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토록 처절한 가뭄을 이기고
마지막 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말복인데도
벙글벙글 피어 경종을 울린다.
비록 잎사귀가 더러 마르고
꽃이 약간 야위였으나
자연의 율법은 엄연하다.
그래, 오늘 너에게서 한 수 배운다.
세상을 향한 약속이라면
조건을 따지지 않고
지켜야 한다는 것을.
♧ 말복 - 박승미
내 이럴 줄 알았지
밑도 끝도 없이 들이닥쳐서는
가진 것 다 내놓아라 하니
내 맘만 믿고 단속하지 않은
내 탓이나 하지
어쩌고저쩌고 아쉬운 소리 해봤자
편 들어줄 사람 없으니
세상 참 잘못 살았다 싶어
한여름 뜨겁게 달구었던
바지 가랑이 붙잡고
매달려 볼까도 생각해 보았지만
정 떼자는 데야
그러려니 하면서도
그러고 나면
마음 붙일 곳 없어
풀죽은 삼베 적삼 앞섶만
끌어내리고 있었다
♧ 말복 - 손세실리아
퇴화된 날개죽지가
축 처져 녹아 내리는 냉동 닭을 손질한다
움츠린 허벅지 사이
말끔히 지워져 버린 수태의 흔적
저 아득함이라니
지상의 어떤 양식으로도
결코 메워지지 않는 썰물이다, 공터다
한 존재를 내려놓고 통과해 낸
지난 세월이 저러했던가
무엇으로도 채워지지 않아
그리도 깊고 오랜 절망으로 휘청거렸던가
해체된 닭을 들여다 보다
기억의 허방에 잠시 발을 헛 딛고 만다
가혹한 쓸쓸함이다
♧ 말복 - 섬그늘
더위 중 가장 더운 절기가 말복이라고
오늘이 그 날인데
옛사람들 그 말 거짓이 없네.
그래도 이제는
밤 기운이 가을을 여는데
여름 내내
작열하는 태양 아래
열심히 노력한 사과며 복숭아
그리고 들녘의 벼가
때가 됨을 알리네.
말복은 더위가 멀지 않았음을 알리니
더더욱 좋다.
♧ 더덕향이 있는 저녁 - 고경숙
밥짓고 난 손끝에서 산흙 냄새가 난다
더덕을 깐 손톱 끝마다
까맣게 진이 묻어 끈적이는 것은
그리움이 엉긴 탓,
석쇠에 짓이긴 맨몸을 뉘면
멀리 구름 가는 곳
갑천 맑은 물에 자맥질하는 추억이 보인다
며칠째 어머니의 병세는 차도가 없다
눈을 감고 손을 잡으면
꼭 더덕 같은 손마디
질 좋은 영양크림 듬뿍 발라드려도
끝없이 끝없이 배어 들어가는 거친 세월
산등성이 쪼그리고 더덕 캐던 할미꽃은
그 풍경 그려진 베갯모에 귀 대고
더듬더듬 자리끼 찾는지
더듬더듬 추억을 찾는지...
♧ 더덕꽃 - 김승기
지난여름은
너로 하여 행복했어
보고 싶어도
산을 오를 수 없는 그리움
뒤란에 심었더니
곁에 놓아둔 미쁜 정
밤낮없이 키 늘이며
내 안을 엿보던 향기
무거운 팔다리 시큰거리는 장마철
우중충한 창을 열고 들어와
은은한 빛으로 등을 켜고
아픈 마음 헹구어 주던
향긋한 종소리
얼마나 싱그러웠는지 몰라
이제 가을하늘
가벼워진 몸 다시 무거워질까
내년의 장마철 생각하며
까맣게 씨까지 맺어주는 사랑
눈물나는데
행복했던 지난여름
무엇으로 보답할까
굳어진 팔다리로
그대 없는
겨울은 또 어떻게 건너야 하나
봄을 꿈꾸며
갈색으로 마르는 줄기
바라보기만 할 뿐
네게 줄 것이 아무것도 없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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