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디카 일기

말복에 더덕꽃을 보며

김창집 2013. 8. 13. 07:42

 

그토록 처절한 가뭄을 이기고

마지막 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말복인데도

벙글벙글 피어 경종을 울린다.

 

비록 잎사귀가 더러 마르고

꽃이 약간 야위였으나

자연의 율법은 엄연하다.

 

그래, 오늘 너에게서 한 수 배운다.

세상을 향한 약속이라면

조건을 따지지 않고

지켜야 한다는 것을. 

 

 

♧ 말복 - 박승미

 

내 이럴 줄 알았지

밑도 끝도 없이 들이닥쳐서는

가진 것 다 내놓아라 하니

내 맘만 믿고 단속하지 않은

내 탓이나 하지

어쩌고저쩌고 아쉬운 소리 해봤자

편 들어줄 사람 없으니

세상 참 잘못 살았다 싶어

한여름 뜨겁게 달구었던

바지 가랑이 붙잡고

매달려 볼까도 생각해 보았지만

정 떼자는 데야

그러려니 하면서도

그러고 나면

마음 붙일 곳 없어

풀죽은 삼베 적삼 앞섶만

끌어내리고 있었다  

 

 

♧ 말복 - 손세실리아

 

퇴화된 날개죽지가

축 처져 녹아 내리는 냉동 닭을 손질한다

움츠린 허벅지 사이

말끔히 지워져 버린 수태의 흔적

저 아득함이라니

지상의 어떤 양식으로도

결코 메워지지 않는 썰물이다, 공터다

한 존재를 내려놓고 통과해 낸

지난 세월이 저러했던가

무엇으로도 채워지지 않아

그리도 깊고 오랜 절망으로 휘청거렸던가

해체된 닭을 들여다 보다

기억의 허방에 잠시 발을 헛 딛고 만다

가혹한 쓸쓸함이다  

 

 

 

♧ 말복 - 섬그늘

 

더위 중 가장 더운 절기가 말복이라고

오늘이 그 날인데

옛사람들 그 말 거짓이 없네.

 

그래도 이제는

밤 기운이 가을을 여는데

여름 내내

작열하는 태양 아래

열심히 노력한 사과며 복숭아

그리고 들녘의 벼가

때가 됨을 알리네.

 

말복은 더위가 멀지 않았음을 알리니

더더욱 좋다.  

 

 

♧ 더덕향이 있는 저녁 - 고경숙

 

밥짓고 난 손끝에서 산흙 냄새가 난다

더덕을 깐 손톱 끝마다

까맣게 진이 묻어 끈적이는 것은

그리움이 엉긴 탓,

석쇠에 짓이긴 맨몸을 뉘면

멀리 구름 가는 곳

갑천 맑은 물에 자맥질하는 추억이 보인다

 

며칠째 어머니의 병세는 차도가 없다

눈을 감고 손을 잡으면

꼭 더덕 같은 손마디

질 좋은 영양크림 듬뿍 발라드려도

끝없이 끝없이 배어 들어가는 거친 세월

 

산등성이 쪼그리고 더덕 캐던 할미꽃은

그 풍경 그려진 베갯모에 귀 대고

더듬더듬 자리끼 찾는지

더듬더듬 추억을 찾는지...  

 

 

 

♧ 더덕꽃 - 김승기

 

지난여름은

너로 하여 행복했어

 

보고 싶어도

산을 오를 수 없는 그리움

뒤란에 심었더니

 

곁에 놓아둔 미쁜 정

밤낮없이 키 늘이며

내 안을 엿보던 향기

 

무거운 팔다리 시큰거리는 장마철

우중충한 창을 열고 들어와

은은한 빛으로 등을 켜고

아픈 마음 헹구어 주던

향긋한 종소리

얼마나 싱그러웠는지 몰라

 

이제 가을하늘

가벼워진 몸 다시 무거워질까

내년의 장마철 생각하며

까맣게 씨까지 맺어주는 사랑

눈물나는데

 

행복했던 지난여름

무엇으로 보답할까

 

굳어진 팔다리로

그대 없는

겨울은 또 어떻게 건너야 하나

 

봄을 꿈꾸며

갈색으로 마르는 줄기

바라보기만 할 뿐

네게 줄 것이 아무것도 없구나

 

 

'디카 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구름과 숲에서 놀다  (0) 2013.08.19
광복절에 무궁화를  (0) 2013.08.15
별고을광대의 뺑파 그 여자  (0) 2013.08.02
갯돌, 마당극 품바품바  (0) 2013.08.01
충북으로 가며 황근을  (0) 2013.07.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