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지나간 뒤 잎사귀와 줄기가 많이 상한
나팔꽃이 새순을 달고 담벼락에 감긴 채로 몇 송이 피었다.
꽃이 작고 색이 좀 투박해서 찾아보았더니
미국나팔꽃이란다. 시대가 세계화 시대라
교류가 많다보니, 이런 발도 없는 녀석들까지
여권도 없이 월경(越境), 남의 산야에 제멋대로 피어나
아무렇지도 않게 어울려 산다.
나팔꽃은 메꽃과에 속하는 한해살이풀로 줄기는 덩굴성이다.
다른 물체를 감아 올라가면서 최고 3m 정도로 자라고
아래로 향한 털이 있다. 꽃은 청자색, 흰색, 분홍색 등
여러 가지로 7~8월에 피며, 열매는 삭과로 익는다. 잎은 어긋나고
긴자루가 있으며 심장형으로 보통 3개로 갈라지는데
가장자리가 밋밋하며 털이 있다. 꽃은 아침 일찍 피는데,
햇빛의 강도에 따라 낮이 지나면서 차차 시든다.
♧ 나팔꽃 - 송수권
바지랑대 끝 더는 꼬일 것이 없어서 끝이다 하고
다음날 아침에 나가보면 나팔꽃 줄기는 허공에 두 뼘은 더 자라서
꼬여 있는 것이다. 움직이는 것은 아침 구름 두어 점, 이슬 몇 방울
더 움직이는 바지랑대는 없을 것이었다.
그런데도 다음날 아침에 나가보면 덩굴손까지 흘러나와
허공을 감아쥐고 바지랑대를 찾고 있는 것이다.
이젠 포기하고 되돌아올 때도 되었거니 하고
다음날 아침에 나가보면 가냘픈 줄기에 두세 개의 종까지 매어달고는
아침 하늘에다 은은한 종소리를 퍼내고 있는 것이다.
이젠 더 꼬일 것이 없다 없다고 생각되었을 때
우리의 아픔도 더 한번 길게 꼬여서 푸른 종소리는 나는 법일까.
♧ 나팔꽃 - 정호승
한 쪽 시력을 잃은 아버지
내가 무심코 식탁 위에 놓아둔
까만 나팔꽃 씨를
환약인 줄 알고 드셨다
아침마다 창가에
나팔꽃으로 피어나
자꾸 웃으시는 아버지
♧ 나팔꽃 - 나태주
여름날 아침, 눈부신 햇살 속에 피어나는 나팔꽃 속에는 젊으신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어있다.
얘야, 집안이 가난해서 그런 걸 어쩐다냐. 너도 나팔꽃을 좀 생각해보거라. 주둥이가 넓고 시원스런 나팔꽃도 좁고 답답한 꽃 모가지가 그 밑에서 받쳐 주고 있지 않더냐. 나는 나팔꽃 꽃 모가지밖에 될 수 없으니, 너는 꽃의 몸통쯤 되고 너의 자식들이나 꽃의 주둥이로 키워보려무나. 안돼요, 아버지. 안 된단 말이에요. 왜 내가 나팔꽃 주둥이가 되어야지, 나팔꽃 몸통이 되느냔 말이에요!
여름날 아침, 해맑은 이슬 속에 피어나는 나팔꽃 속에는 아직도 대학에 보내 달라 투덜대며 대어드는 어린 아들을 달래느라 진땀을 흘리는 젊으신 아버지의 애끓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 나팔꽃 - 송수권
바지랑대 끝 더는 꼬일 것이 없어서 끝이다 끝 하고
다음날 아침에 나가보면 나팔꽃 줄기는 허공에 두 뼘은 더 자라서
꼬여 있는 것이다. 움직이는 것은 아침 구름 두어 점, 이슬 몇 방울
더 움직이는 바지랑대는 없을 것이었다.
그런데도 다음날 아침에 나가보면 덩굴손까지 흘러나와
허공을 감아쥐고 바지랑대를 찾고 있을 것이다.
이젠 포기하고 되돌아올 때도 되었거니 하고
다음날 아침에 나가보면 가냘픈 줄기에 두세 개의 종까지 매어달고는
아침 하늘에다 은은한 종소리를 펴내고 있는 것이다.
이젠 더 꼬일 것이 없다 없다고 생각되었을 때
우리의 아픔도 더 한 번 길게 꼬여서 푸른 종소리는 나는 법일까
♧ 나팔꽃 - 서정우
묻나니
네가 이제 찾는 것은 무엇이더냐
친구를 보내고
어깨에 걸친 가방 속에
가족을 묻고
정신없이 걸어가는 아침 골목길
삶이라는 것은 애당초 목표는 있는 것일까
굳혀 정돈시킨 생각들 와르르 무너진 담장 아래로
너는 또 지나가고.
나팔꽃
네 눈이 멈춘 곳이면 어디라도 기어올라
연분홍 나팔 무더기로 들이대면서
묻나니
삶이라는 것은 애당초 목표는 없는 것일까
한 계절 내내 뱃심 끌어 올려 끅끅거리다가
잃어버린 목소리
안으로 삼켜가면서 다시
묻나니.
♧ 나팔꽃 씨 - 정병근
녹슨 쇠 울타리에
말라 죽은 나팔꽃 줄기는
죽는 순간까지 필사적으로 기어간
나팔꽃의 길이다
줄기에 조롱조롱 달린 씨방을 손톱으로 누르자
깍지를 탈탈 털고
네 알씩 여섯 알씩 까만 씨들이 튀어나온다
손바닥 안의 팔만대장경,
무광택의 암흑 물질이
손금을 빨아들이고 있다
마음에 새기는 것은 얼마나 힘겨운 일이냐
살아서 기어오르라는,
단 하나의 말씀으로 빽빽한
환약 같은 나팔꽃 씨
입속에 털어 넣고 물을 마셨다
오늘 밤, 온 몸에 나팔꽃 문신이 번져
나는 한 철 환할 것이다
♧ 나팔꽃 - 이영광
가시 난 대추나무 줄기를
친친 감고 올라간 나팔꽃 줄기
그대를 망설이면서도 징하게 닿고 싶던
그날의 몸살 같아
끝까지 올라갈 수 없어
그만 자기의 끝에서 망울지는 꽃봉오리
사랑이란
가시나무 한 그루를
알몸으로 품는 일이 아니겠느냐
입을 활착 벌린
침묵이 아니겠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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