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오름오름회 식구들과 같이 오름에 갔다.
그간 행사와 벌초 등으로 같이 못한 것이
한 달도 더 지나버린 것이다.
높은오름부터 시작하여
체오름, 그리고 안돌과 밧돌오름에 올랐는데
이제 물매화를 비롯한 가을꽃들이 막 피기 시작하였다.
둥근 잔대는 초롱꽃과에 속한 여러해살이풀로
줄기는 높이 15cm 정도로 굵은 뿌리에서 뭉쳐난다.
잎은 어긋나며, 7~8월에 종 모양의 하늘색 꽃이
위를 향하여 피며, 뿌리는 식용한다.
제주 한라산에 분포한다.
그런데, 섬잔대가 아니어서 여기서는
둥근잔대로 이름 붙였지만
당잔대라고 하는 사람도 있다.
김문홍 교수가 감수한 ‘산굼부리의 식물’에는
둥근잔대라고 했다.
♧ 가을밤의 풀벌레 소리 - 안도현
풀벌레가 다른 풀벌레 소리 위에 자신의 소리를 한 겹 얹기 위해 우는 게 아니었다 한 소리에 다른 소리를 꿰매어 잇대려고 우는 것도 아니었다 풀벌레는 화전민의 삶의 방식을 선택했다
풀벌레는 입에 물고 있던 풀숲을 펼쳐 풀잎을 만들고, 각자 손수 지은 풀잎의 처마와 내 귀 사이에 소리를 슬어놓느라 분주했다 울음이 불씨이므로 머지않아 풀숲은 화염에 휩싸이게 될 터 그래서 나는 풀벌레는 무너지기 위해 운다, 라고 쓴다
구름 한 점 없는 밤마다 풀숲에 자지러지던 별들은 떠났다 이제 별들과 풀벌레는 교접하지 않는다 별들이 풀밭에 설치했던 보면대(譜面臺)를 별자리라고 우기며 운명을 맡기는 자들이 아직도 세상에는 많다 땅에서 풀벌레가 울고 하늘에서 별이 운다고 믿던 단결과 연대의 시절은 분명히 갔다 나도 자주 아프면서 나이를 먹었다
그리하여 손톱에 박힌 가시와 수많은 잔소리들, 이별 직후의 쓰라림이 왜 풀벌레 소리를 내는지 이유를 조금 알게 되었을 뿐, 가을밤의 풀벌레가 불도 켜지 않고 왜 모두 다른 빛깔로 우는지 아직은 알지 못한다
바라건대 우리 동네에는 풀벌레 우는 소리를 들으며 오케스트라의 연주와 악보를 떠올리는 아이들이 부디 없었으면 좋겠다 얘들아, 풀벌레 소리를 까마중 따먹듯이 따먹어다오 너희가 폐허에 숨은 음표잖니? 풀벌레 소리만 듣고도 그 풀벌레가 경작하는 풀잎을 그려 나에게 보여다오
♧ 봉평 장날 - 문효치
이제 장날은
달빛도 멀리 지나가 버리는
빛 바랜 커다란 사진처럼
펼쳐져 있을 뿐이다.
딱히 사고 싶은 것도
먹고 싶은 것도 없는
사진 속에서
간간히 장사꾼의 호객 소리가 들린다.
충주댁은 서울로 이사가
상가 빌딩의 사장이 되었고
허생원은 미국으로 이민 가서
큰 주유소를 한댔다.
봉평장은 이제
재미있는 이야기 거리도
신나는 구경거리도 없다.
다만 길섶에 내려
잠시 젖은 몸을 말리던
추억 한 자락
몸 털며 일어서고 있을 뿐.
♧ 추석 무렵 - 안정환
고향 선산 계신
조부님 이발은
시골 당숙이 해드리고
대전 국립묘지 계신
아버님 이발은
나라에서 해드린다
내 머리는 늘
동네 목욕탕에서
이발사 조 씨가 깎아주고
막내녀석 이발료는
고지서로 날아왔다
망월동 묘지관리소에서.
♧ 데생 - 김광균
1
향료를 뿌린 듯 곱다란 노을 위에
전신주 하나하나 기울어지고
머언 고가선 위에 밤이 켜진다.
2
구름은
보랏빛 색지 위에
마구 칠한 한 다발 장미.
목장의 깃발도, 능금나무도
불면 꺼질 듯이 외로운 들길
♧ 칠순 애인과 라면 끓이기 - 김륭
퍼지면 맛이 없다
날계란 같은 설움도 쫄깃쫄깃해야 제 맛이 난다
당신은 아니라고 우기지만
그거야 질質보다 양量을 따지고 살아온 한평생을 부글부글
끓어 넘친 눈물 탓, 나는 잽싸게
밑이 새까맣게 탄 양은냄비 뚜껑을 열고
그녀를 집어넣는다
펄펄 끓는 물에 4-5분 더
라면공장 조리법은 고장 난 수도꼭지처럼 목구멍을 조여 놓기 위한
고도의 상술 꼴까닥, 바닥난 성욕까지 우려낼 가능성이 높고
불과 물이 함께 허리 비틀며 뒤엉키는 시간은
십중팔구 불륜이다
면발보다 굵은 그녀의 주름살이 거품을 무는 순간
고물냉장고 문을 연다
훅- 너무 뜨거우면 숨통을 놓치는 법!
찬밥 한 덩이 먼저 마는
칠순 애인의 쭈그렁 이마 위로 식은땀을 내딛는
바로 그때다
강원도 어느 산간지방을 달음박질해온
초록빛 발소리 용두질로 묵힌 홀아비 총각김치 한 조각
덥석, 베어 물고 휘휘 젖는다
울컥
목덜미 근처로 팔다리 감아오는 그녀
식으면 맛이 없다
맛이 없는 건 라면이 아니라 고래심줄보다 질긴 세월이라고
라면 봉지 속에서 혓바닥이 뛴다
펄쩍펄쩍, 칠순 홀어머니
덩달아 뛴다
♧ 어머니를 위한 자장가 - 정호승
잘 자라 우리 엄마
할미꽃처럼
당신이 잠재우던 아들 품에 안겨
장독 위에 내리던
함박눈처럼
잘 자라 우리 엄마
산 그림자처럼
산 그림자 속에 잠든
산새들처럼
이 아들이 엄마 뒤를 따라갈 때까지
잘 자라 우리 엄마
아기처럼
엄마 품에 안겨 자던 예쁜 아기의
저절로 벗겨진
꽃신발처럼
♧ 벌레 먹은 나뭇잎 - 이생진
나뭇잎이
벌레 먹어서 예쁘다
귀족의 손처럼 상처 하나 없이 매끈한 것은
어쩐지 베풀 줄 모르는 손 같아서 밉다
떡갈나무 잎에 벌레구멍이 뚫려서
그 구멍으로 하늘이 보이는 것은 예쁘다
상처가 나서 예쁘다는 것은 잘못인 줄 안다
그러나 남을 먹여가며 살았다는 흔적은
별처럼 아름답다
♧ 산색(山色) - 문효치
당신의 입김이
이렇게 흐르는 산허리는
산빛이 있어서 좋다.
당신의 유방 언저리로는
간밤 꿈을 해몽하는
조용한 아우성의 마을과
솔이랑 학이랑 무늬 그려
도자기 구워내다
새벽이슬 내리는 소리.
오월을 보듬은 당신의 살결은
노을, 안개.
지금 당신은 산빛 마음이다.
언젠가 내가 엄마를 잃고
파혼 당한 마음을
산빛에 묻으면.
청자 밑에 고여 있는
가야금 소리.
산빛은 하늘에 떠
돌고 돌다가
산꽃에 스며 잠을 이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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