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국내 나들이

강화 광성보를 가다

김창집 2013. 8. 26. 13:19

                                                                 안해루

 

▲ 2013년 8월 25일 일요일 맑음

 

  전날 강화유스호스텔에서 있었던 ‘2013 한국작가대회’ 신입회원 환영회 겸 뒤풀이로 거의가 ‘속이 속이 아닌 상태’에서 가졌던 문화유산답사는 몇 대의 차에 나눠 타고, 먼저 섬을 가로 질러 염화강 너머 경기도 김포시와 마주한 광성보로 향한다. 늦게 가느라 카메라를 안 가지고 갔으므로 휴대폰으로 사진을 찍어 올린다.

 

 작년 10월초에는 강화도에 답사 와 새벽에 마니산에 오르고, 전등사를 거쳐 석모도 보문사를 다녀온 뒤 고려궁지와 갑곶돈대 등을 돌아본 터라, 오늘은 느긋하게 차창 너머로 그냥 농촌 풍경을 살피며 간다. 인삼의 고장이지만 우리가 가는 길쪽에서 인삼포는 그리 많이 안 보이고 거개가 논으로 벼가 막 이삭을 내밀고, 수수나 고구마가 가끔 눈에 띈다.

                                          염하강 너머의 김포땅

 

▲ 사적 227호 강화 광성보

 

  우리가 처음 찾은 강화 광성보(江華 廣城堡)는 고려 때부터 조선시대에 걸쳐 강화해협을 지키던 요새이다. 보(堡)라면, 예전에 흙과 돌로 쌓은 작은 성(城)을 이르던 말인데, 이곳은 고려가 몽고 침략에 대항하기 위해 강화도로 천도한 후 돌과 흙을 섞어 해협을 따라 길게 쌓았던 곳이다.

 

  광해군 때에 이르러 많이 허물어져 있던 것을 다시 고쳐 쌓은 후, 효종 9년(1658)에 강화유수 서원이(徐元履)가 광성보를 설치하였다. 숙종 5년(1679)에 완전한 석성(石城)으로 쌓았고, 같은 해에 축성한 오두돈대, 광성돈대 등을 관할하였다. 1976년에 다시 복원하면서, 신미양요 때 순국한 어재연 장군을 비롯한 군인들의 기념비 등을 건립한다.

 

                                      소나무가 아름다운 숲길

 

▲ 신미양요 때의 최대 격전지, 광성보

 

  미국은 1866년의 제너럴셔먼호 사건을 빌미로 1871년 조선을 침략하였다. 이른 바 신미양요(辛未洋擾)로 미국에서는 ‘48시간 전쟁’이라 하는데, 통상을 요구하며 침입한 미국함대는 물치도에 정박하고 강화도해협에 군함 두 척을 파견하였다. 당시 강력한 쇄국정책을 실시하던 흥선대원군은 미군의 불법 영해 침범을 경고하고 철수를 요구하였다. 미군은 아랑곳하지 않고 광성진에 접근하자 조선군은 광성, 초지, 덕진, 덕포등의 포대에서 경고용 포격을 쏘아 물리친다.

 

  이에 미군은 조선정부에 사과와 손해배상을 요구했고, 조선정부가 이를 거부하자 6월 10일에 군함을 앞세우고 군인 600여 명을 초지진(草芝鎭)에 상륙시켜 무력으로 점령한다. 이튿날은 덕진진을 함락시키고 이어서 광성보까지 손에 넣었다. 6월 11일의 광성보전투에서는 광성보를 지키던 중군장 어재연(魚在淵)을 비롯한 49인의 장사와 200여 명의 군사가 전사하고, 20여 명이 다쳤다. 광성보 군인들의 격렬한 항전으로 미군은 사람들만 죽게 하고 이튿날 물치도로 물러가고 결국 아무런 성과 없이 철수하였다.

 

                                      신미양요 순국무명용사비

 

▲ 안해루와 순국무명용사비

 

  오랜만에 보는 애기똥풀 꽃이 간간이 내다뵈는 길을 조금 걸어 들어가니, 안해루(按海樓)가 육중하게 앞을 막아선다. 돌로 견고하게 쌓아 단청까지 해놓은 팔작지붕의 안해루 문으로 들어가니, 바로 염하강이고 그 너머로 김포 땅이다. 아무래도 강 모양의 해협이어서 바닷물이 흘러 ‘짠물’이라는 뜻으로 염하(鹽河)라 했을 터, 이곳에서 고기가 많아 잡혔다니 그대로 보고인 셈이다.

 

 그곳에서 나와 다시 남쪽으로 오른다. 공부하러 나온 초등학생들이 자꾸 딴전을 핀다고 선생님의 주의를 주고 있는 곳을 웃으며 지나, 멋있는 소나무가 도열해 있는 숲을 따라 오르니, ‘신미양요 순국무명 용사비’가 나타난다. 당시 우월한 무기를 자랑하는 미군이 10여명의 사상자를 낸 데 비해 조선군 지휘관 어재연 장군과 군졸이 열세한 무기로 용감하게 싸우다 순국한 것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비다.

 

 옆에 쌍충비각(雙忠碑閣)이 서 있어 창살 너머로 바라보니, 당시 전투에서 순절한 어재연 장군과 그의 아우 어재순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다. 그리고 길 건너에 아담한 묘역에 잘 정돈된 무덤 7기가 나란히 자리해 있는데, 신미순의총이라 한다. 당시 이곳에서 전사한 중군 어재연 장군과 아우 재순을 비롯한 군관, 사졸 53인 중 신원을 분별할 수 없는 시신 51구를 이곳 7기의 묘지에 나누어 묻었다 한다.

 

                               쌍충비각(위)와 신미순의총

 

▲ 손돌목의 슬픈 전설

 

  다음으로 찾은 곳은 조금 높은 곳에 자리한 손돌목돈대이다. 그곳에서 뮨화유산 해설사 이종복 선생의 설명으로 여러 가지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고려 고종(高宗) 때, 몽골의 침입을 피해 강화로 피신하던 임금의 행차 중 광성보를 지나자 갑자기 뱃길이 막혔다. 피난길에 있던 왕은 뱃사공 손돌(孫乭)의 계략이라 여겨 그를 죽이라고 명령했다. 손돌은 이곳의 지형으로 인한 현상이라고 말했지만 그 말을 곧이듣지 않았다. 손돌은 바가지를 띄우고는 그 바가지가 떠가는 대로만 가면 뱃길이 열릴 것이라 했는데도 처형을 당한다.

 

 일행은 다른 방도가 없어 일러준 대로 했더니, 뱃길이 열려 무사히 강화도에 도착해서 내리려는데, 갑자기 회오리바람이 일어났다. 왕은 그때서야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말머리를 베어 제사를 지내니, 그제야 풍랑이 그쳤다고 한다. 그 후로 사람들은 강화 광성보와 김포 덕진진 앞 좁은 물길을 손돌목이라 불렀다. 그 앞산에 손돌의 무덤이 있고, 해마다 그가 죽은 10월20일 경이면 큰 바람이 불어 손돌의 넋이 아직도 그곳에 있음을 암시한다고 하며, 그 바람을 손돌바람이라고 한다.

 

 

                              밖에서 본 손돌목돈대와 들어가는 곳 

 

                                   손돌목돈대 안과 손돌목(아래)

 

▲ 계란으로 바위치기 미군과의 전투

 

신미양요 때 희생당한 우리의 기록에는 조선군 사망자가 53명으로 올라 있는 정도지만 미국측 기록에는 아주 상세하게 나와 있다. 1781년 6월 10일과 11일 이틀 동안 미군 600여 명을 투입시켜 조선군 전사자 243명, 백병전에서 피살 또는 투신자살이 100여 명, 부상당한 포로가 20명이었다고 한다. 미국측 사망자는 중위 한 사람, 선원 한 사람, 일병 합쳐서 3인이고, 10여 명이 부상당한 게 전부였다. 느린 재장전 형태의 조선 소총은 미해군의 무기인 레밍턴 카빈과 상대가 되지 않았지만 조선군은 돌을 던지고 모래를 뿌리며 최후의 1인도 남김없이 끝까지 싸웠다고 한다.

 

 그들은 어재연 장군의 깃발인 ‘수자기(帥字旗)’를 탈취해 갔고, 5대의 전함 중 USS 콜로라도 호의 기수였던 헤이든에 의해 성벽에 성조기를 내걸면서 전투가 끝났다. 맥키 중위는 미국 해사 출신의 첫 전사자가 되었고, 지금도 아나폴리스 미 해군사관학교 교회 앞에 그의 추념비가 서 있다. 또 그를 애도하기 위함인지 미국 지도에는 이곳 광성보를 ‘Fort Mckee’로 표시하고 있으며, 당시 전투에 참가했던 선원 9명과 해병대 6명이 명예훈장을 수여 받았다. 그때 빼앗겼던 ‘수자기’는 미국 해군사관학교 박물관에 보관하고 있다가 2007년 10월 22일 136년 만에 10년간 임대 형식으로 국내에 들어와 있다 한다. 그리고 미국에서는 쾌승을 거둔 이 전쟁의 역사를 아주 자세하게 가르친다고 한다.

 

  이런 저런 얘기를 듣고 씁쓸한 마음으로 돌아오는데, 염하강변에 밤이 튼실하게 익어가는 모습과 멋있는 소나무들을 바라보며 이런 현장을 잘 보존하여, 후세들에게 힘이 없고 정신줄을 놓고 있으면 이처럼 비참한 역사가 반복된다는 교훈을 심어주어야 한다는 생각을 해본다.

 

                                   밤이 익어가는 강변과 내려오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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