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에 다녀온 지도 일주일이 지났다.
아직 산행기를 쓰지 못했지만, 치밭목산장에 대한 느낌이 너무 좋고, 산지기 민병태 아저씨에 대한 고마움이 커서, 먼저 몇 자 올린다.
3년 전 종주 때는 장터목대피소에서 백무동으로 내리는 길을 택했기 때문에 치밭목대피소는 거치지 못했다. 그러나 이번에 천왕봉을 거쳐 대원사로 내리는 길을 가려고 세석산장에서 머물렀기에, 우리는 다음 치밭목산장을 택하게 되어있어, 그동안 권경업 시인의 시에서만 들어왔던 취밭목이나 써리봉, 무제치기폭포 등을 거칠 생각에 한껏 들떠 있었다.
그러나 천왕봉을 거치고 나서 점심을 먹는 자리에서 들어보니, 치밭목대피소에는 예약이 되어 있지 않다는 거였다. 그곳은 머무는 사람이 많지 않아서 개인이 위탁 운영하기 때문에 다른 곳처럼 공식적으로 예약도 안 되고, 아예 전화가 없다는 좀 황당한 얘기였다. 그렇지만 이번 산행을 주선하고 진행했던 산행대장이 과거에 알고 있는 곳이기 때문에 믿고 가도 된다 했다.
산행 코스 안내판에 난이도가 표시되어 천왕봉에서 치밭목 대피소까지가 꽤 험한 걸로 되어 있었는데 사실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내리는 길이였기 때문에 천천히 경치를 조망하며 중봉을 거쳐 써리봉 능선을 따라 펼쳐진 길을 따라 치밭목 산장에 이르렀다. 여기에 나오는 ‘치밭목’은 ‘취나물 밭 길목’의 준 말로 사실은 ‘취밭목’이 맞다고 한다.
사진을 찍으면서 뒤에 쳐져 걷고 있는 일행과 함께 조금 늦게 도착해 보니, 산행대장과는 이미 인사가 끝나 있었다. 산장에서 만난 민병태 씨의 인상은 권경업 시인의 시에 나오는 주인공처럼 평범한 산장지기 아저씨였다. 권경업 시인과 시에 대한 얘기로 인사를 하자 임자를 만난 듯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았다. 화제의 범위에 제한이 없고 ,모르는 것도 없었다. 그리고는 내가 원하는 것을 딱 짚어 해결해 주었다.
우리들의 4박5일의 산행은 서로의 협조로 온갖 어려움을 무릅쓰고 즐겁고 무난하게 진행되었는데, 정점인 마지막 밤을 기분 좋게 보낼 수 있도록 유일한 투숙객인 우리들에게 온갖 배려를 다 해주었다.
그 모든 배려에 이 난을 빌어 고맙다는 말을 전하며, 건강하게 취밭목을 잘 지켜주길 부탁해 본다. 그리고 이번 천왕봉과 대원사 계곡 사이의 사진과 함께, 매개가 되었던 권경업 시인의 취밭목 관련 시를 올리며, 시인에게 이번에 계획한 일이 큰 영광으로 열매맺기를 멀리서나마 기원한다.
♧ 불타는 내 초록의 성지, 취밭목
내 초록성지의 가을은
비 내리는 중에도 매운 연기 한 올 없이
중봉, 쑥밭재를 태운 불길이 써래봉을 타고 내려와
훌쩍, 시월 시린 장당골을 건너 앞산 웅석봉으로 번지면
어느새 가슴에는 타고 남은 재만 풀풀 날려
찾아오는 등산객 발길 뚝 끊길, 취밭목이 걱정입니다
아래 세상보다 한 달 여 먼저 겨울 맞는 그 곳
산중생활 수도승처럼 젊음을 보낸
의롭고 외로운 산사람 민병태의 작은 산장
월동준비는 부족한 중에도 마쳤는지
이 계절 다 가기 전 꼭 한번 들러보리라
마음은 늘 성지순례로 들떠 있습니다
♧ 눈 덮인 취밭목의 아침
산이 춥다고, 마냥
함박눈 내리덮이면
산토끼는, 밤새워
한 땀 한 땀,
목화꽃무늬, 박음질로
누비이불 만들고 갑니다
꽃 피울 봄꿈에, 사랑사랑
산이 겨울잠 들도록
♧ 꿈 - 권경업
달 뜨지 않으면 별 쏟아지는
작은 비탈 흙담을 쌓아
자작나무 군불 처댄 아랫목
동치미 서걱서걱, 토장국 구수한 개다리소반
저녁을 물리면 수줍은 아내는
바느질 당세기* 무명실 같은 이야기
도란도란 풀어내다가
어느새 아이를 서넛쯤 가지겠지
그러다 부엉이 울음 하봉**을 내려와
골골에 눈 내리고 소복이 밤은 깊어
무명 홑청 솜이불 아래
아, 눈부신 속살
생강나무 꽃 필 때 따라 피는 진달래
때죽나무 함박꽃 피었다 지는 날
자지러지는 두견이 울음
조개골 깊숙이 새끼 친 멧돼지
두릅나물 가시 드세어져 쑥밭재를 넘는
가진 것 없으면 어떠랴, 그저
보글보글 정 끓이며 살고 싶은
................................
*당세기 - 광주리의 경상도 방언.
**하봉 - 지리산 천왕봉의 북쪽 연봉. 중봉 아래에 있다.
♧ 취밭목 1
누군들 없으랴
지친 삶의 쓸쓸한 모퉁이
떨군 고개 조용히
되뇌어 부를 이름 하나쯤
너는 나의 그런 그리움이다
하늘아래 가장 따뜻한
♧ 취밭목 2
내 모든 길은, 오직
한곳으로 통한다
너는 나의 눈부신 로마다
♧ 무제치기폭포 1
그리움엔 길이 없어
천길 벼랑 몸을 던진다
나지막이 나지막이
그대라는 바다에 가 닿고 싶어
♧ 무제치기폭포 2
우째 아름답지 않겠노
오직 한 곳 향한
저 처절한 몸 날림이
♧ 취밭목 산장 작은 창
산장 침상 윗칸
유월에도 가끔씩 맺히는 창 하나
거기 누워야만 보이는 하늘
밤이면 손바닥만큼 줄어들어
그리운 산행 보고픈 이름들
빼곡이 잔별로 품고
쪼르르, 옆자리에 들어와 눕는다
더러는 밝고 더러는 희미하게
어쩌다 한둘 꼬리별로 사라질 때
신갈숲을 마구 뒤흔드는
바람, 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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