 아침부터 노을 지는 저녁까지 이 길 위로 사람들이 쉬지 않고

오가는 것은 그대에게 가는 길이 들녘 어디엔가 있다는 것을 믿기

때문이랍니다   

 

 

♧ 기관차를 위하여

 

기관차야, 스스로 너는 힘을 내 달린다고 생각하겠지

하찮은 일에서부터 세상을 움직이는 큰일까지

혼자 힘으로는 될 수 없는 게 너무 많다는 것을 모르고

기관사가 타고 서울역에서 출발하기만 하면

어디든 닿을 수 있다고 너는 생각하겠지

그래서 떠나기도 전에 그렇게 소리를 지르는 구나

가령 객차에 한사람의 손님도 타지 않았다면

화물칸에 라면상자 하나 싣지 않았다면

비록 떠난다 해도 너는 우스운 쇳덩어리일 뿐

그 누구에게도 추억이 될 수 없을 거야

 

이 세상 끝에서 끝까지 얼마나 많은

철길들이 서로 어깨 끼고 있는 줄도 모르고

부산이나 목포까지 갔다 왔다고 기적을 울리며

플랫포옴으로 들어오는 기관차야, 자만심을 버려야해

국경을 건너고 거친 대륙을 횡단하기 전에는

한반도는 슬픈 작은 섬일 뿐이야

 

 

내 어린 시절, 기차를 몇번 타 봤는지

얼마만큼 먼 곳까지 타고 갔다 돌아왔는지 내기할 때마다

시골뜨기인 나는 미리 주눅이 들곤 했었는데

나중에 커서야 알았지 세상을 많이 아는것도 어렵지만

세상하고 더불어 사는 건 더욱 벅차다는 것을

 

이제 슬쩍 너에게만 말해줄게 있는데

기관차야, 요즈음 사람들이 기차를 타고

삶은 계란을 잘 사먹지 않는 까닭은 말이야 그것은

삶으로 부터 그만큼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이란다.

 

그저 스치고 지나가는 간이역의 이름처럼

앞으로 많은 날들이 너를 녹슬게 하겠지만

기관차야, 철길위에 버티고 서있지 말고

새길을 만들어 달릴 때 너는 기관차인 것이다.

끝이다. 더는 못 간다 싶을 때 힘을 내

달릴 수 있어야 모두들 너를

힘센 기관차로 부를 것이다.   

 

 

♧ 그대에게

 

 

괴로움으로 하여

그대는 울지 마라

마음이 괴로운 사람은

지금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는 사람이니

아무도 곁에 없는 겨울

홀로 춥다고 떨지 마라

눈이 내리면

눈이 내리는 세상 속으로

언젠가 한번은 가리라 했던

마침내 한번은 가고야 말 길을

우리 같이 가자

모든 첫 만남은

설레임보다 두려움이 커서

그대의 귓불은 빨갛게 달아오르겠지만

떠난 다음에는

뒤를 돌아보지 말 일이다

 

 

걸어온 길보다

걸어갈 길이 더 많은 우리가

스스로 등불을 켜 들지 않는다면

어느 누가 있어

이 겨울 한 귀퉁이를

밝히려 하겠는가

가다 보면 어둠도 오고

그대와 나

그 때 쓰러질듯 피곤해지면

우리가

 

세상 속을 흩날리며

서로서로 어깨 끼고 내려오는

저 수많은 눈발 중의 하나인 것을

생각하자

부끄러운 것은 가려주고

더러운 것은 덮어주며

가장 낮은 곳으로부터

찬란한 한 세상을 만들어 가는

우리

가난하기 때문에

마/음/이/ 따/뜻/한/ 두/ 사/람/이 되/자

괴로움으로 하여 울지 않는

사/랑/이/ 되/자  

 

 

♧ 이웃집

 

이웃집 감나무가 울타리를 넘어왔다

가지 끝에 오촉 전구알 같은 홍시도 몇 개 데리고

우리집 마당으로 건너왔다

나는 이미 익을 대로 익은 저 홍시를

따먹을 것인가, 말 것인가

몇 날 며칠 고민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다

아들은 당장 따먹어 버리자고 했고,

딸은 절대로 안 된다 했다

 

이웃집 감나무 주인도

월경(越境)한 감나무 가지 하나 때문에

꽤나 골치 아픈 모양이었다

 

우리 식구들이 홍시를

따먹었는지, 그냥 두었는지

여러 차례 담 너머로 눈길을 던지곤 했다

 

그때마다 아내는 감나무 가지에서

홍시가 떨어질까 싶어 마음을 졸였다 한다

밤중에 변소에 가다가도

감나무 가지에 불이 켜져 있나, 없나

먼저 살핀다고 한다

 

아, 우리가 이렇게 된 것은

감나무 때문인가

홍시 때문인가

울타리 때문인가   

 

 

♧ 고래를 기다리며

 

고래를 기다리며

나 장생포 바다에 있었지요

누군가 고래는 이제 돌아오지 않는다, 했지요

설혹 돌아온다고 해도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고요,

나는 서러워져서 방파제 끝에 앉아

바다만 바라보았지요

기다리는 것은 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기다리고, 기다리다 지치는 게 삶이라고

알면서도 기다렸지요

고래를 기다리는 동안

해변의 젖꼭지를 빠는 파도를 보았지요

숨을 한 번 내쉴 때마다

어깨를 들썩이는 그 바다가 바로

한 마리 고래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요

 

 

♧ 가난하다는 것은

 

가난은

가난한 사람을 울리지 않는다.

가난하다는 것은

가난하지 않은 사람들보다

오직 한 움큼만 덜 가졌다는 뜻이므로

늘 가슴 한 쪽이 비어 있어

거기에

사랑을 채울 자리를 마련해 두었으므로

사랑하는 이들은

가난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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