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순남 산문집 ‘섬, 바다의 꽃잎’을 보내왔다. 오랫동안 꽃과 같이 해온 김순남 시인이 그 동안 틈틈이 써온 산문을 한데 묶은 책이다. ‘제주 섬에서 마주한 사람, 꽃, 바다와 한라산에게 바치는 노래’라는 짤막한 ‘작가의 말’처럼 제주에 온 이후 40여 년 동안 꽃을 가까이 하며 살아온 이야기들이다. 뒤에 40년을 술회하는 ‘파도 위에 꽃바람 -제주에 살며 제주를 생각하다’라는 글과 부록으로 ‘제주의 들꽃’과 ‘꽃말 모음’을 넣었다. 그 중 두 편을 옮겨 남방바람꽃을 무늬로 넣는다.
♧ 양지꽃 핀 오름에
거리에는 왕벚나무 꽃잎이 눈송이처럼 날리고 햇살은 점점 따가운 기세로 머리카락을 파고든다. 겨우내 무겁게 닫혀있던 창문을 열어젖히자 꽃잎처럼 와르르 쏟아져 들어오는 햇살 따라 바람이 살랑살랑 나비처럼 날아들어 집안을 온통 봄 내음으로 가득 채운다.
이처럼 사월의 아침 햇살은 부드럽고 새로운 풍경을 만들고 있으며 인류의 물질문화 혁명의 부산물이라 할 엘리뇨니, 라니뇨 같은 이상기후 현상에 상처를 입으면서도 자연은 그 순환을 멈추지 않는다. 오늘 이 순간에도 자연의 순리는 우리를 찾아와 봄꽃이 되어준다.
진정 제주의 봄은 오름이며 들판이며 소로 길가에서 수줍음 타는 아이처럼 배시시 웃고 있는 들꽃으로 오는 것을, 그래서 나는 그러한 들꽃들을 더 없이 소중하게 생각한다.
어느 계절이고 꽃들은 피어나는 것이지만 유독 봄꽃들이 주는 설레임은 아마 언 땅을 녹이고 나온 기운 때문이 아닐까 싶다. 마른 풀 사이로 다소곳이 피어있는 모습이 하도 정겹고 고와서 그것들이 보고 싶어 안달이 나던 차에 ‘청소년 문학 수련 생태환경 체험 답사’로 도너리오름을 오르게 되었다. 야성의 호연지기를 키우듯 말들이 오름 중턱에서 뛰고 있었다. 겨울 내내 묵혀둔 걸음이라 그런지 숨이 턱에 차고 다리가 몹시 아파 왔다. 그러나 여기 저기 방긋거리며 나앉은 노란 양지꽃들이 온몸을 휘저으며 내 허파까지 나풀나풀 흔들어 주었다. 지난 봄 용눈이오름에서 만난 양지꽃을 금년 도너리오름에서 만나고 보니 반갑기도 하고 고맙기 그지없었다. 할미꽃이며 괭이밥이며 등대풀 들이 저마다 있을만한 그 자리에서 그만한 색깔과 모양을 하고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키고 순진무구한 생명의 기쁨을 안겨주기도 했다.
봄이면 어느 오름을 가나 맨 먼저 노랗게 꽃잎을 물고 나서는 게 양지꽃이다. 이 땅을 살아간 선조들의 강인한 생명력이 일궈낸 삶과 정체성을 노랗게 피워내는 양지꽃. 나는 학생들에게 일러주었다. 이들 양지꽃처럼 너희들도 우리의 삶과 문화와 역사의식을 문학에 담으라고, 그래서 바다 건너 저 먼 대륙을 노랗게 물들이는 꿈을 성취하라고 말이다. 조금은 힘겹게 그렇지만 밝은 얼굴로 오름을 오르는 학생들 위로 고운 햇살과 건강한 바람이 땀방울을 씻어주었다.
이 봄날 우리는 일상에서 잠시 눈을 돌려 오름에 올라볼 일이다. 그리고 금방 세수를 하고 나선 아이의 얼굴처럼 화안하게 웃고 있는 양지꽃을 보며 물어볼 일이다. 무엇 때문에 우리가 헐레벌떡 쫓기며 살아가고 있는지, 우리의 삶에도 노란 양지꽃은 피고 있는지 말이다.
나는 때때로 메마르고 건조한 일상에서 벗어나 양지꽃 노란 꽃물에 마음을 적시고 아련한 유년의 꿈들이 바람결처럼 달려와서 정신을 맑게 헹궈 주는 오름도 꽃도 만나는 호사를 부리고 산다. 그럴 때면 우리가 왜 함께 살아야 하고, 자연환경이 우리에게 얼마나 귀하고 소중한 것인가를 허리 굽혀 살며시 꽃들의 숨소리를 듣는 때가 있다.
♧ 어머니 산에 기대어 피어난 작은 생명들
오랫동안 가보지 못했던 길, 예전엔 몰라서 알아보지 못했던 꽃 동무를 만나러 가는 설렘은 흥분과 감동이라는 말로도 부족하다.
크고 작은 돌덩이를 초록 융단으로 덮고 있는 시로미 더미 사이사이 숨바꼭질하듯 연분홍 꽃송이를 내밀고 있는 한라돌창포, 한라산 푸른 기상을 대변하고 섰는 구상나무 둥치에 기대어 옹알이 하는 자주꿩의다리는 마치 산의 속내를 살그머니 비춰주는 것 같았다
햇볕에 살 데일까봐 더러 구름살도 펴는가 싶더니 소나기도 시원하게 쏟아냈다. 산에 드는 일도 귀한 사람을 만날 때처럼 예의와 겸손을 갖춰야 한다는 말로 새겨들었다. 눈길 가는 곳마다, 발길 멈추는 곳마다 싱그럽고 신선한 말씀들이 순수의 이름으로 풀잎을 굴러 바짓가랭이를 적시는 것마저 감사한 마음인데, 눈보다 마음이 먼저 깜짝 놀랄 행운이 기다리고 있었다. 매발톱 꽃이다. 바윗돌을 등받이로 앉아 감미로운 색깔로 내 눈길을 잡으려 애쓰고 있는 게 아닌가. 꽃집에서 봐온 청색 하늘매발톱이나 탁한 적갈색의 원예종과는 비교도 안되게 화사한 색채라니, 얼른 다가가 깊은 호흡으로 눈 맞추고 그 곁에 앉아 같은 곳을 바라보았다. 소나기가 지나간 자리엔 햇살이 뭉게구름을 하얗게 닦고 있었다. 느낌이 아닌 눈으로 확인하는 고적함의 은은한 맛을 음미하는 것도 황송한데 바위채송화 무리가 노랗게 반짝이며 저도 보란다. ‘아으~’ 터지는 탄성을 불끈 누르고 ‘어느 별에서 내려온 별사탕인가’ 생각만으로도 달콤하다. 산 아래서는 만나지 못하는 꽃동무들을 하나씩 눈 맞출 때마다 나는 철없는 아이가 되어 팔딱거리기만 한다.
가파른 산정에서 구르다 서로 업고 끼어들어 이루어진 바윗더미 틈새를 삶터로 자리잡고 억만 세월을 지켜낸 저 강인한 힘은 과연 어디에서 온 것일까. 자지러질듯 기뻐하다가도 순간 숙연해지는 이 감정은 산의 언어가 주는 파장인가 싶었다. 또한 구름떡쑥은 언제나 나보다 한발 앞서 하얀 걸음으로 풀잎과 돌덩이를 건너는 광경은 구름이 주저앉은 듯 새하얀 눈이 내린 듯하였다. 구름떡쑥 꽃 숲을 걷는 축복이 오래오래 내 삶의 행간을 채우고 남겠다. 빨갛게 풀잎을 달구던 제주달구지풀도 잊을 수 없는 인연으로 두련다.
정상에 다다를수록 기기묘묘한 형상의 거대한 바위들에 압도되는 기분이었지만 거스를 수 없는 한라산의 형형한 눈빛이려니 하고 조심히 조신하게 발을 디뎠다.
어느 바람결에 어느 이슬방울에 딸려왔던 것일까. 바위떡풀을 이 험준한 벼랑에서 만나다니 '절실한 사랑'이란 꽃말대로 얼마나 간절하고 절실하게 원했으면 바람도 꺾이고 구름도 주저앉는 이 높은 산정 바위에서 꽃피웠나 싶었다. 험준한 계곡 높은 산 바위에 붙어사는 이 꽃동무는 넓적한 잎이 바위에 붙은 것처럼 보인 이름이겠지만 그 이름마저 차마 미쁘다.
백록담에 몸을 씻던 구름들이 비켜서고 제주민의 젖줄인 백록담이 푸른 물결에 혼백을 적시며 더디어 한라솜다리 앞에 섰다. '널 만나기 위해 한달의 안식휴가를 다 써도 좋다' 너스레 떨며 찾아온 길인데 이미 꽃은 시들고 있었다. 그래도 괜찮다 널 보는 것만으로도 감개가 무량한 걸.
꽃말이 ‘중요한 추억’ 또는 ‘고귀한 사랑’으로 흔히 산악인의 꽃이라 부를 만큼 극지를 오르는 산사람의 마음을 녹이던 이 꽃은 에델바이스라 해야 얼른 알아듣는다. 알프스하면 먼저 떠올리는 꽃 에델바이스란 ‘고귀한 흰빛’이란 뜻이고, 우리나라엔 설악산에 솜다리와 한라산에 한라솜다리가 있다.
하늘나라 생활이 싫증 난 천사가 지상에 내려와 속세와 부딪칠 일 없는 설산의 대명사인 알프스에 자리 잡았다. 어느날 등산하던 남자에게 발견된 뒤 수많은 남자들의 구혼에 시달리게 되자 다시 하늘로 가버렸는데 지상에 머물렀던 시간을 중요한 추억의 기념으로 에델바이스를 남겨두었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꽃을 제외한 잎과 줄기에 솜처럼 부드럽고 흰털을 감고 있어 마치 눈 속에 흰 꽃처럼 소박한 모습이 고결함마저 감돈다.
높고 험한 바위에서 근근히 살지만 아무데서나 적응하며 살려고 하지 않는 까칠한 성격 때문에 번식이 어렵다. 추위가 얼마나 혹독하였으면, 바람이 얼마나 모질었으면 이 더운 여름에 솜옷을 입고 나섰을까. 어려움을 이겨내는 강인함으로 이 땅에서 오래 볼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한 때는 산행의 기념물로 압화 상품으로 팔려나갔던 아픈 역사를 간직한 우리 산에 몇 안되는 멸종의 위기에 처한 꽃동무와의 귀한 만남을 오래 새겨두련다.
오래 옆에 앉아 이슬도 맞고 바람도 맞아보고 싶었지만 그리 할 수 없는 상황이 안타까울 뿐이다.
아쉬운 발길을 옮기는데 어이구나 이게 뉘신가. 이름만 듣던 한라장구체 아니신가. 연미복 차림으로 바위에 기대앉아 산 아래를 굽어보고 계신다. 가만히 옆에 앉으니 멀리 시가지가 어른거린다. 귀하고 귀한 꽃동무를 품고 바다 끝에 나앉은 수많은 생명을 거느려 살피시는구나. 그래서 한라산은 모든 생명의 어머니요, 어머니의 산이로구나.
구름패랭이, 곰취, 구름미나리아재비, 가는범꼬리, 돌양지, 섬잔대, 바위떡풀 등 산에는 봄 여름 가을 없이 한데 어우러져 저희만의 꽃 세상을 돌아보고 난 뒤부터는 산을 바라보는 또 하나의 눈을 달고 아침저녁으로 산을 쳐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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