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름 셋을 돌고 돌아오는 길
목장 푸른 목초 밭 위를 걷는데
첫눈이 펄펄 날린다.
모두들 그 분위기에 휩싸여
나이도 잊은 채
즐거워 야단들이다.
첫눈은 이상하게도 우리들을
들뜨게 하는 어떤 힘이 있는 것 같다.
너무 멋있어 마구 눌러댔는데
컴퓨터에 올려놓고 보니 별로다.
아무래도 동영상으로 찍을 걸 그랬나 보다.
♧ 하얀 그리움이 세상을 덮을 때 - 명위식
하얀 바다
나무들 황홀한 눈 꽃
눈이 부시다
하얀 눈을 밟고 걷는
이 야릇한 기분...
사랑의 아품도 잊을 것 같다
슬픈 기억도 다 용납하고 싶다
사랑하는 이와 동행이 되어
어디론지 한없이 달려가고 싶다
하염없이 눈을 맞으며
하얀 그리움이 세상을 덮을 때
♧ 그대 그리운 날에는(II) - 김성기(Scott Kim)
화가는 아니라도
눈앞에 그릴 수 있는
당신 모습이 있습니다.
사랑을 보내는 그 눈빛을
달콤한 사랑을 맡을 수 있는 그 코를
뜨거운 입김을 보내는 그 입술을
추운 겨울에도 따뜻하게 피어나는 그 미소를
그리움 속에서 당신이 피어나면
난 언제나 화가가 됩니다.
아지랑이 피어나는 봄날에는
산들거리는 봄바람에 날리는 연 색 원피스에
진달래 꽃잎을 입에 문 당신을 그려봅니다.
보라색으로 물들어 가는 당신 입술을 그리다가
살며시 포개지는 내 입술을 그려봅니다.
파도소리 들리는 여름날에는
긴 백사장을 걷는 당신을 생각하며
당신이 남긴 수많은 발자국을 그려봅니다.
하얀 파도에 흐려지는 발자국을 아쉬워하며
뒤를 따르는 깊은 발자국을 그려봅니다.
코스모스 피는 가을날에는
떨어지는 낙엽을 바라보며
눈물짓는 당신 모습을 그려봅니다.
너무 슬픈 계절이라고
너무 아픈 가을이라고
울먹이는 당신을 그리다가
떨어지는 내 눈물을 방울방울
코스모스 꽃잎에 그려봅니다.
눈 내리는 겨울바다를 그립니다.
눈을 맞으며 걷는 당신이 그려지고
지난여름에 남겼던 추억을 따라
사라진 발자국을 다시 그립니다.
그리고, 저 앞에 눈을 맞으며 기다리는
하얀 내 모습이 당신 앞에 그려집니다.
그렇게, 우린 다시 만나고 있습니다.
하나의 눈사람이 되어 하얗게 서있습니다.
하나의 눈사람으로... 하얗게...
♧ 함박눈, 지울 것은 지우며 감출 것은 덮으며 - 정성수(丁成秀)
아득한 별나라의 함박눈
옥양목 두루마기 걸치고 지구 위로 내린다
지울 것은 지우며 감출 것은 덮으며
내린다, 소리없이
하늘의 목소리를 데불고
조심스러운 발걸음으로 허공의 층계를 밟고
아이들의 노오란 웃음 곁에서
우리들의 저 알 수 없는
아지랭이 같은 길 위에
저토록 하이얀 옷을 두르고 서성이는
이쁜 사람들
용서하리라, 함박눈을 맞으며
세상이 이처럼 수줍은 때
눈은 내리고 내리어
다시 떠난다
보이지 않는 기억 속으로
이미 하얀 사람들은
오래오래 포옹할 것이므로
옥양목 두루마기 휘날리며
별나라로 걸어오르는 함박눈.
♧ 귀향(歸響) - 감태준
서울역에서, 한번은 영등포 굴다리 밑에서 잠깐 스치
고 흘러흘러 너를 다시 만났을 땐 눈이 오고, 그해도 저
물었다 말이 없는 친구, 손에는 넝마줍기 삼 년에 절도
이범(竊盜二犯), 기차표 한 장, 마음 한구석에는 아직 불
구(不具)의 조각달이 떠 있다, 되는 것은 안 되는 것뿐이
라고 한없이 쓸쓸해 하는 네 얼굴에 눈은 날아가 앉고,
눈은 날아가 앉고, 우리는 타관 불빛을 맞으며 하룻밤
강소주에 혹한을 녹였다, 머리에 채 남은 눈을 떨면서,
살아도 곱게 살자 꽃같이 살자, 흩어진 마음을 챙겨들
고, 우리는 갈라섰다, 끝없이 몰리고 풀리는 행렬 속으
로, 너는 이제 기적소리에도 가볍게 떠밀리고, 떠밀리는
너의 등에서, 아니, 너의 물결소리가 들리는 머리 위 공
간(空間)에서, 나는 그때 새들의 고향을 얼핏 보았다
♧ 작은 엽서·24 - 김선태
--눈발 속을 걸어간 사람
옛날 누군가 이 눈 내리는 벌판을 걸어 갔다네
친구도 없이 혼자서 혼자서만 걸어 갔다네
벌판은 넓어 끝이 없고 갈수록 눈보라 세찬데
그 사람 한사코 바람 부는 쪽으로만 걸어 갔다네
가다가 쓰러진 그 사람 마침내 눈 속에 파묻히고
뒤따라가던 발자욱도 금새 눈발에 지워졌다네
지금도 내 꿈속에선 하얗게 눈이 내리고
옛날 누군가 그 벌판을 하염없이 걸어갔듯이
내가 그 벌판에서 눈을 맞으며 서 있기도 하네
♧ 보화춘 - 김찬일
여자의 입술 아열대 습지 같았다.
그녀와 입맞춤 했을 때 수천의 야자 잎 몸 뒤척여
아름다운 방 만들어 주었다.
그녀와 오래 포옹하였고 질정 없이 내리는 우기 비처럼
우리의 입맞춤 끝날 것 같지 않았다.
점점 가빠지는 그녀 숨소리에 나는 한 마리 슴새로 날아오르다가
추락하고 깃털이 뽑힌 채 그녀 혀끝에서 익어갔다.
창밖에서 흘러 온 아열대 노을 이별의 손수건으로
나의 눈자위 붉게 적셨다.
나는 여자 귀에 수 백 개 말 던졌으나 여자 귀에는
다섯 개 작은 보석이 나의 말 걸러 사랑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나는 눈물 그렁그렁한 그녀 눈동자 쳐다보았다.
한사나이가 그녀 눈동자 속 걸어가고 눈이 펑펑 쏟아지고 있었다.
아직 그 누구 발자국도 찍히지 않는 강줄기 거슬러 가는 아득한 눈길
걸어가고 있었다. 눈이 오면 소름끼치는 허전함이 떼로 몰려 와
나를 일으켜 세웠고 고삐 풀려 버린 역마살에 끌려 길고 먼 강 길
정처 없이 걷고 있었다. 눈길이 끝나는 곳에서 그녀가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아열대 습지 같은 입술로 하얀 눈꽃 된 그녀가. 나는 그녀의 눈 속에서
펑펑 쏟아지는 눈을 맞으며 하염없이 걷고 있는 나를 보고 있었다.
♧ 눈 내리는 강촌역 - 김종익
눈 내리는 강 건너
갈대 숲 바라본다
숨차게 달려온 시간 열차
간이역에 잠시 쉬어
실타래를 되감고 눈발을 달린다
하얀 별들이 춤추는 듯한
눈을 맞으며 나는
까마득한 꿈을 꾼다
하얀 초가집 굴뚝에서
흰연기 모락모락
울안의 대추나무 밤나무
눈꽃을 피웠다
까만 눈망울의 그녀
잊은 지 오래인데
눈 내리는 강촌역은 끊어진
추억의 연 줄을 되감게 한다
시간 저편의
아픔이 시리다
눈 내리는 날
'디카 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수크령에 눈이 나리면 (0) | 2012.12.13 |
---|---|
억새가 씨앗을 날릴 때 (0) | 2012.12.12 |
대설, 그 설원 속에서 (0) | 2012.12.07 |
청미래덩굴 열매는 (0) | 2012.12.04 |
12월의 상수리나무 (0) | 2012.12.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