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에서 계속되는 열대야
그리고 타들어 가는 곡식과 식물들
이게 가뭄이 아니고
건기(乾期)라고 우스개 하던 모 인사
그게 건기라면 차라리
가을 겨울에 오든지….
한 반도 중부지역을 유린하던
게릴라성 폭우와 엄청난 물,
지금 중국 사천성 마을을 삼켜버리고 있는 폭우는
더러 이곳 제주지역에 내릴 비가 아니었을까?
일요일, 덥고 짜증나는 집을 떠나
한라산의 숲에 갔더니
비구름이 아닌 새하얀 뭉게구름이
가을이 문턱에 이르렀음을 느끼게 하고
말랐지만 숲에 앉으니 서늘한 기운이….
♧ 구름처럼 - 섬그늘 윤용기
흔적을 지우는 일이 슬픔이었으면,
상처를 감싸주는 일이 구름이었으면 좋겠다.
비틀비틀 술 취한 취객처럼
돌아가고 있는 지구 위에
사라졌다 또 다시 나타나
한 바탕 비를 쏟아 붓고 가는 구름이었으면 좋겠다.
내 생각과 기억들이
망각의 늪에서 허우적대며
구름처럼 사라져 버리는 날
나는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가리라
바람 불어도 아무런 거리낌 없는 구름처럼
휑하니 지구 한 모퉁이 작은 섬에서
바다를 벗 삼아, 구름을 벗 삼아
내 망각의 기억들을 회생시키고 싶다.
♧ 폭염의 하얀 구름 - 김내식
이글거리는 지열이 올려 치받는
폭염의 하늘에 드높이 뜬 하얀 구름
뭉칠 줄 모르고
허깨비로 동동 떠다닌다
잠 못 이룬 구름인들
제정신일까
열하의 감자밭에서
소금을 입에 털어 넣고 찬물만 계속 마시니
뱃속이 출렁거려
멀미가 난다
따가운 눈꺼풀 수건에 찍어 누르며
수 없이 하늘을 보고 또 보나
여전히 희다
앞으로는 속 좁은 마음에 뜨는
근심의 검은 구름 조차
사랑을 해야겠다
그 들이 뭉치고 뭉쳐 비가 되어
한바탕 신나게 퍼붓고 나면
심신이 시원할테니
♧ 구름경전 - 김종구
무심타 하지 마시라
바람 따라 흐른다고
마음마저 없으면
어찌 그 높은 곳을 뛰어내릴 수 있겠는가
그리하여 마른 곳 다 적시고도 남아
길을 내며 흐를 수가 있겠는가
반짝이는 침묵으로 흐르고 흘러
처음으로 돌아갈 줄 알겠는가
허황타 하지 마시라
손에 잡히지 않는다고
가벼운 마음 하나로 하늘에 꽃을 피워
온 세상을 먹여 살리고
없던 나로 돌아간다
♧ 치유의 숲 - 강효수
마음이 바쁜 날에는
숲으로 가자
고요한 숲의 정맥
숲길을 걷다 보면
바쁜 심장은 무심으로 흐르고
바쁜 몸짓 바쁜 숨결
살포시 안아주리라
한 때
시린 가슴마저 하늘에 내어주었던
숲은
이해와 용서로 화해하며
상처를 보듬어 푸른 가슴 이루었다
세상이 안아줘야 행복한가
숲은 세상에서 버려져야 행복한데
삶이 헝클어지고
생각이 바쁜 날에는
숲으로 가자
숲의 정맥 따라 심장으로 들어가면
내 안에 나는 무념으로 흐르고
바쁜 눈길 바쁜 걸음
지그시 재워주리라
♧ 그해 여름 숲 속에서 - 우당 김지향
이른 아침 산을 오른다
아직 바람은 나무를 베고 잔다
동쪽 하늘에 붉은 망사 천을 깔던 해가 숲을 깨운다
숲은 밤새 바람에게 내준 무릎을 슬그머니 빼낸다
베개 빠진 바람머리 나뭇가지에 머리채 들려나온다
잠 깬 산새 몇 마리 이 가지에서 저 가지로
그네를 뛰는 사이 숲들이 바람뭉치를 머리 위에 올려놓고
북채가 된 가지로 산새의 노래를 바람 배에 쏟아 부으며
탬버린이 된 바람 배를 치느라 부산떤다
입 다물 줄 모르는 가지가 종일 바람바퀴를 굴린다
숲 속은 온종일 탬버린 소리로 탱탱 살이 찐다
세상을 때려주고 싶은 사람들은 왼쪽에서 오른 쪽으로
아래서 위로 숲을 안고 돌며 바람바퀴를 굴리는
숲의 재주를 배우느라 여름 한 철을 숲에서 산다
♧ 여름 숲 - (宵火)고은영
졸음과 졸음 사이 내 안을 선회하는 작은 새들
절기의 연산 작용이 한참 뜨겁다
뜨거운 감각이 여름 한낮을 달구고
풀빛 향 실어 나르는 바람도 더위를 식히지 못하고
여름과 소통하는 향기나 노래 속에
나는 더위를 뭉개고 있다
나에겐 언제나 그대가 있지만
이 한나절 무엇이 나를 이토록 미치게 하는가
철 지난 기억 몇 줄
나른한 시간대에 붙들려 누운 자리
노오란 새 한 마리 느티나무 가지를 박차고
꿈결처럼 여름을 날아오른다
환상의 색조 언제 보아도 또다시 보고 싶다
푸드득 날아오르는 푸르고 푸른 깃털들
푸른 소음들을 버리고 맥없이 주저앉는
저 어느 갈 빛 어둠의 골목은 여름으로 다시 설레고
꿈을 쏘아 올리는 하늘 동동 떠가는 구름 들의 출렁임
여름 여름 코끝에 감도는 그리운 향기
엊그제부터 울기 시작한 매미들의 맹목적인 소리도
내 졸음의 영역을 침범하지 못하네
그대는 나의 영원한 레드그린 심장을 뛰게 하는 힘
그대는 내 안에 맑은 강물 항상 청결한 불루벨벳
나는 그대로 인해 웃고 그대로 인해 행복하고
그대로 인해 미소하나니
그러므로 그대는 오로지 내 영혼의 아름다운 지주
당장 배고픈 우울도 위로받는 그대는 나의 단단한 믿음
실존하지만 보이지 않고 늘 가슴 안에서나 뛰노는 어린 새
숲은 생명을 일으키는 떨리는 기적
건강한 거지
깜작새 졸음새 천국새 눈물새
내가 부르는 그리운 이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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