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래도 아직 거친 산행은 삼가야겠다고
오름오름회의 산행을 외면하고서도
갑자기 나리는 햇살에 도무지 견딜 수 없어
혼자 한라생태숲으로 차를 몰았다.
그러나 햇볕은 시원치 않고 사나운 바람만
허술하게 입고 간 나를 시험에 들게 한다.
곳곳에 남아 있는 단풍,
그러나 해가 들어간 다음에는 찍을 수 없었다.
그래도 올 마지막 보는 단풍일 것 같아
찍어놓은 것 중에서 밝은 색의 것을 골라
한희정 시집 ‘꽃을 줍는 13월’에서 뽑은
가을 시편과 함께 실어본다.
♧ 송악산 파도
후벼진 상처에도
침묵으로 감싸 안는,
사월의 비명 같은
시위 떠난 햇살들이
하얗게 늦은 메밀꽃
후손처럼 피어서
섬 끝을 몇 번 돌아야
제 갈 길 가려나
“절울이 절울이” 외치며
태엽 칭칭 감는 바다
퇴적된 시간의 흔적,
한 줄 현을
뜯는다
♧ 시월 재채기
담 둘러 옹기종기 바람도 건너는 곳
어느 집 며늘아기
산달이 다 됐는지
맞닿은 울타리 너머
흰 빨래가 가득해
바람이 세찰수록 산은 더 낮아지고
환절기 재채기에
목이 빨간 가을 풀꽃
오종종 애기꽃향유
시럽 한술 떠먹네
♧ 붉은 억새 - 한희정
섬에도 가을이면 바람이 붉어지네
평생을 지탱해 온 깡마른 정강이로
한 개비 솔담배 태우며 서둘러서 오시네
철마다 가시 세우던 저 야생의 들녘을
온몸으로 뒹굴었지, 자국 없는 낮달처럼
홀로 산 천수의 가슴 속 저리 붉게 탔을까
짧아서 더 뜨겁던 할머니의 신접살림
아직도 식지 않은 건천의 언저리에
시월의 수문 열리듯 와락 젖는 치마폭
♧ 단풍 한 잎
다시 또 이별이네
모른 척 뒤돌아섰네
와지끈 깨문 입술
알기나 하는 듯이
황급히 절명시 한 줄
내 앞에다 흘리네
♧ 문득
세월이 가면 목탁소리도
절로 익는다는
상좌스님 말씀에도
눈 하나 꿈쩍 않던
행자승
서툰 염불에
그리움이 묻었다
♧ 자화상
떨어진 이파리에
이파리 또 얹는다
염색 시기 놓친
흰머리도 그러려니
골 깊이
입술이 빨간
늦가을의 붓터치
♧ 11월의 숲
모두 다 떠난 후에야 빈자리를 알았다
몸뚱이 혼자 될 때까지 아픈 줄도 몰랐던,
요양원, 맞대어 앉아 마른 다리 긁고 있다
경고등 반짝여도 비켜설 줄 몰랐다
파킨슨 약봉지 들고, 제 그림자 앞에 두고
그 봄날 아지랑이 속을 주춤주춤 걷고 있다
♧ 아버지와 은행잎
아버지 연세만큼 노랗게 주름졌을,
문패와 나란히 선 오십 년 나무 곁에
한 그루 은행나무가
꿈을 줍고 계신다
싸리비 다 닳도록 아직도 쓰는 마당
막 자른 손톱 세워 수술자국 긁는다
담 너머 흘린 꿈들을
가슴속에 담으며
뚜벅이 걸음으로 삶을 음유하시던,
낡은 악보의 음표 같은 그리움들
천지간 눈물 뿌리듯
가을 함께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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