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디카 일기

억새꽃이 하려는 말은

김창집 2013. 9. 24. 01:00

 

우리가 1단체 1오름 가꾸기로 맡아

보살피는 왕이메에도

이제 억새가 흐드러지게 피었다.

 

원래 억새는 벼과 식물이어서

추운  북쪽에서부터 먼저 피기 시작하여

따뜻한 남쪽으로 내려온다.

 

그러기에 제주도에도

한라산에서부터 피기 시작하여

차차 아랫마을로 내려오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바는

억새꽃과 이삭을 좀 구분해 보시라는 것이다.

‘억새’라는 시를 검색해보면 대부분이

억새의 열매(?)가 익어 씨앗을 마구 날리거나

날려버리고 얼마 안 남은 상태의

억새를 노래한 것이 대부분이고

 

막 이삭 껍질을 째고 나와 금빛을 띠고

앙증맞고 붉은 꽃을 매달고 있을 때의

그런 모습을 제대로 그린 시는 드물다는 것.

그러면 지금 이제 막 나와 하늘을 향해 팔을 벌리고

억새가 하려는 말은 무엇인지 잘 살펴보세요. 

 

 

♧ 억새꽃 - 권경업

 

서그럭서그럭

흔들리는 너, 긴 사색(思索)의

배경(背景)이고 싶다, 나는

 

뉘 삶인들 다를까만

치밭목 무성하던 상수리 숲처럼

우여(紆餘)와 파란(波瀾), 서서히 줌 아웃 되는

모습 뒤의 그림자이고 싶다, 나는

한 드라마의 라스트 신에

오버랩 되는 추억이고 싶다

 

말없이 다가와 조용히 멀어지는 계절

회갈색(灰褐色) 풍경(風景) 속 여백(餘白)같은 사람아

차마, 우리 삶을 다 깨달았다 해도 쓸쓸할

쑥밭재 노을 걸리는 저물 녘

잔잔한 배경 음악의 조개골 물소리

나는 너의 그런 그리움이고 싶다, 사람아

 

아! 억새꽃 한 아름 같은 사람아

 

 

♧ 억새 - 하태수

 

우리가 산다는 건

태어난 빚 갚기 위한 걸까

 

하늘에

마음을 메달아, 놓고

실컷 울려고 했다

 

세월을 불러놓고 보니

내 머릿결은

허연 백발로 나부끼고

 

침전된 뭇 아픔들이

할퀴고 간 주름살에

서녘이 찾아들 때쯤

 

스치는 바람마저

보이지 않는 길 부딪혀

가슴 저리도록 서러운가

 

서늘한 허공

끌어안고 말라버린 눈물샘

기억마저 거두어간다  

 

 

♧ 억새는 파도를 꿈꾼다 - 김정호

 

언제나 너는

아직 사랑할 수 있는 기쁨으로

세상을 울리는 눈물이 되고

따뜻한 목소리가 된다

음모처럼 낮은 수군거림은

비수처럼 밀려 왔다

가슴 한쪽만 지우고 돌아서고

날마다 출렁거리는 추억은

잎사귀 마디마다 햇살로 튀어 올라

물빛 그리움으로 쓰러지면

나는 또 밀려오는 네 소리에 잠든다

하얀 기억이 흔적 없이 부셔져도 좋다

세파에 멍든 가슴 씻겨내는

너는 잔잔한 파도 소리

오늘은

먼 수평선 한 끝을 당겨와

나를 허물고 지나가 다오  

 

 

♧ 억새꽃1 - 정군수

 

고속도로를 달리다가 산등성이에서 손을 흔드는

억새꽃을 보고 누구를 기다리는 그리움일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산길 무너진 무덤가에 핀 억새꽃을 보고 저 혼자

지새우는 외로움이 저럴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경운기가 터덜거리는 길옆에서 흙탕물을 뒤집어 쓴 채

서있는 억새꽃을 보고 흙과 자갈과 바람만 있으면

뿌리를 내리고 살아간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은발의 빛깔로 말라버린 향기 없는 꽃잎을 자꾸자꾸

하늘로 띄우는 억새꽃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몇 해의 가을이 가버린 뒤에야

아! 나는 그게 어머니의 모습이었음을 알았습니다.

  

 

♧ 억새꽃 - 구재기

 

나는 아직도 매일처럼

운명보다 진한 만남으로 피었다 진다

 

흔들리는 나의 작은 가슴에 가득

소리 없는 꽃잎으로 피었다 진다

반도의 땅 산비알 밭둔덕에

내 너를 위해 한 방울의 땀을 흘릴지니

 

새하얀 억새꾳, 피면서 흔들리어라

메마른 억새꾳, 지면서 흔들리어라

 

어머니 묻힌 산기슭을 돌아 내려오노라면

달은 무서리에 더욱 푸르러지고

바람은 무서리에 더욱 거칠어 지나니

 

내 너를 위해 한 방울의 피를 뿌려라

하늘이 무너질 때마다 두 눈을 감았다 뜨리라

 

운명보다 진한 만남으로 나는 또 피었다 진다  

 

 

♧ 억새풀이 되어 - 김해화

 

우리 억새풀이 되어야 써

칼날처럼 뜻 세운 이파리로 바람까지도

비겁한 하늘이라면 하늘까지도

목베어 거꾸러뜨리고

서 있어야 써 우리 억새풀이 되어

 

사랑과 미움을 가릴 줄 알아

사랑이라면 뿌리째 뽑혀 죽어도 좋은 복종으로

미움이라면 그런 사랑까지도

사정없이 썸벅썸벅 베어버리는 반란으로

 

하나 보다는 둘, 둘 보다는 넷

넷보다는 더 많이 더 많이 모일 줄 아는

억새풀

바람 사나울 수록

어둠이 깊을 수록 또렷이 깨어나

소리지르며 눈 부릅뜨는 풀

여리디 여린 풀 아니고

뼈있는 풀

우리 억새풀이 되어야 써

 

 

'디카 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한라돌쩌귀와 권경업 시인  (0) 2013.09.26
뚱딴지 꽃 빛나던 날  (0) 2013.09.25
추분, 그래 하늘을 날자  (0) 2013.09.23
한가위, 좋은 날로 만드소서  (0) 2013.09.19
권경업의 가을 시편과 노루  (0) 2013.09.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