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디카 일기

한라돌쩌귀와 권경업 시인

김창집 2013. 9. 26. 09:18

 

 

권경업 시인은 오히려 산악인으로 유명하신 분이다.

그 분의 시집 ‘뜨거운 것은 다 바람이 되었다’에 나온

저자 소개에는 ‘권경업은 등단하지 않았다. 등산만 했다.’

고 전제하고, ‘백두대간을 최초로 종주한

1970년대 부산지역 산악계의 전설’로 나와 있다.

 

지리산과 설악을 엄청 사랑하던 시인은 이제

무대를 옮겨 히말라야에서 일을 벌이고 있다.

 

생각이 깊으면 시름도 깊은 것

산에서 마시는 소주의 양과 사색의 깊이는 비례하는 것일까.

시 곳곳에 싸한 소주가 등장하는 것을 보면

나만큼이나 술을 좋아하는 것 같다.

 

일요일, 족은노꼬메 정상부에서

활짝 핀 이 한라돌쩌귀를 보았을 때

문득 그분이 생각난 것은 무슨 때문일까? 

 

 

♧ 나는 오늘도 너를 마시고 싶다

 

몽롱한 비취빛, 매끄러운

네 살결을 탐해서가 아니다

긴 목으로부터 흘러내린, 부드러운

가슴 선(線)의 아름다움에 혹해서도 아니다

기울여도 평정을 유지하고

출렁이다가도 갈앉는

맑디맑은 네 영혼에 흠뻑 취하여

탁한 나를 쓰러뜨려야한다

 

내 작은 잔에, 오늘도

마지막 한 방울까지 다 쏟아부은, 너

빈 가슴에 머리 기대어

먼 취밭목 솔바람 소리 듣고 싶다, 소주

참진(眞) 풀꽃이슬 같은  

 

 

♧ 소주

 

길지 않은, 단 한 번의 입맞춤으로

네 맑은 영혼 쓰디쓰게

내 빈 가슴에 쏟아 붓고

괴롭다며 발버둥 치다가도

이내 그립다며, 다시

네 차가운 입술 목말라 찾는,

 

나는 너에게 중독되었다 

 

 

♧ 산사람은 소주를 마신다

 

슬픔이 흐르던 산

기쁨이 일어나던 산

그리운 산 그리운 님

못내 그리다가

도회의 뒷골목

옛 산친구를 만나

어느 선술집 쪽탁자에서

노가리목 비틀어 잡고

그리움을 달랠까

소주 싫어하는 산사람 없지

산쟁이 마음처럼 투명한 액체

마시는 만큼 솔직하게 취하는 술

슬픈 이야기에 슬퍼하고

기쁜 이야기에 기뻐하며

쪽탁자 모서리에 쌓여가는 빈 병

 

장구목 눈사태에 묻히고

설악골에서 동지의 주검을 메고

소주병 씻어 마시던 12탕

새벽녘 부채바위 밑에서

동문으로 술 사러 가도록

빈병 하나하나마다 취한

옛 이야기가

백두대간 종주하는

나그네의 발길에 채인다 

 

 

♧ 향수

 

산꾼아!

천축사 샘터에

서걱거리는 살얼음 끼이거든

우리 옛날로 돌아가자

 

박쥐길에

밤새도록 바람이 울어댈 때

어렵게 피운 모닥불 가에는

화장끼 없는 산아가씨 수다를 떨고

손톱밑 새까만 때

매니큐어처럼 묻힌 대학 산악부원

밤새도록 불러대던 산노래 그리워

찌그러진 코펠에 소주를 돌린다

 

그런 날은 가끔씩 눈이 내렸지

너와 나의 대화에

모락모락 김이 서리고

잊혀지다 남은 전설 같은 이야기

꼬부라져 나올 때면

야바위꾼 언 몸을 녹이려 끼어 드는구나

모닥불이 빛과 온기를 접어가는 중에...

 

점점이 불빛 보이는 까아만 아래

할머니 가게터 쯤엔

누군가 부르는 소리

 

아직도 이 밤을 헤매이는 이

홀로 있는 것만으로도

어두움은 저리 막막하여 외쳐 부르는데

우리 가난한, 그래도 나누어 가질 가슴 있기에

그가 누구이든 탓하지 말자

 

산꾼아!

그런 날이 그립지 않느냐

천축사 샘터에 살얼음이 끼이거든

 

우리 그런 옛날로 돌아가자 

 

 

♧ 전설

 

입동이 지나면 가난으로 배회하던

용두산 뒷길 골목 끝의 낡은 술청을 찾아

우리는 세월에 등 밀려 흐느적거리며 가지.

 

시간이 때에 절어 겸이의 얼굴만큼

반들거리는 쪽탁자 사이하고,

도시에서도 토왕을 꿈꿀 수 있다고.

 

말라 비틀린 목구멍 찢어발겨진 노가리,

산꾼의 영혼을 닮은 싸한 소주,

하루가 그렇게 씻겨 내려갔다.

 

뿌옇게 김이 서리는 창 진눈깨비라도 뿌리면

삐꺽이는 입구 미닫이 숨을 죽이고

탁자 모서리 쌓여 가는 빈 병 사이로

설악의 눈바람이 들렸다.

 

토왕을 빼어 닮은 불빛 아래의

소주병 그리고 이내 번득이는 픽켈,

 

폭죽처럼 튀는 靑氷의 파편들

절겅이는 금속성 장비 환청으로 울렁이는 가슴.

 

전설이 염원의 끝머리에 설 때면

창밖으로 하얀 만다라 우리들의 자유를 축복했다.

 

그러나 오래전 또 다른 전설을 찾아 악우들은 떠났고

토왕은 스스로를 깨뜨려 설악동 저자거리를 지나

쌍천으로 쌍천으로 매일 아침 해를 던지는 동해로 갔다.  

 

 

♧ 마른안주로 오징어를 씹을 때

 

시인은 독하게 소주를 마신다

 

중학교만 겨우 나와 바로 뱃놈이 되었다는

울릉도 천부 사는 지인(知人) 이씨

심심할 때 먹으라며, 꼭꼭 씹어 먹으라며

스무 마리 한 묶음이 제 다리에 묶여있는

그것도 꽁꽁 묶여있는

짠바람에 잘 말린 오징어 한 축 보내왔다

캄캄한 겨울바다 집어등(集魚燈)에 눈이 멀고

허황된 미끼, 루어(lure)에 환장해, 오죽했으면

채운 먹물 자랑이라도 하듯 까마귀 오(烏)자에

도둑놈 적(賊)자를 이름으로 쓴 오적어(烏賊魚)

뱃속 시커먼 놈들, 발기발기 찢어발겨

맑은 소주를 마실 때도 꼭꼭 씹어 먹으란다

세상 시끄러울 때 말고, 심심풀이로

괜히 입 잘 못 놀리다가

섬뜩한 채낚기 바늘에 코 꿰어

냉동창고에 몇 년이고 갇혀, 꽁꽁

얼어붙은 냉동오징어 꼴 나지 말고

그래도 비린내 물씬 풍기는 장바닥, 오뉴월

죽은 좆처럼 축 늘어진 물오징어 신세가 났다며

그저, 가끔씩

질겅질겅 씹는 이빨 맛만 보란다.

 

 

♧ 우리들의 겨울나라

 

    -어느새 기억의 소실점이 되어버린, 70년대

      설악(雪岳)을 이상향(理想鄕)으로 삼았던

      이 땅의 진정한 악우(岳友)들을 그리워하며

 

별이 봉우리 보다 낮게 뜨는 곳

천화대(天花臺) 긴 새벽 마칼바람에도

짧은 해 솟기를 기다리진 않았습니다

부질없는 상념(想念)이 수직으로 떨어지던 벽과 벽

침봉(針峰)은 우리 깨달음의 척도였습니다

끈질긴 고통이 멈추지 않는 반쪽 발디딤

그 정점의 완전한 자유를 갈구하던 뜨거운 가슴들

하얗게 젊음을 사르고 가끔은 목숨까지도 살라

다시 우뚝한 침봉이 되어 솟던 아침

작은 꿈 공유할, 사랑과 우정을 위하여

하얀 만다라 하늘 가득 쏟아지던 나라

 

당신이 누구이며 내가 어디에 있던

설피와 덧신의 가지런한 발자국들은

사연 긴 등반기(登攀記)기가 되어

제 홀로 중얼중얼, 화채봉 자작 숲으로 가버린

그 겨울나라에는 이제 눈이 내리지 않습니다

무너미 세찬 바람에

자만과 오만을 날려보내게 한 뒤

삶과 존재의 의미를 소곤대던 함박눈은

더욱 내리지 않습니다

 

번쩍이던 모래내 픽켈은

여덟 발의 아이젠과 함께 눈부신 설동(雪洞)의 기억 속에 녹슬고

먼 설산(雪山)을 해메이던 이상(理想)의 편린(片鱗)들이

양폭산장 잿빛 모퉁이를 서성일 때

낡은 사진첩에서 빠져나온 듯한 색 바랜 흑백그림자 한 둘

침상 구석 구부정히, 월경(月鏡) 대신 팩소주를 마셔댑니다

‘잃어버린 지평선’ 같은 갈증을 마셔댑니다

 

깊이를 재어보지 않았던 젊은 날의 천불동

우리의 고행(苦行)을 동여묶던 9 미리 에델리드쟈일은

모텔 네온 등 환한 속초 대포리 선창의

화려한 언어와 형식에 얽매여 깊은 잠에 빠져 있습니다

여명 속 토왕폭(吐旺瀑)은 여전히 시퍼렇게 일어서는데

골마다 제 목소리 찾는 메아리 들리지 않고

별빛만 서북주능 위에서 흔들릴 것입니다

 

지친 걸음 젖은 땀방울에, 아직

공룡의 등을 타고 마등을 넘어오는 이가 있다면

그가 누구이던

내 그를 위해 스베어버너에 찻물을 끓이며

귀 아린 비선대의 아침을 기다리겠습니다

 

골, 골에 사태지던 어느 해

샹그릴라를 향해 떠나가 돌아오지 않는 이들이

귀면암(鬼面岩) 아래 잣나무 관솔 깎아 염주알 만들던 그곳은

구수한 감자전, 당귀향 가득하던 우리들의 겨울나라

아직도 녹지 않은 그리움이, 잦은골의

오월 잔설(殘雪)처럼 쌓여 있는 설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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