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디카 일기

곡우에 보는 천남성

김창집 2013. 4. 20. 07:45

 

4.3 문학 기행일인데 비가 내린다.

사실 2주전에 계획한 행사인데

그 날은 엄청난 비바람이 예보되어

오늘로 미룬 것이다.

 

비는 그리 크지 않아 강행할 예정인데

누가 곡우(穀雨) 아니랄까봐 촉촉이 내리는 비가

그 동안 메마른 대지를 적시며

특히 고사리를 위해 좋은 약이 될 것이다.

 

어제 4.3평화공원에 갔다가

잠시 틈을 내어 찾아간 민오름 기슭

바람꽃이나 노루귀는 모두 져버리고

이 천남성이 주인공이 되어 있었다.  

 

 

♧ 곡우穀雨 - 김유선

 

막내이모 과수댁 텃밭에

애시시 비가 오신다

소리 없이 오지만 아침이면

온 동네가 수런댄다

슬픔이나 기쁨이나 사랑같이

적시고 가는 것들 다 같이 썩어

늙은 텃밭에 혼자서 피어나는 꽃이라고

투박해진 손으로 풋봄 일으켜 앉히는

이순 넘은 막내이모

내 눈에는 여전히 복사빛 은은한데

이별여행 온 나는

오지(奧地)의 텃밭에서

만남의 오지를 읽는다

비가 오신다

마음까지 만나야 직성 풀리는

맹춘(孟春)의 손길에

몸푼 들판 흐벅지게 누워 있고

이모는 적멸(寂滅)의 밭에서 흥건히 비를 맞고 있다

나 혼자만 비 피해서

숨어 있던 봄.

 

 

 

♧ 천남성 - 반기룡

 

그 이의 수줍음이

그대로 남아 있는 듯한 천남성

 

첫 남성을 볼 때 그 느낌처럼

가슴 뜨거워진다

푸른 줄기에 새겨졌을

그대의 뜨건 입김처럼

내 심장을 달구던

그 때 그 시절이여

 

잉걸불처럼 익은 열매는

그대와 나의

사랑의 씨앗이 아직도

풍성함을 넌지시 알려주는 증표이겠지

아흐,

천남성이

올곧게 고개 내미는

달착지근하고 푸른 날이여

 

오늘따라 첫 남성이 더욱 그립다   

    

 

 

♧ 곡우(穀雨) 무렵 - 권경업

 

작지만 또렷한,

온 산자락 메아리로 떠도는

그리운 이름 부르는 소리

 

돌아오라 돌아오라는

장당골 자작나무

연둣빛 여린 손짓   

 

 

♧ 곡우(穀雨) - 권경업

 

희끗희끗한 이 나이에, 다시

곡우(穀雨) 전의 쑥밭재와 마주앉았다

 

차마, 고백하지 못한

어린 날의 그때처럼   

 

 

♧ 나뭇잎 꿈 - 도종환

 

나뭇잎은 사월에도 청명과 곡우 사이에

돋는 잎이 가장 맑다

연둣빛 잎 하나하나가 푸른 기쁨으로

흔들리고 경이로움으로 반짝인다

그런 나뭇잎들이 몽글몽글 돋아나며 새로워진 숲

그런 나무들이 모여 이루는 산은

어디를 옮겨놓아도 한 폭의 그림이다

혁명의 꿈을 접은 지는 오래되었지만

세상이 바뀌기를 바라는 마음까지 버린 건 아니어서

새로운 세상이 온다면 꼭 사월 나뭇잎처럼

한순간에 세상을 바꾸고 사람을 바꾸었으면 싶다

이 세상 모든 나무들이 가지마다 빛나는 창을 들어

대지를 덮었던 죽음의 장막을 걷어내고 환호하듯

우리도 실의와 낙망을 걷어내고

사월 나뭇잎처럼 손사래 쳤으면 좋겠다

풋풋한 가슴으로, 늘 새로 시작하는 나뭇잎의 마음으로   

 

 

 

♧ 봄 문 앞에서 - 홍윤표

 

봄은 상냥한

얼굴로 다가오는 이름이여

땅 속에 비밀을 퍼 올리는 펌프이며

목화 솜보다 고운 여인의 숨결이여

 

안개꽃 한 아름 안고

표표히 걸어오는

봄은 나그네

나의 여인이여

 

살빛 살구빛 복사꽃밭을 찾아

사립문 여는 소리

 

휘어 넘는 저녁놀 은봉산에 누어

곡우穀雨의 창공을 나는

봄은 나그네

무수히 왔가 가는 나그네, 봄은

나의 여인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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