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디카 일기

대설, 그 설원 속에서

김창집 2012. 12. 7. 08:46

 

 

눈이 가장 많이 내리는 시기라는 대설,

중국 화북지방의 기상을 기준으로 만든

절기라서 잘 맞진 않지만

지금 수도권은 조그만 눈에도

교통 불편이 말이 아니다.

 

그래도 절기는 절기 같아야만

세상 돌아가는 이치에 맞는 법

추수 끝난 빈 밭에

차가 닿지 않은 산과 들에

펑펑 내려 하얗게 쌓였으면 좋겠다.

 

내일은 토요일,

서귀포 영천악과 칡오름 산행이 예정되었지만

눈이 펑펑 내려 한라산자락

개오리오름에 올라가

눈 위를 두어 번 굴러도 좋으리니….

작년에 사라오름에 다녀온 추억의 눈밭.  

    

 

 

♧ 대설大雪 - 편부경

 

널 처음 만난 건

간성 못미처 돌배가든 부근

신발끈 꽁꽁 동여매고

반짝이는 눈빛은 충혈되어 있었네

억새 혼자 냉가슴으로

미동도 않을 때

나무에 걸터앉아 날 바라본 건 너였네

 

그날 밤 넌

나보다 술이 세더라

새벽까지도 퍼부을 작정이었지

한발짝도 허락지 않던 얼큰한 분노에

난 잠들 수도 없었네

    

 

비틀거리며 속초 지나 봉포 아야진에 갔었네

작은 배들 움츠리고 어깨를 떨던 사이로

네가 잠시 사라지고 난 아무래도 좋았네

백도를 돌아나온 파도가 청간정 절벽에서 부서질 때

기억으로는 그쯤이었네

 

마지막이다

시작도 없을 거라며 우린 우리의 이름으로

숙박부를 기록했네 한가롭고 격렬하던 한 때

잠잠해진 어깨 너머로 바다가 육지로 오르는 걸

처음 보았네

마지막은 어디쯤일까 네 안에 갇힌

나의 네 안에 

 

 

♧ 대설 - 고재종

 

밖에는

눈 퍼붓는데

눈 퍼붓는데

 

주막집 난로엔

생목이 타는 것이다

난로 뚜껑 위엔

술국이 끓는 것이다

 

밖에는

눈 퍼붓는데

눈 퍼붓는데

 

괜히 서럽고

괜히 그리워

뜨건 소주 한 잔

날래 꺽는 것이다

또 한잔 꺽는 것이다

 

세상잡사 하루쯤

저만큼 밀어두고

 

나는 시방

눈 맞고 싶은 것이다

너 보고 싶은 것이다  

 

 

♧ 대설 - 김경희

 

애타던 날들의

깃발은,

 

그래서

천만 번 흰 것을....

 

낙목의 시절

혼자 영글은 동백은,

 

그래서

죽도록 붉은 것을....

 

지치고

무성한 것들이여-

 

돌아와야만 해

돌아와야만 해

 

망향의 귀신이 되어

일흔 살이 되어

조국이 되어.   

    

 

♧ 대설(大雪) - 엄원용

 

오늘은 대설

절기 따라 눈이 내린다.

온 마을과 마을

부드럽게 감싸며

토닥이며 덮어 내리는 눈

한여름 이글이글

지독하게 타오르던 욕망들이

한꺼번에 흰 치마폭 속에 포근히 잠재워

잠시 부끄러움 가릴 수 있겠다.

이제야 순수 하나쯤 품어볼 수 있겠다.   

 

 

♧ 모래의 집 - 이정록

 

  저는 빙판길 옆 모래 적재함이에요. 그대의 헛바퀴 밑에서 그대의 먼길을 배웅하지요. 삽날을 받아들이는 것만이 제 생의 전부임을, 그 아픔의 성에를 말하지는 않겠어요. 미끄러지지 않는 삶은 쉬지도 바로 갈 수도 없잖아요. 하지만 뒤집히거나 굴러 떨어지진 말아요. 돌아오지 않는 길은 생각만 해도 끔찍해요. 빙판길 저 아래에 쌓인 고운 모래톱도 다시 이곳으로 돌아오거나 억새꽃으로 피어올라 그대 차창을 흔들 거예요

 

  삼 년 전인가, 무식하게 눈이 내리던 대설 언저리에 여기에서 죽을 뻔했다고, 이 적재함에 바퀴가 걸렸기 망정이지 큰일을 치를 뻔했다고, 호들갑을 떨며 옆좌석의 연인에게 자랑하지 말아요. 그대와의 아스라했던 만남을 몸서리치며 냉이꽃을 피워올리는 집 한 채가 있어요. 단칸방 속에서 그대의 삽날 자국을 뜨개질하고 있는 젖은 실뿌리를, 한 번만이라도 생각해보신 적은 있나요

 

  옆 좌석에 있는 그대의 연인이, 나도 저 모래의 집처럼 어둡다고, 당신의 응달에서 당신의 바퀴 탄 내에 마음졸이며 살아가고 있다고, 억새의 새순 같은 하얀 눈물을 흘릴지도 모르잖아요. 그녀의 작은 가슴에서 울려퍼지는 삽날 부딪는 소리, 그 소름 돋는 사랑을 꼭 한 번 확인해보고 싶다면 그건 순전히 그대 맘이지요. 하지만 다시는 눈보라 속 빙판길을 넘어오지 못하겠지요. 모래의 집 속에는 단 한 번으로 부서지고야 말 서릿발이, 겨우내 까치발을 딛고 있으니까 말이에요

 

  그대를 향해 피워올렸던 냉이꽃, 그 많던 씨앗들은 지금 어디로 흩어져갔을까요  

 

 

♧ 길 - 홍윤표

 

바로 가던 길이 닫혔다

육로가 닫히고

바닷길이 닫히고

하늘길이 닫혔다

내 가야할 길 모두가 닫혔다

이 냉혹한 겨울

밖에선 근로자가 삭발을 하고 아우성이다

이 일을 어찌 할까나

조금도 녹지않은 찬 유리 밖으로

어둠을 쓸어 담으며

수직으로 대설이 내린다

동동 거리는 서울 한복판의 발걸음

가야할 길이 닫혔다

모두 닫혔다

 

 

♧ 겨울 속에서 - 최풍성

 

대설을 하루 앞둔

겨울속에서

살 올라 굵어진

빗방울을 빗금 그어 쏟는다

 

색 바랜 단풍잎

끝가지에 매달린 채

안간힘에 겨워

빗물의 무게를 짐 진채

끝내 손을 놓고 만다

 

차단된 수혈이

야윈 팔을 벗기고

빗물 듣는

마른 잎 소리가

생명을 다한 절규로

회오리 치는 바람에 실어

눈송일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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