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문학의 향기

문무병의 시와 남천

김창집 2013. 12. 13. 08:45

 

♧ 이번에 내놓은 시집

   ‘11월엔 그냥 젖고 싶어’ 서문

 

 * 로사에게

 

내가 쓴 시는

흔들리는 가을의 억새꽃이어도,

겨울의 돔박새 울음이어도 좋겠다.

흉을 보려니 하얗게 없고,

칭찬하기엔 너무 처량한 노래.

삼류로 노래하지만 버릴 것도 없는

청이슬 같은 당신 사랑이었음 좋겠다.

  

 

♧ 바바리코트 깃을 세우니,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와 우리들의 가슴을 치네

 

사랑하는 친구여,

오늘 밤은 모두 바바리코트 깃을 세우고,

“바람은 아름답다”며 미쳐들 보세.

착각이어도, 신바람 났으니 얼마나 좋은가.

70년대 초, 소라다방 앞, 막걸리집 <여명> 같은

젊은이들 모이는 시청 후문 뒷골목,

외로움에 멍든 친구들 <깔아놓은 멍석>에 모여

시대를 한꺼번에 역행하여 낭만의 시를 외치며, 절규하며,

취하여 내가 도는지 세상이 돌았는지 모르지만,

낭만을 위하여 골을 비운 친구여,

이별의 손수건 흔들며 떠난 30년 전 그대가

늙었지만 변치 않은 꿈과, 기쁨으로 돌아왔구나.

엊그제 되돌아온 수취인 불명의 편지 다시 꺼내 읽으며

낭만을 이야기하는 그대, 운명 같은 친구여,

35년 전, 우리는 그때,

유행하던 먹물들의 필독서 실존주의와 부조리,

알베르트 카뮈의 <시지프스 신화>를 던져버리고,

혁명처럼 우리들의 신화,

변치 않는 우리들의 신화를 쓰자며

새로 쓴 <청개구리 신화> 원고뭉치를 들고

소라다방 가를 주름잡던 골빈당 시절,

달변도, 광기도, 슬픔도 다 접고,

청개구리 신화를 쓰던 20대의 객기와

낭만을 다시 찾아 이렇게 왔네.

비울 거 다 비웠으니

이제 비로소 취할 수 있겠구나.

그런데 나는 술잔 바라보며 죽음을 생각하는

늦가을의 바람이 되었네.

나와 골빈당의 깃발과 때 묻은 바바리코트만

골빈당과 함께 있구나.

골빈 친구들이여, 다시 한 번

골을 비우자. 한류열풍이여.

골빈 사람들이여, 영원하라.

 

 

 

♧ 서귀포

 

서귀포에는

군데군데 내가 쓴 낙서가 있다.

작은 골목 먼 정 올레밖엔

당신의 따뜻함 배어

여기 아니면 저기도

오래 전의 당신이 살고,

지금은 가고 없는 그리움이 있다.

오늘은

섶섬이 보이는 카페에서

또박또박 그리움 접고

흘려 쓴 편지

하나 또 하나

염을 하는

하루 

 

 

♧ 술집 ‘옴팡밭*’

 

당신의 허영 채워줄 남자 흔치 않고

나의 외로움 채워줄 따뜻한 여자 오지 않는 밤.

혼자 지낸다는 친구들 가을이 와도 소식 없으니,

어젯밤은 비닐하우스 술집,

70년대식 연탄불이 정겹게 타는

술집 ‘옴팡밭’에서, 고등어 구우며

술 한 잔에 물[水酒] 세 잔 마셨네.

함석지붕을 때리는 비, 가슴에 못을 박는 듯

사랑의 약속 하늘만큼 펑크 내며 쏟아지고

나의 애인은 기다리는 날 찾지도 않는구나.

그게 인생이지 하며, 당신이 올 것만 같아

떠날 수 없어 밤이라도 새우려는

내 맘 아는지 모르는지 답답해라.

아름다운 밤이여, 쏟아지는 비여.

더 가지 말라 바람이여.

 

---

* 옴팡밭 : 지명. 움푹한 밭. 

 

 

♧ 성산포 연가

 

시랑할 만했다.

바람난 내가

성산포까지 바람 따라와

바람을 붙잡고 실컷 울다가

새벽길에서 아침 하늘을 보고

기다림의 긴 수평선 어둠 위에

떠오르는 신새벽의 일출을 적으며

모든 걸 걸고

정말 사랑할 만했다.

  

 

♧ 산지항 밤안개

 

내 이름은 산지항 밤안개

슬픈 꼬리표처럼 달고 다니는 내 별명은

마벵이와 영등바람 그리고 구라형이 지어준

필명 이길 승 별 규 勝奎와

외젠다비의 북호텔을 닮은 소설 한편 쓰라고

지어준 산지항 밤안개

밤안개처럼 선창가를 헤배던 날 언제인데

소설 남양여인숙은 가슴에 묻혀 있고,

소금기 마르지 않은 엣 추억을 뒤지며

무적이 피어나는 안개 속을

아직도 떠도는

여인숙 보이

  

 

♧ 충청도에서 온 편지

 

그날 밤이 그리워 나는

당신의 꿈속으로 편지를 띄웠어요.

며칠 후, 무심천 단풍잎에 쓴

당신의 편지를 받았습니다.

느낌으로 전해오는 따뜻한 마음은

정말 뜻밖의 행운이었습니다.

 

지나가는 바람같이 적어 보낸다는 당신의 시는

그날 밤 이후 어렴풋이 예감하고 느꼈던

당신이 아직은 내게 보여주지 않은

오랜 시간이 잠자고 있는 깊은 우물 속에

퍼 올리면 쏟아질 감성의 시편들을

미리 읽는 기쁨이기도 했습니다.

 

외로움과 그리움이 하나 되어 찾아올 당신을 두고

바람으로 머물렀던 청주를 떠나며,

당신이 아주 오래 전부터 알았던 친구 같아

언제 어디서나, 이승이나 저승이나,

자유롭게 오갈 수 있는

시간과 공간에 맡겨 둡니다.

 

오랜 침묵은 침전하여

외로움과 쓸쓸함으로 견고해진

오래된 정원이 우물이 있는 집 문설주에

기대어 수런거리는 바람이 되어 바람의 말로

군밤 닷 되를 심어 끝없이 도란도란

엮어가고픈 가을밤의 꿈을,

이 가을에 충청도로 띄웁니다.

다시 만날 때까지 건강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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