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과 자연과 시를 가꾸는 ‘우리詩’ 7월호가 배달되었다. 2014년도 “우리詩 여름시인학교” 안내가 눈길을 끈다. ‘권두 에세이’는 홍예영의 ‘세월호를 되새기다’, ‘신작詩 12인 選’은 임보 정순영 김두환 한옥순 허은희 김세형 조경진 이명 채영선 오명현 남상진 김숙의 시로 꾸몄다.
세월호 희생자 추모시편 ‘세월호 희생자의 명복을 빕니다’를 따로 묶어 이근배 신달자 이무원 공광규 권순자의 시를 올렸으며, 지난 호에 이어 특별기획연재 두 번째로 홍해리 시인의 ‘치매행致梅行’ 10편을, ‘詩誌 속 작은 시집’은 이애정 시인의 ‘등, 아픈 이름에게’외 7편을 임채우 시인의 해설로 실었다.
‘테마가 있는 소시집’은 ‘광합성光合成’을 테마로 나병춘 시인의 ‘하나가 될 때까지’외 10편을 시작 노트와 함께, ‘시 감상’은 권순진 시인의 ‘참혹과 절망과 비통함을 넘어’, ‘시집 해설’은 김열규 평론가의 ‘시심이 신심으로 승화되기까지’라는 제재로 도경희 시집 ‘말을 걸었다’를 다루었다. ‘시와 함께 하는 가족’은 양선규 교수의 「인문학 스프」로 ‘우화 - 도둑질의 도’와 수필산책으로 김홍은 교수의 ‘옹이를 어루만지며’로 꾸몄다.
시를 읽으며 우선 8편을 나름대로 골라, 요즘 한창 산야에서 그 자태를 뽐내고 있는 두루미천남성과 함께 올린다.
♧ 나도 농장주가 되었다 - 임보
금년 봄에
드디어 나도 농장주가 되었다
수만 마리의 양떼나
수천 두의 소떼들을 방목할 만한
아득한 평원은 아니어도
트랙터나 경비행기를 동원해서
씨를 뿌리고 거두어들이는
수백만 에이커의 광활한 농토는 아니어도
아니,
쟁기나 따비를 댈 만한
몇 마지기의 땅도 못 되긴 하지만
삼각산이 건너다보이는 양지바른 곳에
내 밭을 마련했다
구청이 분양한 주말농장인데
3,3대 1의 경쟁을 뚫고 당첨된 것
6만원의 임대료를 지불하고
9,900㎠의 농장― 3평의 땅을 잡았다
내 농장의 명칭은 223호
은퇴한 내겐 ‘주말농장’이 아닌, ‘평일농장’이다
머지않아 우리 집 식탁에
상추며 쑥갓이며 가지며 풋고추며 ……
신선한 야채들이 푸짐하게 공급될 판이다
♧ 드므* - 정순영
할아버지가 받들어 모시던 나라님의 숨소리 깃든 궁궐을 지켜 온 것은 긴 칼의 장군과 먹물의 선비가 아니라 맑은 빗물이 고여 있는 사방 모서리 돌 위의 드므였다. 아! 드므 속 드넓은 하늘과 부드러운 흙의 향기여! 백성의 마음이 여울지는 역사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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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드므 : 높이가 낮고 넓적하게 생긴 주로 물을 담아 놓는 데 쓰는 독.
♧ 삽시도의 노을 - 조경진
노을, 저것은
세상 뒤안길 걸어가는 노인의 눈빛이다
아니다, 축제 피날레의 함성이다
아니다, 경계를 어우르는 샤먼의 굿판이다
노을 저켠 세상은
보이는 듯, 보이지 않는 듯
꺼지지 않는 유적의 숨결처럼
절집 물고기 허공의 외침으로 깨어나는
하루를 허물고 또 짓는 세상
드렁칡으로 얽힌 세상을 끌고 온 노인이
황토 빛 바람을 밟고 천천히 걸어가고
태양이 뻗은 마지막 촉수에 찔린
붉은 양떼를 따라가다
문득 뒤 돌아보니
손바닥 만 한 내 생의 빈 뜰에
‘스피노자’가 사과나무를 심는다
노인이 노을에 젖은 옷을 벗고
새 옷을 갈아입는다
다 타버린 해의 실루엣
셔먼의 굿판이 막을 내리면
또 하루가 생의 나이테를 두르고
삽시도는 다시 촛불을 켤 것이다
♧ 운문의 진진삼매塵塵三昧 - 이명
봉정사는 섬이다
나지막이 허공에 떠 있다
안개에 덮여 팔작지붕만 겨우 보이는 섬
물속은 지레 깊다
물결이 삼보일배하며 밀려드는
그 섬을 오를 때
나는 한 마리 가오리가 된다.
몸은 벗어두고 영혼만 공중으로 나풀나풀 날아올라
만세루를 지날 때쯤
내 몸은 그지없이 가벼워진다
그 섬에서 불현듯 나는 소실점이 된다
섬은 더 이상 외롭지 않다
♧ 보릿동 - 오명현
덜 여문 아이들은 보리밭 사잇길에서
바람이 불면 흔들리고
보리가 밭째 출렁이면 어지러웠다
아이들은 보리홰기를 지긋이 잡고
듬성듬성 뽑으면서 걸었다
자국 드러날까 차마 뭉텅뭉텅 뽑지를 못했다
홰기가 한 모숨쯤 되었을 때
옴팍한 하천 둔치로 휘돌아들었다
바람 잦아들면
꼴마리에 숨겨두었던 성냥개비로
독새풀 검부러기에 불을 놓았다
게으른 연기로 범행현장은 탄로 났으되
까끄라기 온데간데없이 가무잡잡 구워진 보리모개를
구기고 비비고 까불어서
노릇노릇한 낱 알갱이가 한 주먹
입 안에 넣고 잘근잘근 씹을 때
아이들 등 뒤로 검은등뻐꾸기 우는 소리
보리잇동
보리잇동
♧ 주소를 지우다 - 홍해리
-치매행致梅行 ․ 11
소식을 보내도 열리지 않는 주소
아내의 이메일을 지웁니다
첫눈은 언제나 신선했습니다
처음 주소를 만들 때도 그랬습니다
첫눈에 반하는 것도 그렇습니다
내 눈을 사로잡은 아내의 처녀
아직도 여운처럼 가슴에 애련哀憐합니다
이제는 사막의 뜨거운 모래 위
떨어지는 물방울 같은 내 사랑입니다
열어 보고 또 열어 봐도
언제부턴지 받지 않은 편지를 쓰는
내 마음에 멍이 듭니다.
♧ 매듭묶기 - 이애정
풀어진 그대로면 어때서
이리저리 뒤틀어 매듭을 묶어
되었다 싶으면 속속들이 맺힌
손가락의 인연으로
마침내 제 몸 하나 온전히 묶여버린
일상 같은 매듭
약속 없는 세상
한 가지라도 다짐하고 싶어
꼬아보고 잡아당긴
고집스럽던 시간
살아온 반
살아갈 반
뒤늦은 후회
간신히 풀어보다
아예 잘라버리고
이전보다 짧아지고 가늘어진
너와 나의 매듭 풀기
♧ 파도에 대하여 - 나병춘
파도는 맨발이다
맨발이라 달빛도 햇살도 질끈 밟는다
바람도 무서운 듯 도망간다
먼 등댓불도 묵지근히 가물가물하다
맨발로 달려와 알몸으로 부서진다
아무 스스럼없이 애무한다
끊임없는 안타까움으로 부서지고 깨진다
같은 동작과 같은 언어로
똑 같은 춤사위로 변함없이
부서지고 깨지고 까무러친다
시간에게 공간에게
오체투지 무릎 꿇는다
또 다시 항거한다
파도는 맨발이다
눈멀어 무서울 게 없다
귀먹어 떨리는 게 없다
맨발이라 영원히 주인이다
천국과 지옥도 그 앞에 무너진다
아무 가진 게 없어 망설일 것 없다
파도는 온통 푸른 알몸이라
사랑을 안다 전혀 모른다
막무가내 달려들어 한통속으로 뒹군다
깨지고 바스러지고 허허허 웃는다
하얀 거품 안고 쓰러지다 다시 일어선다
맨발로 달려와 맨발로 되돌아간다
되돌아가다 뭔가 안 잊히는 듯
미련처럼 또 다시 돌아온다
불러도 불러도 가버렸다
부르지 않아도 달려온다
편한 알몸으로 바보같이 서러움같이
그래서 파도는 사랑이다 이별이다
오래도록 잃어버린 꿈이다
영원한 불완전 동사다
현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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