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화 제2시선집
‘바람의 섬’이 나왔다.
첫 시집 ‘바다와 어머니’에 이어
두 번째인 이 시집은
도서출판 제주문화에서 발간했다.
총 5부로 짜인 시집은
제1부 계절
제2부 연민
제3부 삶
제4부 여행
제5부 고향(제주어 시)과
끝에 양영길의 해설을 실었다.
시 몇 편을 골라
한겨울을 밝히는
사철나무 열매 사진을 곁들인다.
♧ 공간 메우기
마루 출입문 맞은편 벽이
기울기가 심하다며
아내는
대나무와 난을 심는다.
하얀 한지에 묵향으로 심는
오죽과 한란
완성된 두 쪽 병풍이
주위 모든 것들을
열정적으로 껴안으며
기울어진 마루 공간의 벽을 받친다.
창 열어 맞는 봄바람
하르르… 바람에 걸린
오죽과 한란이 보내는
사각사각, 하늘하늘,
매혹적인 소리와 용자(容姿)
마루의 빈공간은 황홀하리만치
그윽한 묵향의 군자로
입주(立柱)하고 있다.
♧ 장송(長松)은 울고
늘 나와 지척에서 마주하는
하 세월 먹은 너분숭이* 장송들
바람 불어오면
아직도
말 못한 사연, 그 한(恨) 둘둘 말아든 채
쉬쉬 쉬… 소리로 우는
벙어리 속울음,
총소리 산울림 되어 구름 속에 흩어지던
무자년(戊子年)* 그날
그 애달픈 모습
바로 눈앞에서 있었다 하네.
봤어도 장님이 되고
트인 귀머거리가 되고
입 다물어 벙어리 되어
심지어 잠꼬대도 해서 안된다는…
하여
눈물 얼룩진 청맹과니 세상살이,
가는 세월
오는 세월
청송가지 솔잎만큼 숱한 가슴앓이 사연
해마다 불어드는
4월의 한(恨)바람 지날 때
맺힌 가지마다 쉬쉬… 쉬
서슬 퍼런 그 속울음
진정 침묵의 아우성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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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분숭이 : 제주시 조천읍 북촌리 4.3학살터(기념관)
* 무자년 그날 : 1949년 1월 17일. 북촌주민들이 학살된 날.
♧ 애월(涯月)에 가면 3
물가에 뜬 달
애월이라는 이름 하나만으로도 시가 된다.
고내봉과 과오름 기슭의
초승달 모양 해변, 갯마을
가없는
물너울소리, 물새소리, 숨비소리, 뒷산의 솔바람소리,
쪽빛바다에 깔리는
금빛 노을,
달빛 흐르는 밤
선창의 벽파(碧波)소리,
밤마다 해상도시의 불빛,
소리와 빛만으로도 사람들 모두에게
시인이 되게 한다.
멍에 벗은 우마(牛馬)들
술렁술렁 들판으로 나가듯
탁 트인 바다머리 저편
돌올하게 솟은
큰 관탈, 작은 관탈섬에 눈 맞춘
닻 걷은 어선들 항로 자유롭고
사람들이래야 촌사람 어질고 순박한 심성
생면부지의 사람들에게도 미더운 세상이네.
한담동의 술막, 대포사발에 담겨지는
노을 금빛,
선창가에서 소주잔에 감도는
은 달빛,
쪽빛, 금빛, 은빛, 솔향기…
빛과 향으로 빚은 술
뒷산의 솔바람 향기 소반(蔬飯)삼아
불콰한 얼굴로 그대와 마주하는
그윽한 한 잔의 술 내 사양치 않으리.
♧ 환해장성
가을 햇살과 고요로 꽉 찬
북촌리 서동해변
아직도 지켜내야 할
그 무엇이 남아 있는 듯
장성은
늙고 쇠약한 몸 사행(蛇行)처럼 누워
망각의 세월을 보듬고 있다.
삶의 터전을 지켜내야 했던
침묵으로 가리키는 그 기억의 길
그 어떤 살벌한 무력도 이 성을 넘지 못했고
다만 있다면 물새와 바람과 파도소리 뿐이라고.
세월에 떠밀렸지만
장성이 느긋한 세월과의 밀회
장구한 세월
사람들 망각으로 허물어지다 버틴
늙은 성담 위로 찔레열매 붉어
한 사내 가슴에 봉화 지피고 있다.
♧ 경주에서의 하루
황룡사구층석탑 기층의 균열 사이
깜깜한 검은 공간
그 안에 담긴 고도 천년의 반월성 역사
침묵의 푸른 이끼 위로 흐르는 달빛 따라
덩달아 흘러간 월명 스님 피리소리
아련하게나마 들릴 듯 말 듯,
첨성대 유연한 곡선으로 비치는
은하수 은 별빛
그 별빛 흐르는 길 따라
말달리며 부르던 혜성가(彗星歌)
화랑도 풍류 속 가무 보일 듯 말 듯,
달 밝은 밤의 처용은
아직도 살아 우리들 곁에 있고
경주사람 신라사람
신라말(言) 경주말(言)
내가 지금 신라 반월성 속에 들어와
우주판타지에 녹아든
신라인들의 가락
반월성에 흐르던
그 가무(歌舞)의 소리들을 가늠하고 있네.
♬ 제주 바다 - 이여도 사나(소리왓 14회 정기공연)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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