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디카 일기

한희정 가을 시편과 단풍

김창집 2013. 11. 11. 00:29

 

아무래도 아직 거친 산행은 삼가야겠다고

오름오름회의 산행을 외면하고서도

갑자기 나리는 햇살에 도무지 견딜 수 없어

혼자 한라생태숲으로 차를 몰았다.

 

그러나 햇볕은 시원치 않고 사나운 바람만

허술하게 입고 간 나를 시험에 들게 한다.

곳곳에 남아 있는 단풍,

그러나 해가 들어간 다음에는 찍을 수 없었다.

 

그래도 올 마지막 보는 단풍일 것 같아

찍어놓은 것 중에서 밝은 색의 것을 골라

한희정 시집 ‘꽃을 줍는 13월’에서 뽑은

가을 시편과 함께 실어본다.

 

 

♧ 송악산 파도

 

후벼진 상처에도

침묵으로 감싸 안는,

 

사월의 비명 같은

시위 떠난 햇살들이

 

하얗게 늦은 메밀꽃

후손처럼 피어서

 

섬 끝을 몇 번 돌아야

제 갈 길 가려나

 

“절울이 절울이” 외치며

태엽 칭칭 감는 바다

 

퇴적된 시간의 흔적,

한 줄 현을

뜯는다 

 

 

♧ 시월 재채기

 

담 둘러 옹기종기 바람도 건너는 곳

어느 집 며늘아기

산달이 다 됐는지

맞닿은 울타리 너머

흰 빨래가 가득해

 

바람이 세찰수록 산은 더 낮아지고

환절기 재채기에

목이 빨간 가을 풀꽃

오종종 애기꽃향유

시럽 한술 떠먹네 

 

 

♧ 붉은 억새 - 한희정

 

섬에도 가을이면 바람이 붉어지네

평생을 지탱해 온 깡마른 정강이로

한 개비 솔담배 태우며 서둘러서 오시네

 

철마다 가시 세우던 저 야생의 들녘을

온몸으로 뒹굴었지, 자국 없는 낮달처럼

홀로 산 천수의 가슴 속 저리 붉게 탔을까

 

짧아서 더 뜨겁던 할머니의 신접살림

아직도 식지 않은 건천의 언저리에

 

시월의 수문 열리듯 와락 젖는 치마폭 

 

 

♧ 단풍 한 잎

 

다시 또 이별이네

 

모른 척 뒤돌아섰네

 

와지끈 깨문 입술

 

알기나 하는 듯이

 

황급히 절명시 한 줄

 

내 앞에다 흘리네

 

 

♧ 문득

 

세월이 가면 목탁소리도

 

절로 익는다는

 

상좌스님 말씀에도

 

눈 하나 꿈쩍 않던

 

행자승

 

서툰 염불에

 

그리움이 묻었다 

 

 

♧ 자화상

 

떨어진 이파리에

 

이파리 또 얹는다

 

염색 시기 놓친

 

흰머리도 그러려니

 

골 깊이

 

입술이 빨간

 

늦가을의 붓터치 

 

 

♧ 11월의 숲

 

모두 다 떠난 후에야 빈자리를 알았다

 

몸뚱이 혼자 될 때까지 아픈 줄도 몰랐던,

 

요양원, 맞대어 앉아 마른 다리 긁고 있다

 

경고등 반짝여도 비켜설 줄 몰랐다

 

파킨슨 약봉지 들고, 제 그림자 앞에 두고

 

그 봄날 아지랑이 속을 주춤주춤 걷고 있다   

 

 

♧ 아버지와 은행잎

 

아버지 연세만큼 노랗게 주름졌을,

문패와 나란히 선 오십 년 나무 곁에

한 그루 은행나무가

꿈을 줍고 계신다

 

싸리비 다 닳도록 아직도 쓰는 마당

막 자른 손톱 세워 수술자국 긁는다

담 너머 흘린 꿈들을

가슴속에 담으며

 

뚜벅이 걸음으로 삶을 음유하시던,

낡은 악보의 음표 같은 그리움들

천지간 눈물 뿌리듯

가을 함께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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