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일 추위가 계속되는
12월 그믐의 날들,
가로수로 선 동백나무마다
빨간 꽃들을 피워댄다.
찬바람을 안고 바쁘게들
돌아가는 사람들
저 꽃이나마 없으면
거리가 얼마나 쓸쓸할까?
♧ 동백꽃 연가 - (宵火)고은영
갈매 빛 우듬지에 겨울 건반을 두들기던 바람이
사분사분해진 새 녘에
성산읍 산간에 유독 붉은 정 염을 즈려밟고
동백의 핏빛 얼굴을 수탈하는 서설에
동박새가 뜨겁게 질투하며 아침을 찢어발겼다
자지러진다 동박새
누군가 죄의 명분도 없이 내리치는 단 두 대
댕강댕강 잘려나가는 저 동백의 얼굴
흰 눈 위에 낭자한 선홍색 핏자국
본디 사랑을 지키는 건 목숨을 거는 일이다
서럽디 서러운 완벽한 색의 조화
침묵과 주검에 기화되는 실어증
그 푸른빛 향이 창공에 시리다
♧ 동백꽃 - 이희숙
섬처럼 동동 떠다니는 이름 위에 등불을 켜고
죽음보다 깊은 맹세를 새겼지만
한 줌 바람에도 한숨은 깊어지고
한 움큼의 햇살에도 까닭 모를 눈물 고이는
이내 사랑을 어쩌란 말입니까
잊을 수도 없고 지울 수도 없어
시가 되고 노래가 되고 강물이 되어 흘러간
그리움을 어쩌란 말입니까
시간의 문턱을 지나
계절의 강을 건너는 동안에도
그대만을 뜨겁게 사랑한 죄를
이제 와 어쩌란 말입니까
오지 않는 그대를 마냥 기다리는
이내 마음을 정녕 어쩌란 말입니까
그리운 사람이여,
그대 눈길 닿는 길목마다
눈물 글썽이며 피어나는 꽃을 보거들랑
그리워하다 하다 빨갛게 멍든
이내 가슴인 줄 아시어요
♧ 선운사 동백꽃 - 김윤자
사랑의 불밭이구나
수백 년을 기다린 꽃의 화신이
오늘 밤 정녕 님을 만나겠구나
선운산 고봉으로 해는 넘어가도
삼천 그루 동백 꽃등불에
길이 밝으니
선운사 초입에서 대웅전 뒤켠
네가 선 산허리까지
먼 길이어도
님은 넘어지지 않고
한달음에 달려오시겠구나
해풍을 만나야
그리움 하나 피워 올리고
겨울강을 건너야
사랑의 심지 하나 돋우는 저 뽀얀 발목
누가 네 앞에서 봄을 짧다 하겠는가
이 밤, 바람도 잠들고
산도 눈감고
세월의 문이 닫히겠구나
♧ 동백꽃 - 素養 김길자
홍역처럼 돋아난 섣달의 꽃망울
햇살타고 바람 속을 걷다
바람 안고 속으로 우는
그대 그리움 날들
눈길위에 뿌리며
이파리마다 하늘을 담는다
동박새도 시린 발 동동거리는데
그대 사랑하기에 홑옷 입은 채
한겨울 몸을 애태워 피운다.
♧ 동백꽃 - 오경옥
누군가
속울음을 터트리고 있나보다
잊어야겠다고
독하게 꿰맞춘 삶에 이끌려
오랜 시간을
꾸역꾸역 지나왔을 사람
잊은 줄 알았던 마음 한 자락
울컥울컥 목울대를 넘나드나보다
한 번만이라도
추억만으로도
다가서고 싶은
무의식적 금단현상 같은
고독한 통증
낭자한 그리움을
♧ 산사의 동백꽃 - 권오범
하필 백설이 분분할 때 눈에 띄도록
확성기처럼 입을 모으고 환생한 걸 보면
피맺힌 절규의 변죽울림 같은데
이 옹춘마니 캄캄절벽이다
혓바닥 내민 채 몸 던져
약속이나 한 듯 뒹구는 마당가
벌린 입 다물지도 못한 걸 보면
뱉고 싶은 속종이 분명 있었으리라
귀머거리 부처님 귀잠은
목탁소리로도 깨우지 못하는 것을
합장한 손이라고 그 마음 알길 있나,
자기 죄만 중얼중얼 덜고 갈 뿐이지
잔설이 거니챈 듯 글썽글썽
붉은 입술 더 붉게 속삭이는 한낮
풍경이 알아들었는지
호들감스럽게 뭔가 허공에 고자질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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