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집 ‘신, 탐라순력도’ 앞머리에
신, 탐라순력도를 그리고 싶었다.
탐라의 역사를 재해석하는 시집을 짓는 동안,
지키고 맥을 잇는 사람들과 비상구에 앉아 활공하는 나의 배후는
여신과 장두부터 피안의 실크로드이다.
누군가 다시 배턴 터치를 하려고
무럭무럭 탐라의 씨앗으로 자라고 있을 테니,
이즈음에서 하늘과 땅과 사람을 쳐다보며 절을 한다.
내가 이룬 것이 아니라 저들의 눈과 귀와 입을 잠시 빌렸으므로,
감사드린다.
♧ 올레
당신 속으로 가는 덫인 줄 모르고, 그러니까 당신 속으로 들어가는 올레 입구에서 휘파람소리 머춰버렸소
삼당밭, 집으로 가는 길은 수선화가 삼박자로 피어 돌구멍도 울었지만
사랑에 미쳐버린 언니가 무서워 꿩소리, 바람소리보다 뒤엉킨 삼나무 돌담이 길기만 했소
자식농사 풍년만 있느냐, 본전 까먹고 창고의 재고로 쌓인 딸년의 머리가 희끗해졌다고 반백의 입술이 어머니를 더듬고
무릎의 연골을 허물고 긴 한숨으로 남은 길, 적(賊)과 혹(惑)이 주름진 길
♧ 가을 한라산
허둥대는 내 뒷덜미를 잡고 귓속 가득 너만 이야기 하는 가을
낙엽이 나자빠진 한라산이
다만 붉어져 어쩔 줄 모른다
너와 나를 어쩌지 못하고 숨기는 저 산,
탄로 날 변명 혹은 빤한 거짓말
부끄럽지 않게 너와 내가 놀던 산,
저 혼자 속이 타는지 확확 번지는 불안으로
우리를 붙잡으려 활시위가 붉다
순리대로, 반듯하게, 정해진 대로
붙잡지 않고 달아나는 우리는
신탁의 영원한 도망자
♧ 비양도
동티가 나서 세 살부터 다섯 살까지 두 눈이 멀어버린 그 사람*이
어머니가 땔감으로 변소 옆 나무를 베어버려
아버지, 새벽마다 용천수를 떠다 빌어 두 눈을 뜨게 해 줬다는 그 사람이
한림에서 농약방하며 늦은 나이에 시 쓰는 즐거움에 빠진 그 사람이
파랑못보다 더 팔랑팔랑 황근꽃 나비 같아서
멜라진 코가
보아뱀처럼 즐겁게 바라보는
밤바다의 섬,
별똥이 날아들어
순력도를 그리는구나
---
* 시인 이중옥
♧ 금능으로 돌아와 줘
파도의 뱃속을 차며 솜털 같은 고동이 피었어
너울로 춤추던 밀물을 무릎 꿇고 엎어주던 너
돌아오기 위해 남긴 금빛 등고선들
등 뒤에 남긴 눈빛이 오래 젖지 않게 꽃게 발로 모래 모종을 심으러 오겠지
발자국 위로 숲이 자라는 맨살에서
말할 수 없지만
잠시만이라도
쪽잠처럼
♧ 구상나무를 보내며
관음사에서 목을 맨 나무를 생각한다
하얀 박제가 되었다, 황홀한 몸짓
열정의 빠알간 구두
자작나무 음악회처럼 소박한 나무그늘에서 노래하다 죽으리라
살아 백년, 죽어 백년이다
옹이진 이별이 아프다
저, 옹이진 사랑 그게 뭔데,
내 다시는 꽃을 피우지 않으리라
나이든 상처에는 후시딘도 잘 듣지 않는지
새로운 흉터, 한해 한해를 견뎌낸 흔적
손사래를 친다
뱃속 태아 같은 잎사귀
꿈틀거리는 밤마다 예불소리
한줄기 별똥처럼 발길질하다 떨어진다
목탁소리가 하늘을 가로지르면
그대 붉게 살찌던, 그해 가을
낙엽처럼 차곡차곡 쌓인 사랑한다던
말과 글자 속살속살
몰려들어 낙엽 속에서 뿌리를 다린다
사랑 깃들지 않아 입을 다문 나를 보시하듯
합장한 나무들까지 그렇게 숨을 죽이고 있다
열반에 든 그리움의 詩 애가 탄다
♧ 시청 앞 어머니 빵집
태풍이 불어도 어머니 빵집은 슈크림이 달콤해요
빗방울 연주를 들으며 들어선 곳
커피 속 형체 없이 진한 향수만 한 모금 삼키는 나,
창밖엔 빗방울만큼 사람들이 뛰어가고
뛰는 가슴만 내 것인 너는, 웃을까봐, 안부문자만
나인 듯 보내본다
그곳에도 똑같이 태풍은 불겠다고
태풍이 불면 술이 마시고 싶어, 나를 거절하지 않던 너
비를 피해 슈크림은 달콤달콤 커피번이 고소고소
케이크들의 잦은 레이스가 간지러워 질투질투
이 수군거림을 너에게 들려주고 싶지만
태풍 부는 날, 보다 웃겼을 나를, 보고 더 웃을까봐
우산 속 아무도 관심 없는 소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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